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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섭리로 쥐덫이 마련되다

기사승인 2019.12.03  16: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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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강의』 14강 풀이

오늘의 말씀은 <다석일지> 1956년 12월 7일자에 수록된 내용이다. 유교 경전인 『中庸』 19장 마지막 부분에 대한 다석의 풀이 내지 해석이다. 상제(上帝)에게 제사하는 것의 의미를 다석 고유한 기독교적 시각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제목이 참으로 기이하다. 하늘의 섭리는 무엇이고 쥐덫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여하튼 이 제목을 갖고서 다석은 『중용』 19장 속 ‘제사’의 의미를 풀었으니 그 내용이 참으로 궁금하다. 『중용』 19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사지례(郊社之禮) 소이사(所以事) 상제야(上帝也), 종묘지례(宗廟之禮) 소이사(所以事) 호기선야(乎其先也), 명호(明乎) 교사지례(郊社之禮) 제상지의(褅嘗之義) 치국기여시저장호(治國其如示諸掌乎)”

이를 풀면 다음과 같다.

“교(郊)와 사(社)의 예법은 상제를 섬기는 것이고 종묘의 예는 그 선조를 제사하는 것이니, 교사(郊社)의 예법과 체(諦)와 상(嘗)의 의의에 밝으면 나라를 다스림은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 글귀에 대한 다석의 풀이(주석)가 되겠다.

< 1 >

제의막심어체(祭義寞深於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중에서 체(締)는 제사 중에서 가장 큰 제사를 뜻하는 바, ‘막심어체’는 이 제사(締)보다 좋은 것은 없다는 의미로 보면 무난하다. 가장 높고 깊은 제사란 다석에게 하늘에 드리는 기도를 뜻한다. 그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보았다.

조상에게 한정된 유교를 향해 ‘없음’(無)을 모르는 종교라 비판할 정도였다. 유교 역시도 본래 하늘(無)을 섬기는 종교였다고 역설했다. 『중용』에 언급된 상제가 바로 조상 너머의 하늘(無)를 적시한다. 인간으로선 알 수 없는 존재인 까닭이다.

개어보본지중(蓋於報本之中),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도 ‘근본’은 존재하며 내가 바로 근본이란 말뜻을 담았다. 한마디로 인간이란 누구든지 자신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다. 이 세상, 곧 우리들 거주공간인 집은 지나다가 잠시 들린 곳일 뿐이다. 그곳이 어딘 지를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본(本)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섭섭하게 여긴다. 보본지중이 당연한 것임에도 이를 슬퍼하는 것이 사람이다. 무주불복(無住不復)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한번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처음 난 곳으로 돌아갈 뿐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난 곳으로 되돌아가기에 슬프지 않다. 죽는 것을 외면하고 세상에 오래 머물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 이치를 모르면 종교를 알 수 없다. 나무 잎이 떨어져 뿌리를 살리고 거기서 생명을 다시 꽃피우는 것이 바로 종교 이치인 탓이다. 이를 위해 세상에 대한 번뇌를 버려야 한다.

보본추원(報本追遠), 자신의 근본을 거듭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 가는 곳을 머리까지 생각하는 것을 유교는 우추원(又追遠)이라 한다. 又報本追遠之中(우보본추원지중)이 그 뜻이다.

유성인제지(惟聖人制之) 이런 진리를 세상에서 성인이 생각했다는 뜻이다. 성인이 이를 꼭 알아차린 것이다. 그것이 예수이고, 공자일 것이다. 역성인지지(亦聖人知之), 성인이 아니면 이를 알지도, 말할 수도 없다는 의미겠다.

유능지체제(有能知禘祭), 제사의 제(祭)자는 고기 육(肉)에 손 수(手) 자를 더해 고기를 손에 받들어 무언가를 드러내는(示) 형상이다. 우리들 몸을 손수 바쳐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이라도 기다린다는 뜻을 담았다. 자신을 산 제물로 바쳐 하늘의 비밀을 알아차리는 것이 제사의 목적이다. 그래서 체제지설자(禘祭之說者), 즉 제사는 능히 알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즉이무불명성무불격(卽理無不明誠無不格), 제(祭), 제사를 옳게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밝힐 수 있는 힘을 지녔다. 밝은 것을 모두 밝힐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정성(誠)은 어떤 조건에도 합당한 틀이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조건, 자격이 있다. 그것은 체(締), 큰 제사의 뜻을 아는 일이다.

이로부터 일체를 밝힐 수 있는 힘이 비롯한다. 이 경우 체는 기도하는 것과 다름없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다. 막힘을 뚫는 것이 기도이다. 정성이 지극하고 체(締)에 밝은 자는 어려움 없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推之於天下也 無難處之事). 큰 제사(締)에 능통한 사람은 누구라도 감동시킬 수 있기에 말이다.(無難化之人乎).

기여시저장호‘(其如示諸掌乎),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만큼 쉽고도 어려운 일은 없다. 이치를 알면 쉬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어렵게 느껴진다. 하늘 제사(諦)를 아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손바닥 보듯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제사를 잃어버렸기에 국가가 난세가 된 것이다. 다석은 하늘을 망각한 송대 성리학의 한계를 이점에서 간파했다.

‘교사지예 소이사’(郊社之禮 所以事), 밖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일컬어 교(郊)라 한다. 이런 제사는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天子)만이 모실 수 있다. 천자가 백성들을 대신하여 교제(郊祭)를 드릴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제후(諸侯)의 역할을 너머서 있다. 3대 봉사하는 일반 사람과 달리 제후는 5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으나 하늘제사만큼은 그의 몫이 아닌 것이다.

하늘 다음으로 땅(社稷)에게도 제를 올려야 한다. 하늘에 예배하는 천자가 있을 때 이 땅은 백성들 모두가 배부른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직의 사(社)는 두루 ’사’라 하여 둘레둘레 모여 않은 상태를 적시한다. 여하튼 이런 제사를 통해 온 천하를 하나, 곧 하늘로 이끌고자 함이다. 이점에서 유교는 기독교처럼 하나, 곧 신(神)을 가르치는 종교라 해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다석은 하느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였다. 이름이 있거나 어느 지역에 머문다면 그것은 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절대의 ‘하나’, 그것이 바로 神일 뿐이다. 이점에서 유교 역시 기독교와 다르지 않다.

상제야종묘지예 소이사호기선야(上帝也 宗廟之禮 所以事乎其先也), 상제에게는 자기 몸을 낳아 준 부모를 모시는 종묘가 있고 백성들의 경우 사당이나 신주(神主)가 존재하는 바, 이곳에서 자신들 조상을 모시고 예배한다. 일반인의 경우 종가에서 이런 일이 행해진다. 이런 일을 통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보일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곳이 종묘이든, 사당, 신주 나아가 사찰, 교회이든지 간에 정성을 다하면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다. 신과의 교감이 생겨날 수 있는 지점인 셈이다.

‘명호 교사지예 체상지의 치국기여시저장호’(明乎 郊社之禮 禘嘗之義 治國其如示諸掌乎), 주(周)나라 이후부터 하늘제사는 잊혀 졌고 조상제사만이 지금껏 이어졌다. 하늘 제사만이 세상을 편케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음에도 말이다.

고 류승국 교수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오늘의 나는 40대만 올라가도 알 수 없는 조상 2천 만 명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존재 근원인 이런 조상 모두를 섬겨야 함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기억 가능한 조상들에게만 제사(3대 봉사)를 바쳐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상의 끝이 어딘가를 다시 물어야 옳다. 누가복음서의 예수 족보는 밑에서부터 위로 향해 있다. 예수의 최종 조상이 인간의 끝인 아담과 하와요 그리고 하느님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점에서 유교 역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인간의 끝은 하늘(하느님)이어야 옳다. 물론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신(神) 말이다. 이를 찾아가는 것이, 보본추원이다. 이를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앞서 보았듯이 다석은 체(締)를 기도라 하였다. 가까운 조상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알 수 없는 조상에게 제사하고 그 제사의 끝을 하늘이라 믿고 제사하는 행위가 바로 체(締)이자 기도인 것이다.

다석은 자신의 가온찍기(ᄀᆞᆫ)을 이런 체제(禘祭)와 동일시했다. 기도가 바로 ‘가온찍기’란 것이다. 참 하느님(하나)를 추원하는 일말이다. 최초의 하나, 알 수 없는 처음을 찾고자하는 행위가 바로 추원보본이다. 여기서 상(嘗)이란 말도 제사란 뜻이나 특별히 추수감사제가 이에 근접한다. 추수한 온갖 먹거리를 하느님에게 바치고 이후 인간이 먹는 행위를 말한다.

< 2 >

결국 본 강좌에서 다석은 제사, 곧 기도가 무엇인지를 묻고 답했다. 거듭 말하나 추원보본, 맨 처음을 찾는 일이라 한 것이다. 예수는 이런 일을 누구보다 잘 했던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할 존재인 지를 깨달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하느님에게 산 제물로 바쳤던 까닭이다. 예수가 바친 살과 피, 그것이 성찬(聖餐)인 이유는 그를 먹고 마시는 누구라도 정신적으로 먹고 배부를 수 있어서이다.

예수의 십자가, 그것이 보본추원의 길이었고 그 도상에서 예수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내었다. 예수처럼 일상에서 자신 것을 쏟아 나누는 일 그래서 모두가 배부른 길을 함께 가는 것이 보본추원의 정신이다. 오늘보다 내일, 우리 모두는 이 길로 더 쉽고 바르게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종교에 미래가 있다. 처음(하나)을 찾는 보본추원을 통해서 종교가 밝아진다는 것이 본 강좌에서 다석이 주는 교훈이다.

그런데 아직 ‘쥐덫’, 쥐 잡는 올가미란 말뜻이 설명되지 않았다. 쥐란 말이 이 글 끄트머리에 잠시 언급되어 있다. 쥐가 욕심껏 급히 먹고자 할 때 사람이 쳐둔 쥐덫이 보이질 않는 법이다. 그래서 쥐는 곧잘 덫에 걸려 죽임을 당하곤 한다. 무슨 일이든지 급히 하면 사고가 생기고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이점에서 제사, 곧 기도란 하늘이 쳐둔 쥐덫일 수 있다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다. 머리를 ‘우’(上)로 향하도록 만든 하늘의 오묘한 섭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본추원, 자신의 근본, 처음 , 절대 하나를 찾는 마음이겠다. 이것이 있기에 인간은 짐승처럼 되지 않을 수 있다.

쥐덫을 반면교사삼아 인간은 지속적으로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추원보본이 없을 시 인간 역시 쥐덫에 갇힌 쥐처럼 죽음의 길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쥐덫을 하늘의 섭리라 역설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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