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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서 뜻을 태우며 사는 인간

기사승인 2019.12.01  16:4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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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의 인간관 - “자리 없는 사이.” 사이를 나누는 살림지기 (2)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시대적 상황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나름대로 대응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보도록 하자. 우리는 먼저 인간에 대한 그림까지도 새롭게 그려야 한다. 즉 서구에서는 인간을 동물은 동물이되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그리고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식으로 그려내었고 그것이 변할 수 없는 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인간상이 필요하니 그것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우리는 ‘사이 존재’, ‘사이에 있음’이라는 우리말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말의 말놀이에 유의하여 인간, 시간, 공간, 천지간(天地間)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은 사이-존재 [사이에-있음]

하이데거에게서 인간은 ‘세계-안에-있음’이라 명명되는데, 이는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세계 안에 던져져 있으면서 동시에 또한 거기에서부터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존재자라는 의미이다. 하이데거의 인간 해석에서의 독특한 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이데거 이전에는 세계를 확실한 것으로 보지 않고 오로지 ‘나’만이 확실한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여, 우선 확실하게 있는 이 ‘나’가 세계를 만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식이었다.

이러한 근대적 사유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나 이외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이다. 즉 나는 확실한데 세계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 곧 나와 세계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근대의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오히려 반대로, 확실한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나’는 가장 가까운 듯하면서 실은 가장 먼 것이다. 반대로 세계는 가장 먼 듯하면서 사실은 가장 가까운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안에-있음>이라 규정하면서 인간에게 세계는 전제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인간은 자신을 세계 안에 던져져 있는 것으로 발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인간은 세계 안에 던져져 있으면서 그 세계 안에서 ‘남들’이 사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 과제는 ‘나’는 누구인지, 나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글쓴이는 인간을 한번 세계-안에-있음이라기보다는 <사이에-있음>이라고 규정해보려 한다. 이렇게 시도해보면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문제와 관련지어서도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환경이란 인간이 사는 삶의 영역이다. 이것이 나중에 자연환경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환경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미 인간중심적인 것이다.

서구의 인간중심적 사고가 환경이라는 개념으로 나오게 된 것이며, 더 나아가 환경학 혹은 환경철학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 것인데, 이것은 다분히 인간이 중심이 되어 인간이 잘살아보기 위해 땅을 포함한 모든 인간 삶의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생태학(Ökologie[외콜로기], Ecology)과 경제학(Ökonomie[외코노미], Economy)은 같은 어원을 갖는다. 즉 오이코스(οικος)라는 그리스어로부터 나온 것이다. 거기에는 ‘집, 주거, 거주’라는 뜻이 있는데, Ökonomie는 ‘집안 살림살이’를, Ökologie는 ‘지구 살림살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Ökologie와 Ökonomie가 나누어져 있지 않고 <살림살이>라는 말로 합쳐져 있다. 즉 살림을 생활화하는 살이라는 우리말 <살림살이>는 살림을 두 번이나 강조하는 말이다. 이렇게 <살림살이의 철학>은 인간중심적 사고를 대체할 수 있는 방향을 지시할 수 있다. 환경학이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적 사고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관장하는 관점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살림살이의 철학이다.

인간은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어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가?  

빔-사이에-있음

우선 <빔-사이>에 존재한다. 애초부터 인간의 빔-사이는 삶의 공간으로서, 인간이 비워[베어]내가며 닦아 가는 삶의 텃밭이다. 빔-사이에 있는 인간이 빔-사이에서 빔-사이를 이으며 관계맺고 있는 가장 전형적인 행위는 <노동>이다. 이 노동활동은 도구, 기술, 예술, 제작, 생산, 거주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빔-사이를 존재하는 인간의 중심축은 <몸나>라고 할 수 있다.

▲ 사람은 사이 존재로 하늘의 뜻을 태우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Getty Image

몸으로서의 내가 모든 것을 활용해서 땅이라는 공간을 일구어 나간다. 이 몸나가 경험해 나가는 차원은 감각적, 미학적 차원이며 그 주된 방식은 제작이라는 형태를 띤다. 몸나가 살기 위해 쉬는 숨을 <목숨>이라 이름한다. 현대에 와서는 이 빔-사이의 간격을 없애려고 하지만 이 사이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성의 시대, 차이의 시대에서 인간은 서로 가까워지기는 하여도 차이를 차이로서 인정하여 받아들이고 그런 태도 속에서 차이를 차이로서 뛰어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이 네 가지 차원에서의 사이에-있음을 유지하고 견지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인간다움을 잃어버릴 것이다.

공간이라는 빔-사이를 우리는 다양한 기술로써 없애면서 온갖 형태의 거리를 좁혀나간 결과 이제는 비행기, 인터넷, 위성통신 등과 같은 첨단기술을 이용해서 전지구가 하루생활권에 들어온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식으로 공간적인 간격을 없앰으로써 인간이 의도한 가까움을 얻었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다. 빔-사이를 존재해 나가기 위한 필요한 덕목은 <나눔>이다.

사람-사이에-있음

인간은 <사람-사이>에 존재한다. 사람-사이를 잇는 가장 전형적인 행위는 <말>이며, 사람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맺음의 방식은 <실천>이다. 말함과 실천에서 관습, 윤리, 도덕, 사회, 국가 등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사이를 존재함인 실천 행위는 윤리적인 행위, 만남, 인격적인 체험 같은 것인데, 그것을 통해 사람-사이의 이음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인간의 사람-사이에 있음이 사이를 두면서 사이를 나누며, 사이를 이으면서 사이를 존재하는 관계맺음의 방식이다. 사람-사이에 있음을 이어나가는 중심축을 우리는 <맘나>라고 이름할 수 있다. 맘나는 마음씀이다.

사람-사이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어주는 숨은 말의 숨으로서 <말숨>이다. 사람-사이의 간격을 없애려는 것이 평등이며, 여기에서는 각자가 자신으로 서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섬김>이 중요한 덕목으로 부각된다. 사람-사이에 있음이 무너지게 되면 도덕과 윤리가 설 땅을 잃게 된다.

때-사이에-있음

사람은 <때-사이>를 존재한다. 기억이 과거의 것에 주로 머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때-사이의 가장 전형적인 행위를 <생각>이라고 이름하며 거기에서 반성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때-사이는 역사, 학문, 지평, 엄격한 의미의 역사의식이 생겨나는 곳이다. 인간은 삶의 순간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나가는 순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전체를 내다 볼 수 있다.

하루살이에게 내일이란 없다. 동물은 생존적인 시간만을 몸으로 살다가 죽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앞을 내다보고 뒤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역사의 발견은 바로 때-사이의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근원과 유래를 돌아봄으로써 과거의 전통을 세우고 현재가 과거에 의해 새롭게 의미부여 받도록 한다.

더 나아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까지 눈을 돌려 때-사이로서의 존재가능성을 확대시켜 그 가능성에 비추어 현재를 변화시켜 새롭게 발전시켜 나간다. 이렇듯 자신의 존재를 유래와 미래로 뻗치며 때-사이를 잇고 있는 인간은 그 뻗쳐있음으로 인해 환한 밝음의 장소 안으로 들어서 있게 된다. 땅의 공간뿐 아니라 [역사적] 시간의 공간이 얼마나 넓으며 밝은가에 따라서 인류의 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인간은 때-사이를 잇기 위해 글을 발견한다. 인간은 글을 통해 자신의 뜻이 후대에까지 전달되도록 노력한다. 그래서 때-사이를 잇는 사람의 중심축은 <뜻나>이다.

여기 ‘뜻나’에서는 <주체>의 의미가 부각된다. 주체로서의 나는 몸나와 맘나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빔-사이와 때-사이를 이을 나를 걱정해야 한다. 공자의 뜻나는 『논어』에 그의 뜻이 담겨 있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져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때-사이를 이어주는 생명의 숨은 <글숨>이다. 때-사이를 존재해야 하는 모든 존재자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원칙이자 덕목은 <비움>이다.

하늘-땅-사이에-있음

사람은 천지간(天地間), <하늘-땅-사이>를 존재한다. 여기에서 하늘은 천체적·우주적 하늘이기보다는 신적인 하늘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우주적인 하늘-땅-사이에 있음을 책임져야 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도 책임을 져야 한다.

서양에서도 처음에는 인간의 이러한 신적인 차원이 고려되었는데, 역사의 전개와 더불어 서양인들의 생각이 근대화·세속화 되어오면서 이 차원이 배제되었다. 즉 차츰차츰 인간에게서 기도, 감사, 초월, 성스러움, 신, 종교 등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차원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뒤켠으로 쫓겨났다.

어쨌건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영성의 차원이다. 얼로서의 나인 <얼나>가 나의 참 모습이고 이 얼나가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우주(하늘)와 하나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아우름은, 하느님과 하느님이 만들어놓은 이 우주가 하나가 될 때 이루어진다.

바로 이 하나로 아우러진 일치된 우주생명의 숨을 쉬는 것이 <얼숨>이다. 또는 우주의 숨이라 해서 <우숨>이라고도 한다. 우숨이 우주와 조화가 되어, 우주와 하나가 되어 쉬는 숨이기에 그 우숨을 또한 참된 숨이라는 의미로 <참숨>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하늘과 땅-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주생명에 동참하고 있기에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과 덕목은 서로 함께 더불어 살아나가는 삶으로서의 <살림>이다.

인간은 이렇듯 사이에 있는 ‘사이존재’다. 공간존재, 시간존재, 인간존재, 천지간존재다. 인간은 바로 사이를 살고, 사이를 나누고, 사이를 살리고, 사이를 이어야 하는 사이존재다. 바로 이러한 사이로서 사이역할을 하면서 사는 사이존재인 것이다.

여기에 서양사람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면, 새로운 차원이 있다. 서양에서도 요즘 존재를 보는 눈, 자연을 보는 눈을 그전과 같은 원자적 시각에서 관계적 시각으로 바꾸고 있다. 서양적인 사고방식은 나눌래야 나눌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찾아나가는 환원적인 방법에 익숙해 있다. 그러한 방법으로 그들이 찾아낸 것은 원자고 개체고 개인이다. 이렇게 각기 떨어진 낱낱의 원자 또는 개체에서부터 전체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 서양의 사유방식이고 이것을 실체론적 사고방식이라 한다.

이와는 다르게 동아시아는 예전부터 관계론적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애초부터 따로 떨어진 개체를 보지 않고 그것이 어떤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려고 노력했다. 개인으로서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관계 속에서 내가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남편이고 교원으로서 있는 것이다.

서양사람들도 최근에 와서는 실체론적 사고방식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관계론적 사고방식으로 바꾸려 하고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물망적 사고방식이라고 하는 관계론적 사고방식이 그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한 가족이 혈연으로 이어지듯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지구의 딸과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닥친다. 인간들이 생명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단지 그 그물 속의 한 올일 뿐. 그 그물에 가하는 모든 일은 스스로에게 향한 것이다.”(인디안 추장 테드 페리의 말.)

몸성히, 맘놓이, 뜻[바탈]태우, 얼돌이[얼들이]

하늘을 모으고 땅을 모은 것이 ‘ㅁ·ㅁ’인데 이 모인 상태가 밖으로 나타나는 데에 따라 그것은 ‘맘’이 되고 ‘몸’이 되고 ‘믐’이 된다. 태극점이 밖으로 나간 상태를 표현한 것이 ‘맘’이다. 우리가 마음을 주고받는 것은 내가 모은 하늘과 땅을 상대방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고 하는 것은 각자가 모은 하늘과 땅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말한다.(1) 그러다가 자기가 모은 몸(힘)과 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한다. 현대에 들어서서는 몸으로 상대를 지배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즉 뜻, 의욕, 욕구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하는 것이 더 무서운 폭력으로 대두되고 있다.

다석은 그러기에 마음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놓아 보내라고 말한다. 빔 사이에 몸을 건강하게 보존하라고 ‘몸성히’라고 말하며, 사람 사이에서 마음에 집착하여 욕망과 욕구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놓아 보내라고 ‘맘놓이’를 권한다. 맘놓이는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다.

뜻나에서는 ‘뜻태우’, 즉 뜻을 태우라고 말한다. 뜻을 바탈이라고도 해서 ‘바탈태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내 안에 주어져 있는 뜻(바탈), 속알을 태우라는 것이다. 나 혼자 잘 살자고 할 것이 아니라 가족, 사회,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문화와 세계평화, 지구와 우주를 위해서 내가 받은 바탈과 속알, 내 안에 새겨져 있는 깔, 꼴, 결을 찾아 태워서 그 모든 공동체가 한얼을 품을 수 있도록 살라는 것이다.(2)

다석은 바탈태우를 얼 차원에서 얘기하고 있다. 글쓴이는 다석을 공부하면서 뜻과 얼이 때때로 뒤섞여 쓰이곤 하지만 많은 경우 둘을 나눌 때 더욱 풍부한 내용을 품게 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석 자신은 말하지 않는 얼나와 관련지어 많은 고민을 하였다.

몸성히, 맘놓이, 뜻태우. 그 다음 얼나의 차원에서 이루어야 할 일을 무어라 이름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그래서 만든 개념이 ‘얼돌이’이다. 얼을 돌려 한얼의 정신을 우주 곳곳에 펴자는 뜻이다. 한얼을 내가 받아 돌려 한얼과 내가 일치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주의 얼인 한얼과 하나가 된다는 점이다. 얼을 돌린다는 ‘얼돌이’나 얼 속에 들어간다는 뜻의 ‘얼들이’ 가운데 하나를 생각하고 있다.(3)

다석이 얘기하는 얼은 ‘한얼’이다. 한얼과 얼나의 일치가 다석이 생각하는 영성적인 차원이다. 우리말의 ‘한’은 ‘온통, 크다, 전체, 온전함’을 나타낼 때 쓰인다. 다석은 아래아(․, 태극점) 앞에 ‘한’ 자를 더해 모든 시작의 시작, 가장 큰 태초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한․’[한아]를 말한다. 여기서 숫자의 시작인 ‘하나’가 나온다. ‘하늘’은 ‘한’과 ‘늘’이 합해져 나왔다.

여기서 ‘한’은 무한한 절대 공간을 말하며 ‘늘’은 늘, 항상, 언제나 그런 것이다. 즉 무한시간, 절대시간을 말한다.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이 만난 곳이 ‘한늘’이고 그것이 ‘하늘’로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하늘님, 하느님이 나왔다. 우리가 이름한 하느님 이름 안에도 우리의 생활방식, 삶의 문법이 배어 있다.

얼은 보이는, 보이지 않는 모든 변화를 주재하는 힘이기에 모든 존재하는 것 속에서는 우주의 얼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도 우주의 얼이 들어 있다. 우주의 얼을 그 전체에서 통째로 보면 그것은 곧 생명력 그 자체로서 우주생명이며 한얼이다.

다석은 이 많은 표현들은 인간이 우주 속에서 우주생명인 한얼과 교통하는 가운데 이름붙인 것들이라고 하였다. 그것들은 다 어떤 형태로든 한얼의 말건네옴에 대한 인간 쪽에서의 대답이다. 그런 한에서 그 이름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신을, 성스러움을 이름 속에 잡아넣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가이 있는 인간으로서 세계를 만들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가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 ‘가’가 있는 이름을 붙여주어야지만 그 신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을 부르는 다양한 이름들 속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인간 쪽의 노력을 읽을 수 있다. 그 이름들은 자신들이 어떤 부름에 대한 대답임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것은 우주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신의 이러저러한 면모 가운데 하나를 찍어서 이름 속에 담고 있다.

그 이름이 가리키고 있는 그 존재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른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다양한 이름들 속에서 하느님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름 그 자체는 중요치 않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많은 이름으로 지칭되는 절대자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 한얼에 들어서 그 얼을 돌려 우선 내가 그 한얼과 하나되고 그 다음 우주의 모든 것들이 한얼과 하나되는 큰 해탈을 도와야 한다. 그 일을 함이 ‘얼들이’고 ‘얼돌이’이다. 얼나로서 한얼과 하나되어서 한얼 속에 들어 그 한얼을 돌려 우주를 살리는 우주의 생명력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미주

(미주 1) 김흥호 선생은 이렇게 풀이한다. “인간은 우주의 비밀을 열어보고 있다. 열면 봄이 되고 닫으면 몸이 된다. 열면 마음이 되고 닫으면 몸이 된다. 인생은 풀어 열기도 하고 닫아 매기도 한다. 이것을 열매라고 한다.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도 싹의 몸과 꽃의 봄과 열매의 가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열매는 과일이 열리고 맺히는 뜻도 있고 우주가 열리고 닫히는 뜻도 있다. 몸은 봄을 거쳐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도요, 우주의 섭리요, 인생의 길이다.”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김흥호 편, 솔, 2001, 62.
(미주 2) “나는 이어 이어 예 한 점이 내가 아닐까. 이 한 점에 힘이 붙고 능력이 붙고 수가 생겨 몸성히 마음놓이 이것이 내가 아닐까. 마음이 놓일 때 마음은 비어 진리를 담을 그릇이 준비되고 몸성히 불이 될 때 몸은 살아 임을 그리워하게 된다. 목숨 쉼은 불사름이요, 말씀 쉬면 물 씻음이니 깨끗하게 비고 아름답게 태워서 새로운 바탈을 내놓음이 숨쉬는 한 목숨이요, 영원히 이어나갈 이 목숨이기에 맘 비고 몸성히 숨쉬는 한 목숨이다. 나의 바탈을 비고 비어 참을 그리는 것인데 몬으로 지어 먼지가 되면 흙덩이처럼 가득 차 새로운 바탈을 내지 못하고 힘도 없고 수도 없어 숨도 못 쉬는 흙덩이가 되고 만다.”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57.
(미주 3) “먹는 것은 배로 먹고 자는 것은 가슴으로 자고 집 짓는 것은 머리로 짓고 나르는 것은 손발로 날라 몸으로 먹고 마음으로 자고 정신으로 세우고 영혼으로 날아간다. 몸의 통일과 마음의 평등과 정신의 독립과 영혼의 자유는 막을 도리가 없다. 개인으로 먹고 집으로 자라고 국가로 세우고 세계로 날아가도 좋다.” 『제소리. 다석 류영모 강의록』, 59.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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