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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기사승인 2019.12.10  17:3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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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떤 메시야를 기다리는가?(사 11:1-10; 롬 15:4-9; 마 3:1-12)

< 1 >

‘메시아니즘’, 악하고 타락한 세상을 멸망시키고, 정의와 행복을 실현할 구세주가 나타날 것을 믿는 신앙은 유대교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그리스도’로 번역되는 ‘메시아’라는 단어 자체가 히브리어이고,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여 왕, 제사장, 예언자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태동했다는 점에서 메시아니즘은 전형적인 유대적 사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메시아니즘이 배태된 것은 출애굽 후, 왕정체제가 수립되면서였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어 통치할 것이라는 약속에서 태동한 메시아니즘(삼하 7,8-29)은,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지속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언자 이사야는 열강간의 평화, 모든 피조세계의 조화를 가져올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을 예언했습니다. 그 후, 메시아니즘은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기원전 140년부터 기원전 37년)까지 수면 밑에 있었으나, 기원전 4년 헤롯 대왕의 죽음 이후, 로마통치 시대의 격동기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메시아니즘의 특징은 현재를 고통과 죽음과 악에 의해 지배되는 부정적인 세계로 보면서, 새로운 세계, 정의와 평화가 지배하는 미래를 지향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완성과 종말로 향하는 시간의 직선적인 진행과정이 있다고 이해하는 헤브라이즘 문화 속에서 나타난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메시아니즘이 헤브라이즘 세계 밖에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해방을 추구하는 급진적 변혁 운동이 특정의 카리스마적 인물과 결합된 메시아 운동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동서고금을 통해 언제나 있었습니다.

불교의 ‘미륵 사상’도 일종의 메시아니즘입니다. ‘미륵불’(彌勒佛)은 본래 ‘마이트레야’(Maitreya)를 음역한 것인데, 순례자나 여행자들을 보호하는 ‘우정의 신’이었습니다. 이 ‘마이트레야’가 한자로 음역되면서 ‘미륵’이 되었는데, ‘미륵’은 ‘온 세상이 부처로 가득 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륵 신앙은 미륵 상생과 하생 신앙으로 발전했는데, 특히 하생 신앙은 종말론과 결합되어 메시아 대망론적 요소를 강하게 가졌습니다. 중국역사상 유일의 여자 황제였던 당나라 시대의 측천무후(則天武后, 624년-705년)는 자신이 환생한 미륵불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정치권력을 메시아니즘으로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미륵 신앙은 중국 북위(北魏) 시대, 대승의 난, 청나라 시대 백련교도의 난(白蓮敎徒亂, 1796년-1804년)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륵신앙은 신라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신라시대 미륵신앙은 화랑(花郎)과 연결되어, 미륵신앙의 이상세계를 신라 사회에 구현하고자 했던 의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미래불로서의 미륵의 출현과 관련된 유토피아적 이상세계에 대한 꿈은 민중불교를 통해 전승되었습니다. 전남 화순에 있는 운주사(雲住寺)의 와불(臥佛)에 얽힌 이야기가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 불상 천 위와 탑 천 개를 세웠다 하여 일명 ‘천불 천탑’이라고도 불리는 운주사에는 이름도 없는 석공들이 만들었을 것이 분명한 누워있는 불상들과 탑들이 지금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 Edward Hicks, 「The Peaceable Kingdom」(1837) ⓒGetty Image

전설에 의하면, 운주사를 창건했다는 풍수의 원조인 도선 국사(道詵國師, 827년-898년)는 하룻날 하룻밤 사이에 ‘천불 천탑’을 세우면 새로운 세상이 온다고 믿었답니다. 새로운 세상 오게 하기 위해, 온 세상이 부처로 가득 찬 광명세상 오게 하려고, 석공들이 땀흘리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일하기 싫어한 한 동자승이 ‘꼬끼오’ 하고 닭소리를 내는 바람에 일하던 석수장이들이 모두 날이 샌 줄 알고 하늘로 가버려 결국 와불(臥佛)로 남게 되었는데, 이 누워있는 와불들이 일어나는 날, 이 땅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이지요.

믿거나 말거나,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천불 천탑’을 세우겠다고 달려든 석공들의 의지와 절망, 그리고 언젠가 이 누워있는 와불들이 다시 일어나는 날, 그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의 흔적을 우리는 운주사에서 오늘도 볼 수 있습니다. 민중신학자 서남동 교수는 이것을 불교적 민중 메시아니즘이라고 했습니다.

증산교(甑山敎)가 미륵신앙의 유산으로 채색되어 있다면, 통일교는 기독교 메시아니즘으로 채색된 신흥종교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에서 일어난 홍수전(1813년-1864년)의 태평천국의 난(1851년-1864년)도 기독교 종말론의 영향을 받은 일종의 반체제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니즘은 종교적 색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세속화된 형태의 메시아니즘도 있는데, 맑시즘(Marxism)도 일종의 기독교종말론의 세속화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런 정치적 메시아니즘의 특징은 정의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의 실현이 아니라, 단지 지도자(권력)의 교체로만 끝났다는 것입니다. 혁명에 성공한 지도자가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혁명의 자녀들을 삼켰다는 것이지요.

< 2 >

메시아니즘은 역사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지만, 그 근본은 이스라엘의 예언자 전통, 특히 이사야 예언자에게 있습니다. 이사야는 패전하여 강대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자기 조국 유다를 회복할 새로운 지도자를 기다렸습니다. 그 지도자는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다고 예언함으로써, 이사야는 그가 바라는 새로운 지도자가 다윗의 후손임을, 그리고 그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이 다윗 왕정의 회복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왕은, 더 이상 우상을 섬기지 않고, 백성을 폭압적으로 통치하지 않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왕’,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하는 재판관’,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 통치자’라는 것이지요.

가난하고 억울한 백성의 한을 풀어주고, 정의와 공의가 넘치는 세상에 대한 희망은 그런 세상을 만드는 지도자에 대한 기대와 언제나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메시아 없는 메시아니즘은 공상적 유토피아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정치가 실종되고, 정치가들이 경멸 받는 현실은 역설적으로 진정한 지도자에 대한 기대와 열망의 반영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언자 이사야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은 단지 유다 민족의 회복과 왕정국가의 재건이 아니라, 우주적 지평으로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사 11,6-9).

예언자 이사야의 꿈은 이제 더 이상 자기 민족의 회복과 국가의 재건에 머물지 않고, 생태적 평화로 확대됩니다.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새끼 염소, 곰과 암소, 사자와 살진 짐승, 젖 먹는 아이와 독사, 젖 뗀 아이와 살무사 등 강자와 약자, 갑과 을, 먹고 먹히는 적대적 관계가 사라져,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폭력적 관계의 극복은 인간관계, 국가간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 모든 형태의 강자와 약자의 관계,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언자 이사야가 본 새로운 세상은 역사 속에서 우리가 경험한 여러 가지 형태의 메시아니즘들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이사야의 비전은 생태적 평화까지 포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도 폭력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다른 정치적 메시아니즘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이사야는 정의로운 세상과 생태적 평화가 가능한 것은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할 때 가능하다’고 합니다(사 11,9).

< 3 >

그 반대로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그 땅에 진실도, 사랑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기 때문이다’고 예언자 호세아는 질책합니다(호 4,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에,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탄식하고, 주민은 쇠약해지고,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들도 다 야위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도 씨가 마를 것이라고 합니다(호 4,2-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곳에서는, 오직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게 됩니다. 더불어 사는 이웃도, 동식물도, 자연도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오직 자기 자신만 보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오직 자기 자신만 보는 세상,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반드시 망한다는 것이 예언자 호세아의 증언입니다(호 4,14).

미국 인디언 크리 족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마지막 나무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마지막 강물이 더럽혀진 뒤에야,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비로소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사람이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만드신 이 지구가 더 이상 파멸에 이르지 않으려면, 아니 인류가 멸절하지 않으려면, 인간이 회개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것처럼,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마 3,8). 요한에게 세례는 회개의 표징이었습니다(마 3,11). 흐르는 강물에 온 몸을 담금으로써, 죽음과 생명, 어둠과 빛, 죽임과 부활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깨끗해진 몸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시작은 과거와의 단절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마 3,7-10)고 외쳤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것이 ‘주제넘은 생각’이라고 비판합니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현실과 자신들의 처지를 그들이 몰랐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요한은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마 3,9)고 함으로써, 오직 오래된 전통에 의해서만 뒷받침되는 지도자들의 권위를 상대화시키고, 그들의 허위의식을 조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대는 빠르게 변했고, 더 빠르게 변할 것인데, 과거와 전통에 사로잡혀, 변화의 속도와 방향을 알지 못하는 지도자들은 조롱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증언합니다. 그 분은 자기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기에,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자신을 낮춥니다.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분(마 3,12),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과 불은 사실 하나입니다. 불이 모든 것을 태워 없애듯이 성령은 불처럼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불태워 없애십니다. 쭉정이도 쓸모가 없어 불태워질 것입니다. 시인 신동엽이 1967년에 쓴 시, ‘껍데기는 가라’, 아마 여러분 모두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자기 피는 흘리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희생이 맺은 결실만 탐하는 사람은 껍데기입니다. 지나간 혁명에 대한 회상에만 사로잡혀, 오고 있는 혁명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입니다. 옛날에는 이랬는데 푸념하면서 새날을 상념하지 않는 사람도 껍데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만으로(가짜뉴스만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도 껍데기입니다. 쇠붙이(무력)가 강하다고 믿지만, 향그러운 흙 가슴 안에 있는 생명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도 껍데기입니다.

< 4 >

이런 껍데기,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고, 알곡은 곳간에 모아드리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메시아,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마 3,12). 죽음 없는 부활 있을 수 없듯이, 심판 없는 구원, 회개 없는 새로운 출발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 예수님은 우리를 다윗의 왕국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새로운 권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과거의 회복’이 아니라, ‘미래의 선취’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돌아갈 나라가 아니라, 전적으로 새롭게 오고 있는 나라입니다. 다만 그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고, 누룩처럼 보이지도 않아 언제 시작되고, 어떻게 올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안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되는 것처럼(마 13,32),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옵니다.

아니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은 우리 가운데서 이미 자라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이미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가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주님을 본받으면서 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내와 위로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롬 15,4-5).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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