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2: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왕상 8:12-30; 고전 3:10-17; 마 12:1-8)

기사승인 2019.11.08  17:37:49

공유
default_news_ad1

- 창조절 열한째 주일(11월10일)

1. 뒤통수의 심리학

세상 모든 직업이 사라져도 꿋꿋하게 건재할 마지막 직업이 있습니다. 바로 ‘사기꾼’입니다. 이 직업은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으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고 왜 사람들은 계속 사기꾼들에게 속는 것일까요? 『뒤통수의 심리학: 속이는 자와 속지 않으려는 자의 심리 게임』 (프런티어, 2018)에서 사회 심리학자인 마리아 코니코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기꾼은 노골적인 도둑질이나 강도짓, 폭력, 협박 같은 수단을 절대 쓰지 않는다. 사기에는 그보다 부드러운 대인 기술이 이용된다. 즉 사기꾼이 활용하는 것은 신뢰와 공감, 설득의 힘이다. 진정한 사기꾼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파멸에 이르는 공범자가 되게 만든다. 또 사기꾼이 뭔가를 훔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내준다. 사기꾼은 우리를 협박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알아서 속내를 털어놓고 스토리를 제공한다. (중략) 무언가를 믿고 싶은 욕구,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설명해주는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싶은 인간의 강력한 욕구는 시시때때로 고개를 든다. 그 욕구를 톡 하고 건드려주는 신호와 적절한 순간에 마주치면, 우리는 대상이 무엇이 됐든 기꺼이 믿어버리고 어떤 상대편이 됐든 믿음을 줘버린다.”

이 책에서 마리아 코니코바는 실제 역사 속의 뛰어난 사기 범죄자들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사기꾼들이 파는 것이 ‘희망’이었음을 발견합니다. 사기꾼들은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훨씬 나은 존재가 돼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부추겨 희망으로 여겨지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기루 같은 희망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의 종교도 사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신기루와 같은 헛된 믿음과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뒤통수를 치는 사기꾼’들에게는 ‘뒤통수를 맞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따라서 코니코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기꾼이 본래 타인의 고통과 운명에 아무 감정도 못 느끼는 사이코패스인 것은 아니다. 다만, 사기꾼 입장에서는 우리를 하나의 인간 존재로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개별적이고 고유한 인간이 아니라, 목표물일 뿐이다. 다시 말해 수많은 통계적 존재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고유성을 지닌 개인이 아니라, 완수해야 할 여러 ‘처리 대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이어령 교수도 『지성에서 영성으로』 (열림원, 2010)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수들은 숲을 보지 못합니다. 나무의 기둥과 서까래 그리고 책상이나 의자를 봅니다. 목재상들은 수직의 나무를 쓰러뜨려 뗏목을 만들어 그것을 필요로 하는 도시로 운반합니다. 인간이 자연물을 무엇을 위한 수단이요, 도구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개 목걸이의 끝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를 ‘도구’로 보는 것, 혹은 ‘밟고 올라서야 할 걸림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고전 13:13)이라고 말 한 것이 이해가 됩니다. 오늘날 광장의 개신교가 배타적이고, 혐오를 조장하는 종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합니다. 사랑이 없이 타자에 대한 혐오를 통해 믿음을 강요하고, 자신들만의 선민의식으로 배타적 구원에 대한 소망만을 선포하게 되면, 그때 종교는 사기와 다름없습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어 세상 사랑하심을 보여주셨던 예수님과 같이, 타자를 위해 자신의 몸을 온전히 바치는 사랑의 숭고한 힘이 바로 기독교의 올바른 이해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공적(功績)으로, 혹은 업적으로 드러나느냐, 드러나지 않느냐에 대한 마지막 날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 솔로몬 성전과 인식일 논쟁이 배경이 되는데, 연결하여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솔로몬 성전에 관한 말씀과 신약의 안식일 논쟁의 말씀이 연결되어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계명이나 제사보다 자비, 곧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공적이 어떠한지를 시험하시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며 사기 치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 말씀도 사랑하라는 말씀이네요.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사랑’밖에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 솔로몬 성전

먼저 성전에 관한 구약의 말씀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가 시온 산에 있는 다윗성에서 모리아 산에 건설된 솔로몬 성전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이때, 성전 봉헌식을 주도한 솔로몬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헌사를 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따라서 오늘 구약의 말씀은 솔로몬 왕의 성전 봉헌사와 솔로몬 왕의 기도입니다.

<지성소 안의 법궤, 법궤 안에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맛나 항아리>

“그 때에 솔로몬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얼굴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니, 그 때에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서 있더라.”(왕상 8:12-14)

이제 이스라엘 온 회중 앞에서 솔로몬 왕이 봉헌사를 합니다. 길지만 제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왕이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입으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그의 손으로 이루셨도다. 이르시기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 내 아버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그러나 너는 그 성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내가 또 그 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왕상 8:15-21)

봉헌사의 내용은,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다윗 언약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스라엘 왕위에 솔로몬 자신이 올랐음을 선포합니다. 이어 세 번째로 솔로몬은 이 성전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하였으며, 언약궤를 넣어둘 지성소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솔로몬 왕의 기도입니다. 물론 이 기도는 53절까지 이어지는데, 오늘 본문은 기도의 서론이며(왕상 8:22-30), 나머지 31-53절까지가 본격적인 기도의 내용으로, 하나님의 성전과 관련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이 처한 일곱 가지 특별한 상황을 전제하며 기도합니다. ‘만일’이라는 조건문으로 시작되며, ‘기도하거든’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럼 기도의 서론을 한번 살펴볼까요? 4가지의 주제로 기도의 내용을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늘과 땅에 하나님과 같은 신이 없음을 찬양하며, 그 은혜를 감사합니다.

<솔로몬 성전>

“솔로몬이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이스라엘의 온 회중과 마주서서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사,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왕상 8:22-24)

그리고 두 번째로, 다윗 언약을 되새깁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서 나서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왕상 8:25)

세 번째로,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께서 계시기에 작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주는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 8:26-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성전이지만, 주께서 주의 이름을 두겠다고 하신 이 성전을 기억하시고,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는 그 기도를 들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28-30)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가서, 혹은 성전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다니엘을 볼까요? 그는 유다 나라가 멸망당한 이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기도했으며,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당한 이후에도 그 땅에서 불타 없어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합니다(단 6:10). 이처럼 성전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인 상징이자, 이념이 되었습니다. 자, 이렇게 성전에 관한 이해를 전제로, 복음서의 말씀을 살펴볼까요? 성전 개념이 예수님에 의해 해체됩니다.

3. 제사와 자비

물론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안식일에 관해 논쟁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마 12:1).” 십계명의 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입니다. 곧,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고 예배를 드리고, 거룩하게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유대인들은 구체적인 지침을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구전 율법인 ‘장로들의 전통(Tradition of the Elders)’입니다.

그런데 이 전통에 따르면, 안식일에 관한 규정이 39가지나 됩니다. 가령, “기근 등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를 제외하고, 안식일에 밀 추수를 금한다.” 혹은 “안식일에 어린 양이 한 입에 넣을 만큼의 이삭을 잘라 취하는 것도 죄가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정죄는 옳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옛날 다윗의 일과 또한 제사장이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행하는 일, 이 두 가지 예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다윗의 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마 12:3-4)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말씀이죠? 다윗은 사울 왕의 위협을 피해,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의 도움으로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루는 예루살렘의 한 도시인 놉이라는 곳에 도망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엘리 제사장의 증손인 아히멜렉 제사장을 만납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다윗은 이히멜렉에게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삼상 21:3).”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보통 떡’이 없어서 ‘거룩한 떡’을 주게 됩니다. 즉 자신들이 먹는 일반적인 떡이 없어서, 성전에서 사용하는 진설병(출 25:30), 곧 거룩한 떡을 다윗에게 주게 됩니다.

진설병은 ‘진열된 떡’이라는 말입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순결한 떡으로, 성소 안에 있는 떡 상 위에 이스라엘 지파 수대로 6개씩 두 줄로 항상 진설하며, 매주 안식일 아침에 새로 바꾸어 놓습니다(레 24:5-8). 그리고 묵은 떡은 제사장과 그 가족들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떡을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안식을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윗이 위대한 왕이기 때문에,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 바리새인들에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진설병>

그리고 예수께서는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 12:5)” 제사장은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준비하기 때문에,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안식일 규정을 범하게 됩니다. 따라서 율법도 안식일 규정에, 제사장이 성전에서 일하는 것은 죄가 없음으로 인정합니다. 아무튼 여기서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이 이어집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전과 안식일 계명을 해체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7-8)

중요한 것은 성전이나 안식일 계명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입니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마 12:7a).”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니, 바리새인들같이 무죄한 자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 스스로는 성전을 귀히 여기고, 또한 계명을 잘 지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전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기꾼들의 눈에는 사기꾼만 보입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2019)을 보면, 주인공 며느리인 김지영이 남편과 딸아이를 데리고, 명절을 보내러 시댁에 갑니다. 하루를 보내고, 이제 친정으로 가려고 하는데, 마침 시누이 댁이 찾아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먹을 것을 좀 내오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이 있죠? “며느리에게는 ‘시집을 왔으니, 이 집 풍속을 따라야 한다’라고 말하고, 딸에게는 ‘시집가더라도 자기 생활을 가져야 한다.’라 말한다.” “사위가 처가에 자주 오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내 아들이 처가에 자주 가는 일은 줏대 없는 일이다.” 내로남불이죠?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모습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안식일에도 주인 되신 예수님은 계명보다, 성전 보다 무엇이 중요한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서신서의 말씀은 본격적으로 성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도록 만듭니다.

4. 공로의 실적을 묻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0-11)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의 터가 중요하지, 보이는 성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우리 자신을 자비와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 심판 때에도 이어집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여기서 공적(功績, the quality of each man’s work)은 공로의 실적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업적’으로 번역하고 있어서 좀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무튼 마지막 날 불의 심판을 하실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제대로 집을 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불에 타지 않지만, 나무나 풀이나 짚은 불타 없어집니다. 여러분의 공적, 혹은 업적은 무엇입니까? 불타 없어질 것입니까? 아니면 불에도 타지 않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이 단단한 업적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4-15)

놀라운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은 받지만, 그 행실이 불의한 자는 불 가운데서 고통 받으며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5. 불 가운데서도 거뜬한 공적

대한민국은 한 해에 보이스피싱 피해액만 약 2,000억 원 규모에 이른다고 합니다. 보이스피싱을 목적으로 검찰을 사칭하며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드물 정도입니다. 2013년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범죄 유형별 국가 순위’를 살펴보면, 한국이 사기 범죄 세계 1위 국가였습니다. 개신교인들이 거짓말하고, 목사, 장로들이 사기 치니, 당연한 결과라 볼 수 있습니다.

이들도 예수를 믿기에, 마지막 날에 구원은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에 의하면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들의 공적이 어떠한 것인지에 따라 태워 없어지기도 하고, 불에도 거뜬하기도 합니다. 불 가운데서도 거뜬한 공적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울 사도가 말한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깨닫고, 우리의 삶으로 사랑을 실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실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