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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비웃는 자들은 누구인가

기사승인 2019.11.10  15:5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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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법(겔 18:25-27)

25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26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27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오늘은 법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에스겔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요즘에 아람어를 공부하면서 든 생각이 이 문자는 대중에게 널리 퍼뜨릴 생각으로 만든 문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히브리어도 마찬가지이지만, 불규칙한 변화가 너무 많이 일어나고 법칙에서 예외적인 점들이 너무 많습니다. 불규칙성, 예외성이 많다는 것은 이 문자를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만 알 수 있도록 만들어져있음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 과거 문자는 권력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권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잘 보여줬던 영화가 하정우와 강동원이 나왔던 ‘군도’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양반인 강동원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속여 계약서에 날인하게 하고 그들의 땅을 모두 착취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또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기 계약서라는 방식에 이용된 ‘법’입니다. 나쁜 양반은 분명 법적으로 합당한 행동을 취했습니다. 이때의 법은 사기당한 백성들의 편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양반들은 법을 지키면서도 당당하게 착취할 수 있었습니다. 법이 권력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법은 권력자들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수단이었고, 그들의 권력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을 위대한 왕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아이들 위인전기에 보면 세종대왕이 왜 한글을 창제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화가 나옵니다. 이 일화가 실제 사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종이 가마를 타고 가고 있는데 백성 중 한 사람이 길을 비켜서서 엎드려 있기는커녕 그 가마 앞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군졸들이 그를 붙잡아 관아로 보내려 하는데, 그 사람이 ‘그런 법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라며 억울해 했다고 합니다. 이를 본 세종은 백성들이 글을 모르고, 글을 모르기에 법을 알 수도 없다며 한글 창제를 결심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최근에는 이런 이야기가 너무 왕조 중심의 애민사상을 강조한 이야기라고 말하며 한글 창제는 왕권 강화의 한 측면이었다고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행위는 왕과 양반들에게만 주어져 있던 문자와 법이라는 권력을 내려놓는 엄청난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왕권 강화의 이유이건 당시 양반 세력과의 갈등 상황 때문이건 왕이 자신의 큰 권력을 내려놓았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한글 창제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야기가 약간 딴 길로 흐른 듯 합니다만, 중요한 점은 문자와 법이 권력자들에게는 착취를 정당화해주는 강력한 수단이었고, 이를 모르는 백성들은 끊임없이 빼앗길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법의 적용 대상

오늘 본문 말씀의 상황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일전에도 설교를 드린 적이 있지만, 오늘 본문은 죄가 자손에게도 전가되는가의 문제로 시작됩니다. 이런 문제는 바벨론 유배 초기에는 당연히 논쟁이 되었을 주제입니다.

▲ 이스라엘 법전의 중심에는 야훼 하나님과 사회적 약자들이 있다. ⓒGetty Image

그러면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법을 이야기합니다. 5절에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면 살리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미쉬파트(מִשְׁפָּט)’와 ‘쩨다카(צְדָקָה)’입니다. 단순한 정의로움, 공의로움이 아니라 법과 연결된 단어입니다. 그렇기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법’을 선포했다고 표현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점은 이 선포의 대상이 누구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에스겔은 누구에게 이 법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법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누구를 향한 선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법은 6-9절에 나와 있고, 11-13절, 15-17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6절 전반부는 우상숭배 금지를 이야기합니다. 6절 하반부는 잠시 후에 말씀드리도록 하고 먼저 7절로 넘어가면,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라는 법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의 법을 보면서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선포된 법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시대의 눈으로 보면, 모두 이런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아닙니다. 누군가를 학대하는 일, 누군가를 빚지게 만들 수 있는 일, 누군가를 강탈하는 일은 권력자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7절 하반절의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고,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힌다’는 법은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기초적인 자선 행위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를 읽어서 알고 있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계층들 속에서, 모두 다 주리고 헐벗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먹을 것과 남는 옷으로 남을 도와야 한다는 법은 말도 안됩니다.

혹시 어떤 분들은 남유다 왕국이 강국을 이루어서 모든 백성이 잘 먹고 잘 사는 사회 아니였겠냐? 누구나 다 이런 자선을 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 이런 질문을 하실 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히스기야 이후로 앗시리아에 의해 침략당하고, 이집트에 의해 침략당하고,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남유다 왕국이 ‘모든 백성이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였다고 본다는 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아주 간단해 보이는 선행에 관한 법 역시도 모든 사람을 향한 법이 아니라 부유함을 가진 자들, 권력자들을 향한 법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8절에 나타난 법, ‘돈놀이 금지법’이나 ‘올바른 재판에 관한 법’은 당연히 돈 있는 사람에 대한 법이고 재판을 행하는 장로나 재판관을 향한 법입니다.

누가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가?

우리는 이 법들 중에서 6절 하반절에 나타난 법, ‘이웃의 아내에 대한 법’과 ‘월경 중인 여인과 동침하지 말라는 법’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이 아니겠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월경 중인 여인과 동침 금지법’은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들지 말라는 법이고 레위기와 같은 생각을 전하는 법인데, 이어지는 11절과 15절에서 이 법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법은 후대에 첨가되지 않았나 생각도 듭니다. 이 법은 부정함과 연결되어 있고, 레위기에 따르면 부정함은 일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부정함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들려고 한다면 그것이 죄가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6절에 나타난 이 법은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들지 말라는 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웃의 아내에 대한 법’은 신명기 5장에 나타난 십계명 중 열 번째 계명에도 나타나는 법입니다. 최근에 한 일본 종교학자가 쓴 책에서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사건(창세기 12장)에 대해 쓴 글을 읽었습니다. 이 사람은 당시 이집트 사회가 성적으로 문란했기 때문에 남의 아내를 탐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아브라함 이야기가 고대 이집트의 성문화에 대한 설명일까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는 거의 똑같은 형태로 또 나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브라함의 누이인줄 알고 데려갔다는 이야기입니다(창세기 20장). 아브라함의 행동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무슨 잘못이 있는지, 이삭의 아내 리브가 역시도 누이인줄 알고 데려가려 했지만 이삭과 리브가가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삭이 거짓말을 했음을 깨닫습니다(창세기 26장). 그런데 이때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이유는 ‘그곳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고대 사회는 어떤 세상이길래 남편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가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타날까요? 고대 사회는 이처럼 극악무도한 사회였을까요? 사실 창세기에서 아내 때문에 죽임당한 남편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구약성경에서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을 죽인 사람의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다시피 사무엘하 11장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였고, 그녀의 임신 사실을 감추기 위해 남편 우리야를 죽였으며,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취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물론 갑자기 나타난 예언자 나단에 의해 질책을 받고 회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다윗은 초범이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리는 부분이고 합니다만,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의 다윗 이야기가 사무엘상에 나타납니다. 그 내용 중 하나인, 사무엘상 25장에는 현명한 여인 아비가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아비가일에 대해서는 몇 번 들어보신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길어지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모독한 나발을 죽이려고 했고 나발의 현명한 아내인 아비가일 덕분에 그는 깨닫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열흘 쯤 뒤에 뜬금없이 나발은 죽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치셨다고 전하는데, 하나님께서 치셨는지, 다윗의 신복들이 쳤는지는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가 판단할 몫입니다. 아무튼 나발의 죽음을 전해들은 다윗은 기뻐하며 그의 아내 아비가일을 자신의 아내로 취합니다.

제가 밧세바와 아비가일을 ‘취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성차별적인 표현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게 아니라, 다윗이 그런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분명히 하려는 목적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이 여성들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다윗 이야기에서 똑같이 나타나는 점은 아내를 빼앗고 남편을 죽이는 사람은 일반 백성이 아니라 왕 또는 권력자라는 점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전후로 문서로 정착한 성경이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점은 당시 사회에서도 이런 문제, 범죄가 자행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왕이나 권력자들에 의해서 아내를 빼앗는 일이 자행되었고,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을 죽이는 일도 벌어지는 사회였음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본문의 법은 권력자와 가진 자들을 향해 선포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법의 적용 대상이 그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셨던 것처럼, 착취당하고 죽임당하던 이들에게 본래 법은 그런게 아니라고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자가 맞다고 봅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때문입니다.

오히려 억울해하는 이들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포로로 끌려온 자신들의 상황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들은 법을 잘 지키며 살아왔는데 억울하다는 외침입니다. 이런 억울함을 표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착취당하고 죽임당한 이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착취하고 수탈하며 죽이던 이들이 표출할 수 있는 외침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자신들은 법 잘 지켜왔다고, 자신들이 잘못한 게 뭐가 있냐고 말합니다. 그들을 향해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29절에서 똑같이 반복됩니다. 법이라는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이 공평하지 않은 법을 만들어놓고, 법을 공평하게 행하지 않아놓고 자신들은 법대로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선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향해 에스겔은 말합니다.

“그는 그의 죄악으로 죽으리라”

왜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을 이야기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에 법이 없어서 하나님의 법을 말했을까요? 당시 그들이 가졌던 법은 권력자들을 위한 법이었고, 권력자들이 빼앗고 죽이는데 사용한 법이었기 때문에 예언자들은 올바른 법, 공평한 법, 정의와 공의가 살아있는 법을 선포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건 약한 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법은 올바른 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력자들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법에 불과합니다. 법이 바르게 만들어져있다 할지라도 그 법이 약한 자를 억압하는데 사용된다면, 그 시대의 권력자들이 법을 왜곡시키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본문과 같이 이들은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법이 적용된다면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공평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평이란 자신만의 배를 채우고, 자신만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공평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이 자신들과 똑같이 법적으로 대우받는 사회는 공평한 사회가 아닙니다.

이 시대의 법과 권력

지금 시대에 법을 판단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법이 꼭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며, 약한 자라고 해서 꼭 선하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건 사고에 가해자로 나타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약자들입니다만, 그들은 분명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때로 이들도 심신미약이라는 법을 이용해 자신의 처벌을 경감시키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판단은 강자냐 약자냐의 구분보다는 누가 무엇을 위해 법을 이용하고 있는가를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법은 자신의 욕망, 욕심, 권력, 재력을 위해 법을 악용하지 말라는 사회 고발로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강자이고 약자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에, 누구나 어떤 순간에는 강자가 될 수 있는 시대에,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가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만, 누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법을 이용하고 있는가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자신의 권력 유지를 목적으로 자신을 비판한 상대를 향해 법을 내민다면, 그 사람은 분명 옳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는 점은 이 사람은 이미 권력자임을 뜻합니다.

심지어 그 대상이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법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약자에 대한 압제와 강탈을 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사람은 에스겔 시대에 권력을 쥐고 백성들을 착취해왔으면서도 포로로 끌려간 상황 속에서 난 억울하다고 외쳤던 남유다 권력층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입니다. 에스겔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스스로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이런 일이 소위 진보적인 교단이라 불리는, ‘예언자적 사명’을 가장 우선순위로 둔다는 저희 교단에서마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참으로 안타깝게 만듭니다. 저희 교단마저도 참 예언자인 예레미야의 길이 아니라 당시 권력자들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저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지금은 교회가 회개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했던 목회자들이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또 그 욕망이 반영된 자본주의적이고 현실 욕망만을 추구하도록 만들어 왔던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으로 화답했던 성도님들도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저 역시도 여기에서 자유롭진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제대로 된 말씀을 읽어나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에스겔이 선포한 하나님의 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욕망, 권력욕, 재물욕에 빠져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강탈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그 법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길이 아니며 공평의 길도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며 이런 길을 걷지 않을 때, 하나님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듣게 되는 한국 교회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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