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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슥 14:5-11; 고전 12:12-31; 요 17:20-26)

기사승인 2020.01.17  16: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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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현절 둘째주일(1월19일)_여신도회 주일

1. 여신도회 주일

오늘은 1937년 교단 총회에서 제정한 여신도회 주일로 해마다 1월 셋째주일을 여신도회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여신도회 전국연합회는 1919년에 조직되어 ‘생명, 정의, 평화’를 가치로 삼고 하나님의 선교사역에 동참해 왔습니다. 교회 여신도들을 교육하고 여교역자들과 선교협력을 통해 여성지도력을 고양하고 해외 기독여성들과의 연대, 나아가 생명, 정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회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인권과 생태계 보전에 앞장서 왔습니다. 이제 100주년을 향해 나아가는 2020년을 맞이하여 ‘화해의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어 가는 여신도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오늘 세 본문 말씀의 주제도 하나 됨에 대한 말씀입니다. 교회의 여신도회가 하나가 되어야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합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하나 됨을 저해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 말씀의 뜻을 새겨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는 여신도회, 또한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여호와의 날에, 교만하여 공동체에 혼돈을 일으키는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따라서 서신서의 말씀은 공동체 내의 은사와 직분에 관해 다양성과 통일성을 이야기 하며, 복음서는 하나 됨을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2. 공동체 내에서 교만한 자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볼까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성전을 다시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재건 공사가 시작된 지, 16년이 지나도록 공사를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학개처럼 백성들을 책망하는 대신, 장래에 드러날 성전재건의 중요성을 일깨워줌으로 백성들이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스가랴의 예언은 분명합니다. 미래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머물 것이기 때문에 성전은 반드시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스가랴 14장 말씀은 ‘여호와의 날’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엘서의 여호와의 날은 남유다 왕국의 멸망의 날, 곧 이스라엘의 심판의 날인데(욜 1:15), 스가랴 본문에 소개하는 여호와의 날은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학살한 주변 강대국들의 멸망의 날입니다. 참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남은 자들은 구원을 얻는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갑니다. 웃시야 왕을 소개하며 직분의 구분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밀한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이방 나라를 심판하는 여호와의 날이지만, 동시에 공동체 내의 교만한 자를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슥 14:5-7)

유다의 10대 왕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0년간 유다를 통치한 왕입니다.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대하 26:5)”습니다. 여기 스가랴는 오늘 본문의 스가랴 선지자가 아닌 동명이인입니다. 아무튼 웃시야 초창기에는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이겼고(대하 26:6), 암몬 사람들은 조공을 바쳤으며, 애굽 변방까지 그의 이름이 널리 퍼졌습니다(대하 26:8).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말씀에 순종했던 왕이었지만, 웃시야 왕은 나라가 강성하여지고 자신의 이름이 드높여지자,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였습니다.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 것(대하 26:16b)”입니다.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중요한 말씀이기에, 역대하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대하 26:17-18)

제사장이 해야 될 일을 웃시야가 교만하여 행할 때, 팔십 명이나 되는 제사장들이 웃시야에게 조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시야는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말리는 제사장들에게 화를 냅니다. 이때 웃시야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 웃시야의 이마에 나병이 생깁니다(대하 26:19).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웃시야는 제사장들이 그를 방해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바로 그 때 땅이 진동하고 성전지붕이 들춰지면서 그 사이로 한줄기의 빛이 들어와, 곧바로 왕의 얼굴을 쳤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는 바로 나병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만하여 나병에 걸린 웃시야 왕>

이 때 땅이 진동하고 성전지붕이 들춰지는 지진이 일어났죠? 5절에 나오는 지진이 바로 이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하실 때, 교만한 자, 불손한 자는 그가 비록 지금까지 신실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도망가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심판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들은 주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아무튼 이 일로 말미암아 웃시야와 제사장 사이의 분쟁은 해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웃시야에게 나병 증세가 나타나자, 제사장들은 율법에 따라(레 13:1-46 참조) 웃시야 왕을 성전 밖으로 몰아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역대하는 웃시야의 마지막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대하 26:21)

안타깝습니다. 이제껏 잘해 오다가 마지막에 교만해서 무너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만은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라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제사장이 할 일, 왕이 할 일, 예언자가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직분에 차별은 없지만, 구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라고 제사장이 해야 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교만 때문입니다. 서로 존중하며 합력해서 선을 이뤄가야 하는데, 교만은 이러한 선을 무너뜨립니다.

3. 지체들의 하나 됨

서신서의 말씀은 이러한 교만한 자들은 아름다운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교만이 아니라, 서로 배려하고, 품어주고, 아끼며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말씀을 보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그렇습니다. 바울은 몸과 각 지체의 비유를 통해 성령의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전 12:14-20)

나아가 바울은 좀 더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1-25)

<다양성 속의 통일성, 무지개>

따라서 교회는 전체가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통일성 때문에 한 지체의 아픔에 공감 할 수 있고, 한 지체의 좋은 일에 기쁨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6-28)

이렇게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 교사 등 다양한 직분과 은사를 지체의 각 부분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르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기에 조화되어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무지개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입니다.

4.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오늘 예수님은 교회가,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 볼까요? 공동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요 17:20-21)

세상이, 우리 교회의 하나 됨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7:22).” 이것은 예수께서 사랑으로 온전함을 이루는 하나 됨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7:23).”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였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7:24-26)

5. 그 날에는

손규태 교수는 『세계화시대 기독교의 두 얼굴』(한울아카데미, 200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개신교는 아집과 고집, 교파주의, 개별교회주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선교정신에 따라 건강한 시민운동단체들과 연대해, 건강한 사회발전에 기여, 게토화 된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선교자원을 만들어내야 한다. 또 정의롭고 평화로운 자연을 보전하는 삶을 구현하고 구체적인 실천의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 건강한 시민단체와 연대하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정의와 평화, 생태계 보전을 위해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이렇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여신도 회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손규태 교수의 책을 통해 개신교의 선교 비전에 관해 유달상 기자가 정리한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한국개신교가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 선교를 위해서 활동했던 당시를 기억하고, 이들과 함께하는 선교계획을 세워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성과 연대성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셋째, 오늘의 체제에서 식민지 신학과 지배자 신학에서 탈피하고, 이데올로기의 신격화를 배제해야 한다. 
넷째, 성서 및 그리스도의 전통에 서서 세계 고등종교와 협력을 이루고, 분열과 갈등의 중심에서 중재자와 화해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유달상, ‘교회성장론, 교인쟁탈전과 이웃교회 빼앗기 운동으로 이어져’, 『기독교한국신문』 참조)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 선교 비전이 그 옛날 스가랴가 꿈꾼 여호와의 날의 오늘날의 버전입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슥 14:8-9)

하나님께서 홀로 하나 되어 천하의 왕이 되시는 날입니다. 또한 그날에는 다시는 저주가 없는 평화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쪽 림몬까지 이를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슥 14:10-11)

이러한 여호와의 날은 바울 사도에 의해 이렇게 표현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그렇습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날에,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는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감당하며 다른 이들의 은사와 직분을 인정하는 날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29-31)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십시오. 가장 좋은 길을 보십시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신도회원 여러분! 웃시야와 같이 교만하지 말고, 겸손과 하나 됨으로 주님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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