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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영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

기사승인 2019.11.09  17:5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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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과 성령 (1)

칼빈은 3장에서 하나님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분명한 지식의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의식에 당신에 대한 지식을 심어놓으시고 그것을 끊임없이 유지하신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장은 전면적으로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말과 함께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주셨다는 사실은 경험 이 말해준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이 씨앗을 마음에 소중히 키우고 있는 사람은 백 사람 가운데 겨우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더욱이 그것을 무르익게 해서 때가 되어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시1:3참조).”

이 표현은 칼빈이 즐겨 쓰는 수사법이고, 1권 여러 곳에서 이런 표현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날지라도, 이를 참으로 보는 사람은 백 사람 가운데 겨우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하다”(I.v.8). 그 결과, 칼빈에 의하면, 더러는 미신에 빠지고, 더러는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반함으로써 이 세상에 진정한 경건이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는 용서받을 수 있나

자, 그렇다면 미신이나 우상숭배는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서 잘못한 것이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는 죄라는 것입니까? 칼빈은 ‘아니다’라고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미신이나 우상숭배는 맹목적인 것이며, 거의 언제나 허영과 교만과 완고함과 결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신 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억측에 따라 하나님을 상상할 뿐입니다(I.iv.1).

또 다른 한편에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칼빈은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 들을 ‘신-에피큐로스주의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 역시도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식 속에 심어주신 ‘자각의 씨앗’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 보려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 “자연의 빛”을 가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신은 심판자로서의 권세와 섭리를 박탈당하게 되고, 하늘에 갇혀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죽은 우상에 불과할 뿐”이며, 결국 하나님에 대한 맹목적인 망각이라는 것입니다(Iiv.2).

지난 글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의 두 가지 예, 즉 종교의 보편성과 양심의 불안을 확인했습니다. 칼빈은 4절에서 하나를 더 추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노예적인 두려움”입니다. 칼빈은 이 노예적인 두려움을 ‘위선’이라고 비난합니다. 왜냐하면 이 노예적인 두려움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그를 주로서 경외하는데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에서 생기는, 강요당하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I.iv.4).

▲ 사람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연계시 논쟁은 신학사에 오래된 과제이다. ⓒGetty Image

우리는 칼빈이 왜 4장의 제목을 (하나님에 관한) “이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 혹은 부패되었다”고 붙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결코 지워질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새겨주셨습니다. 하지만 죄된 인간은 고작 스스로 만들어낸 신들을 두려워하여 미신적으로 숭배하고 굴종함으로써, 마음에 뿌려진 “종교의 씨앗”이 참된 경건의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두 번째 가능성 그러나

5장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두 번째 가능성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주 창조와 그 계속적인 통치에서 빛을 발한다.” 칼빈은 5장 1절에서 10절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창조사역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는지를 말합니다.

바로 앞에서 칼빈은 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이 이 복된 생활에 이를 수 있도록, 앞에서 말했던 대로,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매일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I.v.1). 칼빈에 의하면 이렇게 만물에 새겨진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들은 아무리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고 뚜렷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창조에 새겨져 있고, 우주의 체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유지된다는 이 사실을 칼빈은 다만 성경을 통해서 말할 뿐입니다(시104:2-4). 그는 하늘을 하나님의 궁전이라고 부르는 시편 11편 4절을 인용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칼빈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표현했던 이유는, 이와 같이 이 세계가 거울처럼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I.v.1).

칼빈은 2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들을 천문학이나 자연과학, 의학 등을 통해 간략하게 􏰁해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옛 사람들이 인간을 가리켜서 “소우주”라고 불렀던 것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라고 내세웁니다(I.v.3).

그러나 칼빈은 여기서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고 말하는 바울의 아덴 설교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 를 생각하시며”(시8:4)라고 노래한 다윗의 찬양을 상기시켜줍니다. 칼빈은 이와 같이 성경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지혜를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4절은 인간의 배은망덕을 말하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더러운 배은망덕이 드러난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무수한 사역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공장과, 동시에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이 넘쳐흐르는 창고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교만에 부풀어 스스로 잘난 체한다. … 인간이 자신의 영육에서 일백 번이라도 하나님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성 자체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광란이야 말로 얼마나 가능한 것인가? 그들은 인간이 우연히 동물과 구별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분을 ‘자연’으로 대치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해버린다. 그들은 극히 절묘한 하나님의 솜씨를 입과 눈에서부터 심지어는 발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각 지체에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기서도 하나님을 자연으로 대치시 킨다(I.v.4).

칼빈은 여기서 “영혼의 기능들을 육체에 결합시킴으로써 영혼이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하는”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학설을 비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신을 그 위에 세우는 자들을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영혼의 기능들을 육체에 결합시킴으로써 영혼이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하는 이러한 견해가 인간을 순전히 자연적인 실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연’으로 논하는 길을 열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칼빈이 5절 첫 부분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독특성

이런 견해에 반대하여, 칼빈은 영혼은 나름대로 독특한 존재를 지닌다고 주장했습니다. 영혼은 형이상학을 추구하고, 물리학, 천문학, 기술, 예술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의 것들을 생각하고, 상상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도 하고, 잠자면서까지 미래를 예견할 수도 있습니다 (I.v.5) 이렇게 칼빈은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무시한 영혼의 탁월성을 환기시켜줍니다.

요컨대, 칼빈은 독자들에게 자연을 무시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보고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여기서 욥기와 이사야서를 추천합니다(I.v.6). 그리고 7절에서 칼빈은 자연을 지으신 창조주는 자신의 권능을 자연 속에서 나타내기도 하시지만 자연의 일상적 과정 밖에 서도 나타내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섭리를 말하는 것으로, 칼빈은 제1권 16장-18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섭리로써 인류와 사회를 다스리시며, 경건한 자들에게는 관대하심을 베풀고, 악하고 범죄한 자들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하십니다(I.v.7).

그리고 8절에서 칼빈은 시편 107편을 인용하여, 사랑으로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를 설명합니다. 7가지 사례가 제시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마침내는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시107:4-7), 궁핍하고 주린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9), 사로잡힌 자들을 침침한 토굴과 쇠사슬에서 놓아주시며 (10-16), 파선당한 자들을 항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며(23-30), 병으로 거의 죽게 된 자들을 고쳐주시며(17-20), 뜨거운 열기와 한발로 땅을 태 우기도 하시며, 은밀한 자비의 단비로 그 땅을 비옥하게도 하신다(33-38). 하나님은 가장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혹은 높은 자들을 그 위엄 있는 위 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신다(39-41).

칼빈은 이 시편 107편의 말씀은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고, 특별히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에 의한 것임을 증언해 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경건한 사람들은 기쁨의 근거를 얻게 되고,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과 버림 받은 사람들은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시107:42). 여기서 칼빈이 자주 쓰는 표현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 잘못에 빠져서 그와 같은 눈부신 극장 안에 있으면서도 눈먼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 하나님의 영광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날지라도, 이를 참으로 보는 사람은 백 사람 가운데 겨우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한다”(I.v.8).

이렇게 칼빈은 자연계시의 한계를 명백히 진술하고 나서, 이제 하나님에 관한 “공허한 사색”이 아니라 “건전하고 결실을 맺는 지식”을 말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2장 2절에서 확인했듯이,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계신 분이 아니라(Quid sit Deus),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Qualis sit Deus).

하나님은 주의깊게 탐색해야 할 분이기보다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 며 친밀히 하시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I.v.9).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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