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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로 귀농하다

기사승인 2019.12.07  18: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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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부와 하늘의 소리를 듣기 위해

1996년 봄,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개천을 끼고 있는 산비탈에서 농사수련은 시작되었다. 산비탈이니 기름을 쓰는 농사도구는 일체 없고 오직 곡괭이, 삽, 호미 등이었다. 밭을 만들고 비닐도 씌우지 않고 그야말로 자연농업·유기농업이다.

유기농업에 대한 깨달음

작업을 하다 뒤를 돌아보면 “어휴, 이정도밖에 못했나! 언제 다하지!” 비교하게 된다. 그러면 힘들다. 성과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현재에 집중해서 일하다가 힘들면 쉬고 그러면 기분이 좋다.

식사는 완전 채식이다. 기르는 야채, 산에 들에 나물, 그것이 다다. 그러니 맨날 비빔밥이다. 미네랄, 비타민, 섬유질로 뭉쳐있는 치유능력이 있는 야채·나물을 최대한 많이 먹는 방법이 비빔밥이다.

밭농사를 쉴 때는 산을 돌아다니며 온갖 풀들을 베어 지게로 나른다. 효소를 만드는 일이다. 필요한 돈을 버는 방법은 효소밖에 없다.

10월달에 들어서니 봉화는 일이 없다. 높은 산이라 추위도 빨리 온다. 하산할 때가 되었다.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수를 따라 높은 산에 오른 기억이 난다. 베드로가 높은 산이 좋았는지 예수께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자고 한다. 예수는 고난의 현장을 향하여 하산한다.

농사수련을 하면서 정리되는 것이 3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농민대중과 함께 직거래 유기농을 한다는 것이다. 봉화는 높은 지형이라 고냉지 채소를 많이 한다.

어느날 풀을 베러 산길을 걷다가 배추를 수확하는 광경을 보았다. 배추를 뽑자 바로 농약물통에 담았다가 트럭에 싣는다. “아하! 저렇게해서 가락시장으로 가는구나! 땟깔이 좋아야하니 시들지 않게 저렇게 농약물에 담궜다가 파는구나!” 저런 농사는 절대 해서는 안되겠다는 각오를 하였다.

노동직거래에 대한 눈을 뜨다

유기농사도 3가지 유형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도사형유기농이다. 도사형이란 결혼하지 않은 스님처럼 판매는 생각하지 않는 자족형의 유기농이다. 둘째는 상업형유기농이다. 이는 철저히 돈을 벌기위해 생산하는 유기농이다. 셋째는 나의 가정과 소비자의 건강을 책임지면서 가족의 생활도 영위할 수 있는 직거래유기농이다.

도사형의 유기농은 아름답고 많이 늘어날수록 좋지만 농민대중이 따를 수 없고 면이 아니라 점으로만 늘어나는 농사다. 직거래유기농은 농민대중과 함께 면으로 확대되는 유기농이다. 직거래유기농이야말로 다시한번 생산지인 농촌바닥에서 농민대중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여는 시작이라는 확신이 왔다.

둘째는 지역권 설정이다. 우리나라는 봉화같은 오지를 빼면-1996년 당시는 소백산 터널이나 현동터널 등도 안 뚫렸을 때라 인천·서울에서 7시간은 자동차를 몰고 가야 했다-보통은 농촌과 도시가 1시간에서 1시간30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은 농촌과 도시가 대립적이면서 농촌이 도시에 종속화되어 있는 것 같지만 본래 올바른 관계는 상생의 관계이고 이를 회복함이 자연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또한 생산이 있으면 반드시 소비도 있어야 하기에 처음부터 가까운 농촌과 도시를 둘이 아닌 하나의 권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판단이다.

셋째는 수도권의 한 농촌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인구의 50%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나라는 아마 세계에 없을 것이다. 수도권의 한 농촌에 자리잡아 수도권 도시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찾아와 자연을 접하고 농사를 체험함으로서 사람이 자연과 하나임을 체득토록 협력하는 것이 나의 사명으로 닥아 왔다.

강화도로 가다

어느날 그 농촌이 강화도라고 나의 뇌리를 칠 때 나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1000평의 논·밭이 딸려있는 양옥집이 천만원 전세로 나왔는데 장진영 화백이 김정택 목사가 영순윈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전화였다. 드디어 도시파인 아내와 내딸이 걸려든 것이다. 그래도 남편·아버지가 봉화에 있으니 아내와 딸은 가끔 놀러왔다. 봉화에서 수영도 하고 울진으로 가서는 맛있는 회도 저렴하게 먹고하다보니 어느새 농촌이 좋아졌는 모양이다.

내가 귀농하기 전에 연수구에서 같은 아파트에 살던 조용명·노미화 부부와 나에게 요가를 배운 장진영·김진수 부부는 이미 1995년에 강화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조용명·장진영이가 강화 도장리로 이사갈 때 도장교회 박성규 목사를 내가 소개해주고 박성규 목사는 전셋집을 구해줬다. 박성규와 서기원이는 감신대 재학중일 때 학내사태 주동자로 퇴학을 당했었다. 그 때 친해진 후배들이다.

복권되자 박성규는 복학했고 서기원은 아예 다니질 않았다. 내가 인천에서 전선체 국민연합 의장을 맡고 있을 때 박성규는 도장교회 담임으로 와 있었다. 박성규와 서기원은 도장교회 신자들과 함께 강화쌀-이때는 강화도에 친환경농업이 없었다-과 유정란 직거래를 인천과 부천에서 했다. 배달할 사람이 필요하다 해서 국민연합 간사를 맡고있던 신성식을 소개해 줬다. 간사 월급을 못주던 시절이라 배달로 생활을 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조용명은 인천전교조 초대지부장이었고 노미화는 아내와 나이가 같은 친구였다. 노미화 딸 옥원이는 우리딸 나래보다 한 살 언니로 연수구 아파트에서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강화도로 놀러왔다가 장진영까지 만나게 되었다. 나는“당신이 좋으면 당신이 계약하시오”하고 흔쾌히 대답하였다.

이렇게 강화도 귀농이 이루어졌는데 강화도에 와보니 박성규 말고도 이미 교동에는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윤여군 목사가 인사리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고 화도 내리에서는 천경배 신부가 내리성당을 담임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은 교회와 신학, 사회과학적 지식에의 접근은 그만 두기로 마음먹었다. 맑음을 유지하고 현장에 있으면 현장이 나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고 실천할 과제도 던져줄 것이란 믿음이 왔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도 가능한이면 쓰지말자! 다짐했다. 하나님을 나의 편의대로 사용하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각오에서이다. 오직 예수의 헌신적인 생활을 본받자는 마음만을 가지고 현장에 임하기로 하였다.

이때 다가온 성서말씀이 겨자씨 비유이다. “하나님나라는 겨자씨 한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과연 내가 현장에 떨어진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 한알일까?

김정택 목사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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