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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독교? 세상으로 돌아간 기독교?

기사승인 2020.01.04  17: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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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현대의 교회는 가이사의 지배 아래에 있다. 교회라는 건축물도,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도 인간, 현실에 일어난 것들이기에 필연적으로 가이사의 손아귀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식으로라도 세상이 아닌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환상과 그 환상에 수반되는 모든 것들을 지향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가이사적인 것과 이데아적인 것, 이 둘의 종교적 방향으로의 적절한 종합이야말로 진정 기독교가 추구해야하고 살아가야 할 삶이다. 그러나 굳이 이 두 요소의 종합에서 어느 요소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느냐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가이사의 손아귀가 더 억센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밝히 말할 수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이 둘의 종합을 기어코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니까. 종교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지금의 기독교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 안에 변화란 있을 수 없다. 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진리이다. 때문에 현실과 부딪히는 부분에 있는 기독교는 굉장히 모순되는 곳에 그 보좌를 놓았다. 마치 현실이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듯.

신은 어디에 있는가? 왜 이 문제점들을 보고도 침묵하는가? 성경이라는 매개가 우리의 시력을 앗아갔다. 때문에 우리는 상상으로만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눈 뜬 장님이라는 것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정적인 모든 것들은 고이고 썩기 마련이다. 썩은 것에서 향기가 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거기에 더해 가이사의 손에서 나는 악취도 함께 나고 있으니, 이 냄새를 우리는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모순’이라고 말할 것이다.

모순은 무엇인가? 사람이 개사료를 먹는 것이다. 호랑이가 고양이를 보고 벌벌 떨며 뒷걸음질 치는 것이다. 교회에서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왜 모순이 발생하는가? 인간이 인간임을 버리려 하는 시도에서 이 모든 것들이 시작되었다. 태초부터 존재하는 모순, 바로 ‘악’이라는 거짓말이다.

▲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부터 기독교는 시작되지 않을까 ©Getty Image

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신의 형상대로 인간이 지어졌다는 것은 단지 육신의 실루엣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내적인 부분마저 신의 형상을 닮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복잡한 부분들은 모두 악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종의 보존을 위해서 악이라는, 종의 존속을 위협하는 것들이 상정된 것이다.

우리는 악이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악은 어느 순간부터 존재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런 것들이 악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으로 치부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한다. 시간이 흐르면 ‘나’라는 존재가 어느덧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그렇다면 죽음은 악이다. 분명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때문에 이것을 악으로 치부하게 된다면 인생의 끝에 어느 인간이든 죄를 범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야하게도 이런 이유 때문에 악을 악으로 부르지 못하고 궁극적 선에 이르는 도구로써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나는 진정 크리스천으로 살기 위해서는 예수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기독교는 예수 속에서 무엇을 발견했는가? 신학이 아닌 신앙 내에서 발견된 것은 ‘신성’이라는 이데아적인 것뿐이다. 이데아적인 이 무기를 가지고 현실과 마치 맞서 싸우려는 듯하니 어떻게 모순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예수의 삶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

예수는 어떤 인물이었나? 세상 권세들의 권력에 반대하고 또 이러한 신념을 자신의 이념으로 삼으며 평생을 지키며 살았던 인물이다. 거기서 발견될 수 있는 모순이 바로 지금의 기독교라는 모순을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그곳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한 채로. 예수는 자기 자신인 채로 산 것이다. 자신에게 작용하는 원리가 그와 같은 삶으로 살아가게 했고 또 그것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이라는 결론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결론으로 이르는 길이 오직 한 길 뿐이라면, 천국은 예수만을 위한 작은 공간이 될 것이다.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어떤 것으로 맺어지는 관계들이 있다. 이것은 나와 나, 나와 타인, 나와 집단 등 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분명 그 관계 속에 내가 있건만 사람들은 어떤 보편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사랑의 객관적 내용을 내게 설교하며 강요한다. 내가 받는 것, 혹은 주는 것에서 스스로가 사랑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면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랑법으로 사람들과 관계해 갔다. 예수와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자들, ‘들을 귀 있는 자들’의 반대편에서 방황하는 자들에게는 다른 방식의 사랑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부흥회는 언제나 성공적이다. 부흥회 속에서 누가 누군가에게 ‘은혜 많이 받으셨나요?’ 하고 물어본다면 누구나가 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부정이 아닌 긍정의 대답을 하기 때문에. 이 긍정적인 인간들의 부흥회가 끝나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다시금 죄라 약속된 것들에 점철되고 그들은 여전히 고통 받는다.

행여 나의 생각들이 사실은 다 틀렸고 지금까지의 기독교가 아무 모순이 없었기에 이 가르침을 잘 이어받고 평생을 살다가 죽어 천국에 간 사람이 있다고 치자. 신이 그를 칭찬한다. ‘너는 사랑을 잘 실천하고 왔구나’ 그럼 그 사람은 대답할 것이다. ‘네? 제가 사랑을 행하고 왔다고요?’ 이 예시는 자명한 것이다. 스스로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엔 의심만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 내에는 많은 분파들이 있다. 내재되어 있는 크고 작은 부분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장로교는 칼뱅이 주장한, 구원 받을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예정설을 믿고 있다. 이것은 감리교인인 우리가 봤을 때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예정설에서 사랑의 위안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옳은 것일 것이다.

예배 때의 한 설교가 떠오른다. 데마라는 인물이 성경 속에 딱 3번 언급되는데 마지막에 이 이름이 언급 될 때의 내용은 전과는 다르게 그를 질책하는 내용이다. 질책의 사유는 데마가 세상을 사랑한 나머지 속세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데마와 같은 자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기독교인으로써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언젠가는 교회와 세상을 이분화 하려는 것에 지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으로 돌아가 탕자로써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을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이미 우리는 탕자임을 알아야 한다. 믿음은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행위는 믿음의 산물일 뿐 절대로 믿음보다 행위가 우선이 될 수는 없다. 족쇄가 족쇄라 느껴질 때, 그것은 진정 족쇄가 되는 것이다. 그 족쇄를 왜 필연처럼 느끼며 왜 깨닫지도 못한 것들을 마치 깨달은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라면 왜 지금 세상은 진리라는 흐름에 몸을 담지 않고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거슬러 가려고 하는가? 그리고 이 거스름이 더 강력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은 객관적인가? 당장 오늘 내일하며 거동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삶을(본인 스스로가 고통스럽다 여기는), 호흡기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을 강요하는 것이 사랑인가? 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그 행위를 강요하며 사랑을 가르칠 수 있는가? 전혀 힘들다고 여기지 않는 이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이 사랑인가? 자녀가 가고 싶지 않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통상 행복할 것이라 여겨지는 꽃길 위에 자녀의 삶을 위탁하는 것이 사랑인가? 사랑이라는 이름의 보좌에 이미 누군가가 앉아 있다면 어느 누구도 사랑을 주거나 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매뉴얼과 같은 사랑이 아닌 본능적 사랑이 진정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능적 사랑을 하기에는 직·간접적으로 너무나 많은 교육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를 연인 관계의 그러한 사랑으로 좋아할 때 그것은 삶을 통해 교육되어진 것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선하다 교육되어진 것에 의한 가르침으로 감정이 정해진다. 만약 우리에게 외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선함과 악함에 대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비로소 눈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가 된다. 매뉴얼에 의한 사랑의 행동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구나’하는 것만을 느낄 수 있을 뿐, 그 안에 사랑이 싹트기는커녕 부담만 자리하게 된다. 남이 원하지 않고 내가 이해되지 않는 사랑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투성이기에 사랑인 것인가?

앞서 얘기했던 교회와 세상,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부분이 합쳐져 하나로 가야 한다는 것은 위의 것들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세상은 본능에 충실한 세상이다. 이것이 몹시도 위험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위험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연적인 것을 악으로 보는 사람이리라.

그러나 교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악을 수용해야 하는, 어찌 보면 굴욕적이라 할 수 있는 모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악이 악이 아님을 알게 되고 나면 모든 베일이 벗겨져 밝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앞서 말했듯 각 부분의 적절한 퍼센티지의 종합이지 전체의 융합이 아니다. 왜냐하면 악이 악이 아니게 되더라도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주관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기독교의 목표가 아닌 모순된 이념에 대한 것들이었다. 사랑이라는 목표는 변하여서는 안된다. 다만 그 목표를  향한 형식적인 것들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현재까지의 역사 속에서도 그렇고 후에 쓰여질 지금에 대한 역사에서도 자명하게 드러날 것은 ‘불변하지 않을까’ 하는 물음과 그에 대해 직관적으로 일어날 ‘확신’일 것이다. 그 불안정한 확신을 견고히 하기 위해 모든 것은-아니 인간들은-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서 칼을 차고 갑주를 두른 채 바삐 눈알을 굴리며 적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철로 된 성을 세우고 스스로가 진리로 상정한 것을 다시는 열어보지 않을 궤 속에 넣어놓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잠금장치를 한 뒤 그제서야 안심을 한다. 허나 그때가 되면 꼭 정해놓은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적이 찾아온다. ‘변화’라는 칼바람. 그것은 어느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신의 힘을 소유하고 있다. 당해낼 수 없는 적과 대면한 수호자는 다량의 피를 흘리며 자신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들어있는, 다시는 열어보지 않았을 궤를 열어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궤 속에 넣어놨던 것이 칼바람이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을까?

미련한 그는 더 강력한 칼바람을 ‘무엇이든 담아놓을 수 있는’ 그 궤 속에 다시금 담으려 노력할 것이고 그 노력은 ‘성공’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있을리 없는 전쟁터를 전쟁터로 만드는 그의 능력에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 전쟁에서 새로 등장하는 칼바람에 의해 수호자의 의기양양함을 씻어내기에는 역부족일 수도 있다. 새로이 나타나는 적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약하다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그 궤를 열어보기 바란다. 그 속에 있는 강력한 무기가 단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는가?

사실 이 칼바람은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 ‘바람’ 그 자체인 채로. 이 바람이 자신의 결을 날카롭게 한 이유는 바람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찾아야 한다. 수호자가 되어버린 우리에게서 말이다.

누군가가 철로 된 성을 짓는 순간 그곳은 전쟁터가 되어버린다. 타인에게 위기감을 조성하게 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누구도 비웃지 못할 성을 짓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진정한 객관이 아닌 주관으로 지어진 그 견고한 성을 잘 보라. 그것이 진정 ‘철’로 되어 있는가? 과연 모래로 지어진 성이지 아니한가?

계속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렌즈로 해서 현실을 보게 되면 분명 태초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 온 전쟁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누가 안전한 길이라 공인되지 않은, 가시덤불이 무성할 것 같은 길을 택하겠는가? 그러나 이해하지 못할 사랑을 할 바엔 예수라는 포장도로가 아닌 ‘나’라는 비포장도로를 선택하는 것이 더욱 그럴 듯 하며 그것이야 말로 살아 숨쉬는, ‘삶’이 아니겠는가. 모든 가치의 무가치함을 알게 된 후 길을 모색할 그 때야 말로 비교할 것이 전혀 없는 단 하나의 길만이 보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한국교회를 떠나 세계 각지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기독교에 통용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두가 모순이라는 첫 걸음에서부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적이라는 것은 인식론적 폭력일 수 있다. ~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교육되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적이라고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엄청난 교육열에 휘둘려야 하고 ‘나’라는 존재에게 몇 등급이 새겨질까 잠시도 염려를 놓을 수 없으며 ‘한국적‘이라는 선로를 이탈하므로 생기는 필요 없는 동정에 눈물을 흘려야 한다.-마치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비판적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놀랍게도 이 말은 현 크리스찬들의 양심을 찌르는 예리한 바늘일 수도 있다!-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는 이들에게 흡연하는 이를 정죄할 수 있는 권리는 누가 주었는가?

우선적으로 ’한국적‘이라는 말을, 이데올로기를 내려놓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건강한 기독교로의 첫 걸음이 아닐까?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다 버리고 각자의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하므로 천국에 예수님만을 위한 자리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음을 확신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서성찬(감리교신학대학 종교철학) gogopal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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