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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슥 2:1-13; 롬 11:25-32; 눅 19:28-40)

기사승인 2019.12.06  20: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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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림절 둘째주일(12월8일)

1. 전체주의를 갈구하는 폭민의 시대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의 열매는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린 사람들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억압했던 사람들이 누립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지난 시절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희생했던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독재를 찬양했던 사람들이, 자유를 억압했던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혜택을 누리며, 또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훼방하고 있습니다. 지난 독재와 전체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계속해서 적폐세력들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켜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추운 겨울이 계속되는 이유입니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여성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책 가운데,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 2006)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었던 ‘절대 악’으로서의 정치체계인 ‘전체주의’ 곧, ‘히틀러의 나치즘’과 ‘스탈린의 공포정치’의 기원과 특징에 관해 분석한 책입니다. 그럼,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란 무엇일까요? 아렌트의 말을 정리해 봅니다.

“전체주의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운동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운동으로서의 특성을 유지할 동안에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전체주의 운동의 핵심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지지자를 끌어들여 조직하고 그들을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체주의 정권은, 개성을 가지고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관계를 단절시켜 획일화되고 고립된 군중, 혹은 잉여 존재로 만드는 정치적 도구와 장치를 끊임없이 발전시킨다.”

지지자를 조직하고 활동하기 위해 개인들을 획일화시키고 고립 시킨다는 것입니다. 가짜 뉴스와 유튜브에 매몰된 ‘극우태극기부대’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개인들, 혹은 군중들을 한나 아렌트는 ‘폭민(暴民, Mobs)’이라고 합니다. ‘사나운 백성’으로 풀어 쓸 수 있겠습니다. 극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아무튼 아렌트는 폭민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근대 국민국가의 몰락과 계급사회의 붕괴과정을 통해 어떠한 계급이나 정당 혹은 공동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잉여집단인 ‘폭민’이 발생했다. 체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얻지 못한 모든 계급의 폐물로 구성된 이 집단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원자화되어 있으며 절망과 증오로 가득 찬 채, 자신들을 조직하여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할 지도자를 기다린다. 이러한 폭민의 존재야말로 전체주의 발생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전체주의는 간단히 말해 폭민의 운동·조직·정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증오와 절망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당시 독일의 극우 기독교는 나치즘의 다른 이름이며, 스탈린 공포 정치의 현재적 구현인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폭민은 ‘전체주의 운동을 지지했던 낙오한 모든 계층’을 뜻합니다. 봉건 신분사회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어 나타난 근대의 평등한 개인들이 그들의 자유로운 시민적 정체성을 만끽하는 대신, 나치 같은 폭력적 정치집단에 의해 조직되면서 스스로 폭민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영혼을 상실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에도 폭민이 등장했습니다. 절망과 증오로 가득한 시민들에게 증오할 대상을 만들어 주는 누군가에 의해(저는 이들을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전광훈 같은 자들입니다) 건전한 시민들이, 교인들이 폭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폭민에 의해, 지금 아기 예수께서 오시는 겨울이 차갑고 춥습니다.

그러나 이 춥고 고달픈 계절에 우리는 대림절 둘째주일의 촛불을 켭니다. 대림절기에는 다섯 개의 초를 사용하여 순서대로 주일마다 불빛을 하나씩 늘려가면서 밝힙니다. 이 촛불은 세상의 빛(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계시기 때문에, 초의 색깔이 점점 밝아집니다(1.진한 보라색 촛불→2.보라색 촛불→3.연 보라색 촛불→4.분홍색 촛불). 그리고 마침내 성탄절에는 하얀색 촛불을 켭니다. 오늘 둘째 주 촛불은 회개와 평화의 촛불입니다.

<대림절 둘째주, 회개와 평화의 촛불>

따라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회개를 통한 평화의 약속입니다. 불순종한 예루살렘을 다시 택하시며 변함없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그리고 다시 택하시는 은혜를 거절하면 돌들이 소리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적그리스도를 갈구하며, 전체주의로 돌아가고자 하는 폭민의 시대에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아, 예루살렘이여!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볼까요?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북 왕국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것입니다. 특히 다윗 왕조의 전통을 이어받은 남 유다의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성이 무너지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십니다. 구약 본문인 스가랴 말씀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호라! 너희는 북방 땅(바벨론 성)에서 도피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내가 너희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내가 손을 그들 위에 움직인즉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들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하셨나니,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리라.”(슥 2:6-9)

비록, 북방 땅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어서 도망쳐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이기에, 두려워 말고 말씀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부리던 이들이 이제는 이스라엘에 의해 노략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재건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슥 2:1-5)

다시 예수살렘 성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준 불기둥과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불로 예루살렘 성곽을 둘러싸 보호해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성전재건 공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생업에 전념하느라, 16년이 지나도록 성전재건 공사를 마치지 못합니다. 이때 등장한 예언자가 스가랴입니다. 스가랴는 백성들에게 힐책하는 대신, 장래에 드러날 성전재건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따라서 유대백성들이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스가랴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미래에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머물 것이기 때문에, 성전은 반드시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스가랴서에는 여덟 가지 환상이 나오는데, 한번 살펴볼까요? 제 1환상은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사람’입니다(1:8-17). 제 2환상은 ‘네 뿔과 네 대장장이’ 환상입니다(1:1-21). 제 3환상은 ‘측량줄을 잡은 사람 환상’(2:1-13)으로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제 4환상은 ‘하나님 앞에 선 대제사장 여호수아’이며(3:1-10) 제 5환상은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환상’(4:1-14), 제 6환상은 ‘날아가는 두루마리 환상’(5:1-4)입니다. 그리고 제 7환상은 ‘뒤주 속의 여인’(5:5-11)이며 마지막 제 8환상은 ‘네 대의 병거 환상’(6:1-8)입니다. 이 환상들의 핵심은 미래의 예루살렘은 번성하고 평화로워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명의 지도자(두 감람나무인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다 총독인 스룹바벨)를 세워 주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죄악 된 생활을 버리고,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환상으로 측량줄을 잡은 사람의 환상입니다. 측량줄은 수직과 수평을 잡기 위한 건축 도구입니다. 예루살렘이 측량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대한 소망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이 환상은 예루살렘 성의 완전한 회복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을 다시 택하시고, 회복시켜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찬양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슥 2:10-13)

이렇게 예루살렘을 다시 택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신약 누가복음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눅 19:28).” 예루살렘 시가지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감람원(감람산)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있는 마을로 감람산 동편에 위치)와 베다니(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위치한 마을로 감람산 기슭에 위치)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눅 19:29)”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눅 19:30-31)” 따라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눅 19:32)”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 19:33-38)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예수께서 타고 오십니다. 이것은 스가랴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물론 스가랴는 이러한 겸손한 메시아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10)

겸손한 왕, 예수께서 오셔서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 전쟁을 멈추게 할 것이며, 나아가 이웃 나라에 화평을 전할 것이라 선포합니다. 따라서 이제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공동번역에는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평화가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반드시 이 땅에도 평화가 이어집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병거와 말을 끊고 전쟁하는 활도 끊어버리는 평화의 새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오심을 반대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귀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예루살렘 입성하는 로마 군대, 영화 벤허>

제자들의 온 무리가 찬송하는 소리를 듣고,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눅 19:39)”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사람들이 모이는 명절 때마다 예루살렘에 주둔하기 위해 입성하는 로마 군대의 모습과 비교하며(영화 <벤허>의 한 장면 참조) 비꼬면서 책망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겸손한 메시아가 아니라, 병거와 말과 전쟁하는 활 곧, 힘의 논리에 의해 이 땅은 지배되는 것이니, ‘로마의 평화(Pax Romana)’나 외치라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따라서 우리는 먼저 회개의 촛불을 켜야 평화의 촛불을 맞이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시는 이 땅에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화평이 아니라 분열을 조장하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께서 오시는 것을 부정합니다.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선택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복음을 거부하고, 율법의 행위를 통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은 것일까요? 바울에 따르면 아닙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이스라엘 백성)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롬 11:28)”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롬 11:29)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이방인)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롬 11:30).”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이방인이 긍휼을 입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긍휼에만 멈추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긍휼히 여기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이스라엘 백성)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1-32)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들의 ‘불순종의 극단’에, 하나님의 ‘긍휼의 극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과 은혜를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b)” 따라서 구원자가 시온, 곧 예루살렘에 오시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물론,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본문 앞부분의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5-27)

4. 돌들이 소리치기 전에: 인피니티 스톤, 그 무한의 힘!

아기 예수께서 오십니다. 함께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무지하여, 또한 회개하지 아니하여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대신 돌들이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여 소리치며 찬양할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

돌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은 여섯 개의 돌 이야기입니다. 우주의 창조주를 상징하는 ‘데스(Death, 죽음)’,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 혹은 에너지의 분산)’, ‘인피니티(infinity, 무한성)’, ‘이터니티(Eternity, 영원성)’의 권능을 응축시켜 만든 우주적 돌인데, 각각 스페이스(공간), 마인드(정신), 리얼리티(현실화), 파워(힘), 타임(시간), 소울(영혼)의 여섯 개 돌입니다.

아무튼 영화를 보면 딜런 타노스는 이 여섯 가지 인피니티 스톤을 다 모아 무한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전체성의 힘으로 타노스는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복수자들(Avengers)인 어벤져스는 자신들의 사랑과 희생의 숭고한 죽음으로 다시 그 절반을 살렸습니다.

<영화 포스터와 인피니티 스톤 여섯 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무한성(인피니티 스톤)을 전체성에 휘둘리지 않도록 만드는 것, 무한을 저 하늘에 두고(‘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 유한의 한계를 깨닫고, 오늘 하루 사랑하며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살아가는 힘은 바로, 범죄하고 불순종했지만 그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회개의 촛불을 켜야 할 것입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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