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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선교교육원,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의 산실

기사승인 2019.12.02  0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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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진관 명예교수, 『서대문 민중신학교의 증언』을 출판 준비하다

서울시 서대문구에 소재한 경기대 정문을 거쳐 북아현동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걷다보면 붉은색 벽돌 건물 하나와 마주치게 된다. 아주 오래된 양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식도 아닌 무엇인가 애매하게 보이는 건물이기도 하다. 바로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총회교육원”(12대 원장 이현준 목사)이다.

구한말 선교사들의 중심지

1923년 신축된 기장 총회교육원은 당시 개화기 전통건축과 양식건축이 어우러진, 이른바 한·양 절충식 건축방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건물 외관은 지하층부, 1, 2층의 주공간부, 그리고 지붕부로 나뉘어 있다. 전체적으로 수평성이 강조되어 있지만, 뾰족하게 솟은 지붕면과 굴뚝 등 수직적인 요소와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 한국사회 민주화와 변혁의 중심지이자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의 산실이었던 기장 선교교육원 ⓒWikipedia

기장 총회교육원은 구한말 한국에 파견된 “캐나다 장로회 선교단”에서 지금의 부지를 매입해 지은 것이다. 의사이기도 했던 ‘맨스필드’(T. D. Mansfield)선교사가 신축 공사를 관리감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축 당시에는 선교사 사택과 창고 용도의 건물로 총 2개가 지어졌는데, 이후 2개의 부속건물을 더 증축해 총 4개동으로 완성되었다.

선교사들의 사택으로 쓰였던 건물은 해방 후 미군정청의 군무원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에는 임시진료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굴곡진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건물의 쓰임새가 수차례 바뀌면서, 건물 구조에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제적된 학생들과 해직 교수들의 나눔과 배움터

하지만 기장 총회교육원이 한국사에 지워질 수 없는 이름이 된 것은 해방 전까지 한국교회 선각자들의 신학운동이 펼쳐졌던 곳이었고 그 맥을 이어받아 1970~80년대에는 민중신학의 산실로 자리매김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이름은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선교교육원”(1대 원장 안병무 교수)이었다. 그리고 “총회위촉생교육과정”(이하, 위촉생과정)’은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의 출발이 되었다.

1976년 4월15일 개원한 위촉생과정은, 기장 총회가 한국신학대학을 포함, 대학에서 쫓겨난 학생들과 해직교수를 포함한 많은 교수들을 모아, 서대문에 위치한 ‘기장 선교교육원’에서, 10년간 1976년~1985년까지 운영한 ‘신학교’였다. 기장교단은 이 과정을 이수한 수료자들에게는 기장교단의 목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 주었다(준목고시 자격 부여).

1976년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가 제적된 한국신학대학 학생들과 해직된 교수들로 시작했으나, 기장 교단은 문을 개방해 대학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일반 대학의 학생들 중 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도 입학을 허락해 주었다. 입학방법은 교회의 추천을 받는 것이었다.

학생 중심의 민주적운영으로 학생선발과 교수 선정 등에 학생회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소정의 학점을 얻어야 수료(졸업)가 가능했다. 신학, 사회과학 그리고 현장활동을 교과로 진행되었다.

다시 역사를 돌아보며 새로움을 준비한다

10년간 124명의 학생이 등록했고, 50명이 수료했다. 대부분의 수료생은 목사가 되는 ‘준목시험’을 거쳐 목회자가 되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정부의 복학조치에 따라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마쳤다. 그 10년간 52명의 교수가 수업을 담당하였다.

선교교육원 위촉생과정 10년 동안의 이야기를 담아 『서대문 민중신학교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판될 예정이다. “책 제목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12월 3일 서대문 총회교육원에서 5시에 출판기념회를 열기로 했다.

책을 내기 위해 수년 간 준비하고 자료를 모았다고 한다. 위촉생과정을 책으로 내는데 앞장 선 위촉생과정 동문회 회장 권진관 교수를 만났다.

다음은 권진관 명예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선교교육원 역사편찬을 준비하고 계신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기장선교교육원 위촉생과정에서 공부했거나 졸업한 사람이 백명이 넘는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몇명인지 정확한 수자를 알지 못했다. 이제와서 살펴보니 125명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한 5년전 쯤에 그 수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 동문회를 만들었다. 교육원 위촉생 동문회인데, 연락되는대로 모여봤더니 당시 40여 명이었다. 그때 동문회를 만들고 제가 회장이 되고, 정상시 목사가 부회장, 그리고 총무에는 김명희 선생, 회계에 조인영 목사가 임명되었다. 실행위원도 구성하여 그후 지속적으로 임원회를 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대표이자 기장 선교교육원 동문 회장을 맡은 권진관 명예교수 ⓒ윤병희

그때 당시 이광일 목사가 역사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제안했다. 우리 동문들은 모두 동감했다. 언젠가는 역사편찬사업을 꼭 해야겠다... 왜냐면, 선교교육원의 경험이 약 10년 간, 즉 1976년부터 1985년 10년간 위촉생들을 배출했는데, 그 기간에 겪은 경험이 엄청난 세계사적 경험들이고 특히 교회사에 내놓을 수 있는 신학운동의 역사 속에서 기념비와 같은, 빛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이것을 분명히 제대로 자료와 기억을 수집하고 편찬해야겠다고 한 것이다.

몇년 동안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그후 많은 논의를 해 오다가, 올해 서울시의 지원으로 재정을 확보하게 되면서 편집위원회를 꾸리게 된 것이다. 편찬위원장은 이광일 목사다. 지금 거의 마무리단계다. 

▲ 선교교육원 편찬위원회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요? 

편찬위원회는 우리 동문들 중에서 저를 포함해 이광일 목사, 정상시 목사, 김명희 선생, 임승철 목사, 박몽구 목사, 김창규 목사, 한기양 목사, 염태정 편집위원장, 박철 목사가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편찬위원회 활동은 무엇인가요?

증언들을 채록하였다. 각자에게 자기 경험과 자기 소개를 물었고 지금까지 약 40여 명 위촉생들이 증언해 주었다. 집단적으로 여학생들의 모임, 그리고 교수 집담회, 민중교회 집담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나온 증언들을 채록했다. 교수 집담회는 당시 교수진 중 살아계신 분들이 모여 당시 강의와 교과에 관해서 그리고 학생들과의 경험들을 들추어냈다.

민중교회를 만든 것은 우리 졸업생들이 거의 만들었다고 해도 될 만큼 민중교회에서 교육원 비중이 크다. 민중교회 집담회는 당시 경험담을 나누었다.

▲ 개인 증언과 집단 증언을 수집하고 채록한 작업은 편찬작업을 착수한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편찬작업 이전과 착수 이후 증언을 직접 들은 후의 변화를 어떻게 보십니까? 

예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좀더 분명해지고 확인된 것은, 선교교육원은 하나의 사건이었다는 것, 세기적 사건이고 세계적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주신 커다란 은총의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 시대가 만들어 준 것이자 그 시대를 개입하신 하나님의 사건이었고 가장 최상의 지성들, 교수님들로 대표되는 지성들과 젊은 지성, 즉 감옥에서 출옥한 엘리트적이고 앞서간 젊은 지성인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또한 교단을 넘어서는 장소였다. 현직과 비현직, 해직과 현직 교수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그리고 민중과 식자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그곳의 탄생이 바로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이다. 민중신학과 민중교회로 단순화시킬 수는 없지만 말이다.

정치인으로 학자로 나간 사람도 있지만, 그곳을 통해 한국의 민중신학과 민중교회를 탄생시키지 않았나하는 점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특히 교수 집담회를 통해 커다란 자부심과 함께 많은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선교교육원은 민중신학의 요람이었고 산실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민중신학은 다른 경로를 통해 탄생했지만 말이다. 그것을 자라게 하고 성장하게 한 곳이 교육원의 위촉생과정 프로그램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 앞으로 일정은? 

책은 곧 나올 것이다. 거의 다 되었다. 북콘서트 날짜를 잡았다. 12월 3일이다. 장소는 선교교육원 그 자리이고, 동문들과 이를 소중히 여기는 분들, 그리고 교수님들을 다 모셔서 뜻깊은 출판기념회를 열기로 했다.

그것과 맞물려 12월 말쯤에 벽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벽화는 선교교육원 외벽에 교육원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림으로 장식하는 프로젝트이다. 내용과 디자인이 거의 완성 단계다. 벽화 디자인이 참 아름답다. 역사적인 인물들이 나타나고 큰 메세지를 담으려고 했다. 기대가 된다.

벽화사업이 마무리되면서 교육원이 지금 우중충한 분위기가 바뀌어 훨씬 의미있는, 밝아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세계에 알리는 메세지가 문장으로 들어간다. 앞으로 이것이 기장뿐 아니라 한국교회에 큰 명물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와 한국사상사에도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남동, 안병무의 문장은 탁월하다. 한국사상사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우리 벽화에서 나타나듯이, 벽화 맨 뒤에 문익환 목사님이 우리를 향해 손을 벌리면서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환영하는 모습이 벽화에 나타난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메세지다. 앞으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향한 우리 민중교회와 민중신학의 기여가 매우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북한의 주요사상인 주체사상의 맞수로서, 대응으로서의 우리 민중신학이 조금더 발전되어서, 좀더 정교해져야 한다. 이런 일이 우리 교육원 동문회가 앞으로 할 일이고 우리 죽재 기념사업회가 추진해야 할 일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신학적 공헌을 이제 우리가 앞으로의 큰 과제로 삼아서 추진해야 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한가지, 뒤돌아 보아 아쉬운 점은?

아쉬운 점은, 우리가 자주 모여야 하고 조금더 머리를 맞대야 한다. 모이는 동문들이 제한되어 있다. 확장해 나가야 한다. 민중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로 확장해 나가야 하는데, 아직은 우리가 거기까지 못가고 있다.

아쉬운 점은, 우리 동문들 상당한 숫자가 아직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면 좋겠다.

▲ 북콘서트 포스터

윤병희 ubiquita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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