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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깊고 낮은 가깝다

기사승인 2019.12.03  16: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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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어서 준비해야(사 2:1-5; 롬 13:11-14; 마 24: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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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신 후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마 24,3).

세상 종말의 징조는 무엇이며, 그 종말의 날은 언제 인가? 이 질문은 예수님의 제자들만의 관심이 아닙니다. 큰 전쟁이나 엄청난 자연재해로 인한 파멸을 경험한 사람들이 한 시대의 전환기에 늘 제기한 질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마 2436)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말할 수도, 또 결정할 수도 없다는 뜻이지요. 역사 속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사이비 종말론자들, 세상 종말의 날을 확정하고, 파국적 심판을 예언하면서 민중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면서, 사익을 챙겼던 사기꾼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혹스럽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말의 표징을 노아의 때에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지내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마 24,37-39). 자기의 일상생활에 파묻혀 세상 돌아가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휩쓸어 가기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니, 깨달음은 언제나 당한 후에야 오고, 시대의 징조를 읽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말의 때에, ‘밭에 있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둘 것이며, 맷돌을 갈고 있는 두 여자 가운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마 24,40-41). 왜, 똑같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을 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구원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심판을 받는지, 왜, 그 두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는지,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도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 있지,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 Jan Luyken, “The Rapture One in the Field” ⓒGetty Image

그러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다만 깨어 있는 것입니다(마 24,42). ‘깨어있다’는 것은 인자의 재림과 함께 시작될 세상의 종말이 어느 날에 시작될지 모르기 때문에, ‘준비하고 있어라’는 뜻이라고 예수님 자신이 부연설명하십니다(마 24,44).

김민수가 펴낸 어원사전에 의하면 ‘깨다’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잠, 꿈, 술기운이 사라져 정신이 맑아지다’, 둘째는 ‘조각내다’, 셋째는 ‘깨달음, 다시 말해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의 소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석 유영모는 ‘말씀은 빛나는 거야. 빛날려면 깨야지. 깨져야지, 죽어야지’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지금까지 깨달았다고 믿어온 것, 모든 기성의 지식을 깨고, 동시에 지금까지 믿어온 자신도 깨져야, 그리고 마침내 자기가 죽어야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깨어 있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르지만, 옛 세상이 사라지고, 새 세상이 언제 시작되는지 비록 그 때는 알 수 없지만,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주단지 모시듯 고집해온 모든 기존의 것, 모든 기성의 것, 이른바 전통을 깨야합니다. 그리고 새 것을 담기 위해 우리 자신도 깨져야 하고, 새 생명을 위해서는 옛 생명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교회는 올해 창립 74주년을 맞이했습니다. 고희(古稀)를 넘기고, 희수(喜壽), 곧 77세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희’와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단어는 ‘종심’(從心)인데,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말로 공자(孔子, BC 551 – BC 479)가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고 한데서 유래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종심’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하여도 주님의 가르침을 넘어서거나,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연륜이 쌓인 공동체가 될 나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 2 >

그렇다면 ‘종심’의 나이에 이른 우리 교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예언자 이사야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그 길을 따르라고 호소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 그 길은 뭇 백성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는’ 길입니다(이 2,4).

우리는 2차 세계대전 후, 가장 큰 규모의 형제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는 군비확장을 추구했고, 지금도 어마어마한 군비를 지출하고 있습니다(2017년 40조 3347억 원/ 2018년 43조 1581억 원/ 2019년 46조 6971억 원/ 2020년에는 50조원 넘을 듯/ 정부예산 500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하면 국방비가 정부예산의 10퍼센트를 차지함). 게다가 우리는 지금 주한미군을 위해서도 방위비분담금 다섯 배 인상을 압박당하고 있습니다(2018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은 9,602억 원이었고, 2019년은 1조 389억 원인데, 트럼프 대통령은 2020년 방위비 분담금을 5배 인상하라고 압박).

과연 미국이 우리와 함께 피 흘려 나라를 지킨 동맹인지 의심스럽지만, 그렇게 많은 방위비를 지출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 사회가 더 평화로워지는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비싸다며, 끊임없이 군비를 확장한다고 해서, 평화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년, 2020년은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70년, 4.19혁명 60년이 되는 해이자, 한국에서는 총선이, 미국에서는 대선이 있는 해입니다. 한반도 주변정세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어둡기만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누가 한반도에서 또다시 전쟁을 원하는지, 갈등과 분단 상황의 유지로 누가 이익을 보는지, 누가 평화의 길을 막는지, 우리 민족의 운명을 누가 결정하는지, 보고, 알아야 합니다. 아니, 단지 보고,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롬 13,11-12).

그렇습니다. 지금은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언제 낮이 올지 모르지만, 역사의 전환기에 우리는 깨어서 현실을 바로 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빛의 갑옷을 입은 신앙공동체가 됩시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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