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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살인한다

기사승인 2019.11.06  17: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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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의 혁명 (1)

문: 하나님 나라의 혁명, 말하자면 백 팔시도의 이러한 전환은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와 도덕의 해체를 뜻하는 것인가?

답: 예수께서는 우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장 17-20절)

문: 여기서 의(Gerechtigkeit)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의는 보다 완전하게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우리가 이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모든 것을 포괄한다, 즉 공정함뿐만 아니라 사랑, 순수, 진실, 자유 등 우리가 말하는 바의 모든 도덕적 태도를 포함한다. 이것은 성서의 근본을 이루는 말이다(Grundwort). 성서는 오직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정의만을 선포할 뿐이다. 모세가 가르친 것이 이것이며, 예언자들이 외치고 예언한 것이 바로 이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문: 그렇다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란 누구인가?

답: 서기관들이란 우리가 신학자들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람들인데, 그것도 그들이 특별히 성경을 주석하는 한에서만 그렇게 불리는 것이고, 바리새인들이란 사람들이 ‘경건한 사람’들로 이해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둘 다 극히 엄격하게 율법을 지킨다. 이들은 다른 경우도 많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이면서 서기관인 경우가 많다.

문: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의는 어느 정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해야만 하는가?

답: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란 율법의 의다.

문: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답: 율법이란 무엇이 옳은지, 또 우리가 도덕적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원론적 대답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를 규제하는 체계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서기관들의 권위 있는 해설과 함께 십계명으로 집약된 모세율법이었고,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거나 선이라고 부르는 그런 것이다. 예수는 그러나 이런 도덕을 파기한다.

문: 도덕은 어느 정도로 충분하지 못한가?

답: 도덕은 선을 행하라는 명령에 한계를 정해놓기 때문에 충분하지 못하다. 서기관들은 율법의 울타리(Zaun)에 대해서 논한다. 율법이란, 어떤 율법이든지 다 그런 울타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울타리는 악을 막아내지만 또한 선도 막고 있는 것이다.

문: 선을 어느 정도 막고 있는가?

답: 바로 울타리 자체를 통해서 악을 저지하는 그만큼 선도 저지한다. 율법은 선도 울타리 안으로 제한한다. 이 울타리 바깥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선의 영역이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시된다. 그것은 도덕상 중립적인 것이 된다. 율법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닌 영역으로 된다. 그 영역은 일종의 “자율성”을 얻는다. 그것은 마치 어떤 신학에서는 정치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이 자율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같다. 즉 그 영역은 세계정신이 지배하거나 이 세상의 영주들에게 양도된다. 율법의 울타리 안에 포함된 것이 기독교적인 도덕이든 (자본주의적인) 시민계층의 도덕이든 간에 우리는 것을 지키기만 하면 올바르게 된다. 바로 이런 것을 통해서 악은 더 넓은 영역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 Edward Hicks, “노아의 방주”(Noah's Ark, 1846) Wikimedia Commons/Philadelphia Museum of Art

율법의 또 다른 결점이 이런 악을 도와준다. 즉 율법은 본질상 요점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온갖 작은 문제들과도 관련이 있어야만 한다. 여러 가지 사소한 문제들이 중요한 문제들을 못 보게 한다. 여기서 큰 문제가 작은 문제로 되고 작은 문제가 큰 문제로 되는 위험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비난했던 것과 같은 일이-이런 일은 종교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일어난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나 회향과 근체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도다.”(마태복음 23장 23-24절)

여기서 율법의 결점은 계속해서 생긴다. 즉 율법의 규정이란 제한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가 율법의 규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그것을 행했노라고 그릇되게 상상할 수 있다. 율법을, 그 율법이 나오게 된 취지(Gesinnung)에 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 하는, 다만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만 물을 때 바로 위와 같이 그릇 상상하게 되는 일에 쉽게 빠지는데, 여기서 우리가 가장 빠지기 쉬운 위선이 나온다. 예수는 이에 대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너희 신학자들과 소위 경건한 자들이여)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마태복음 23장 25절)라고 말씀하신다. 율법을 다 준수했노라는 그러한 생각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만족이나 완고함(Verhärtung)이 들어온다. 이것은 거의 언제나 내가 무언가 가지고 있다는 소유의 결과로, 일종의 자기의(Selbstgerechtigkeit)이다. 이렇게 해서 경건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이 의이든 일반사람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든 간에 자기 의가 자리 잡는다. 경건한 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들 자신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고 일반 사람들은 시민사회의 도덕을 잘 준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세상 파에 나서기에 떳떳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무엇보다도 이 자기 의와 싸우셨다. 이 자기 의는 하나님의 주된 적이요, 인간의 적이다. 왜냐하면 이 자기 의는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차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저 가난을 없애기 때문이며 그와 함께 선의 원천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율법에는 또 다른 중요한 결점이 있다. 즉 율법은 사람을 구속한다. 율법은 외부의 명령으로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율법의 규범은 관습적인 것이거나 유용성을 고려한 것일 뿐이지 참된 선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로부터 또한 위선이 나온다. 어찌되었든 율법은 심한 속박이다. 그런 구속 외에도 율법적 행위에는 기쁨이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가 지키기 싫어도 지켜야만 하는 것을 마지못해서 준수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짢은 표정을 하거나 무뚝뚝하고 냉혹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혹은 부지불식간에 율법이 우리를 속박하는 것임을 알고 율법을 부담스럽게 느끼지만 율법이란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것이므로, 혹은 꼭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율법을 준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당연히 율법준수를 한층 더 엄격하고 냉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 결과 심적으로 위축되거나 사소한 것에 너무 얽매이거나 마음에서 고뇌가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율법을 내던지고 뻔뻔스럽고 방자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바리새주의는 극단적인 도덕주의를 만들거나 자유방종주의(Libertinismus)를 만드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이 도덕이니 경건성이니 하고 부르는 것들이 바로 위와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단지 약간의 자극은 줄지 모르나 아무런 감명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경건한 차원에서 보나 세속적인 의미에서 보나 정말 선한 것이 아니며 그저 율법인 것뿐이요, 굳고, 냉혹하고, 진부하고, 사소하고, 부당하고, 허위에 찬 것일 뿐이요, 나아가 그 율법의 배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나 선에 대한 열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열망, 즉 완고함, 지배욕, 교만함, 타인의 고통과 괴로움을 즐기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음을 느낀다. 이것은 정말 무섭게 우리의 도덕적, 종교적 삶을 관류하면서 그것을 부패시키고, 인간을 하나님과 선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독소이다. 만약 예수마저 안 계셨더라면 이러한 만연된 독소는 그리스도의 일을 이미 오래 전에 파괴해 버렸을 것이다.

율법이 주는 부담은 또한 다른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율법이란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로인해 낙심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한 행위란 무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거니와 설사 그들이 선한 행위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할 지라도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단지 가지들의 과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러 한계를 지닌 율법의 개별적인 요구들을 통해서 도덕적 요구 자체의 무한성을 보게 되고 그들 자신이-이 땅에서는 당연히-의롭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 절망한다. 바울, 루터 그 밖에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이것으로써 율법의 결점이 다 드러난 것은 아니다. 율법은 또한 융통성 없이 틀에 박힌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운동을 수행할 수 없다. 율법은 자기의 규정으로 선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고 그 딱딱한 껍데기로 선의 숨통을 끊어 버린다. 그저 오성(Verstand)뿐인 것은 개별적인 것과 그것의 정당한 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직관(Instutition)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듯이 뚜렷하게 오성의 피조물이며, 어쨌든 쉽게 오성적으로 굳어버리는 율법은 구체적인 상황과 “순간”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왕왕 가장 훌륭하고 가장 진실한 행위들조차 별로 좋게 여겨지지 못하는 것이다. 특별히 사랑은 율법적 사고에서는 손해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일반적 원칙과 더불어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순간과 그 순간을 이해하는 마음이 눈과 더불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이런 획일성으로 말미암아 삶은 그만큼 부자유스러워지고, 비인간적이고 되고, 신성한 것이 못 되어가고 있는 유감스럽게도 삶의 이런 모습은 본질적으로 “바리새인의 의”를 보여주고 있는 기독교 단체들에서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인간 대 인간의 개인적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생활 속에서의 율법의 역할에서도 매한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율법은 여기서도 경직될 위험에 처해 있다. 율법은 여기서도 삶의 정당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획일적인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안식일과 인간에 대한 예수의 위대한 말씀은 그 말씀과는 정반대로 곡해되었다. 말하자면 율법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율법을 위해서 있다는 것으로 곡해되었다. 그에 따라 “최고의 법이 최악의 불법”(Summun jus Summa injuria)이러거나 “세상이 정의로 인해 망하더라도 정의가 있기를 원하노라”(fiat justitia, pereat mumdus!)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올바른 것이 부당한 것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바뀌어 버린다. 다음과 같은 말도 그래서 있는 것이다.

율법과 법규들이 영원한 질병처럼 전해진다.
그것들은 세대에서 세대로 힘들게 나아가며 아주 느리게 사방으로 퍼진다.
이성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선행 역시 무거운 짐이 되리라.
이성과 선행의 추종자는 화있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 태어난 법규들은 공교롭게도 아무 문제가 없다.

여기서도 율법은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너무 쉽게 억압하는 것이 된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말씀이 여기에서도 적용된다. 여기서도 역시 많은 율법규정들로 인해 올바른 것이 사라진다. 여기서도 역시 율법은 인간적인 것, 너무도 인간적인 것과 맘몬의 지배와 계급의 힘,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의 방패가 될 뿐 아니라 이따금 불의를 제가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혁명이라고 하는 어떤 한 혁명이 이러한 바리새적인 의 대신에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출현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도 그 혁명은 굉장한 위선이 될 것이며, 그 위선은 어느 날엔가 그만큼 두려운 혁명을 초래할 것이다.

이것으로 율법의-모든 율법의-그밖의 결정도 언급된 것이다. 율법은 전통의 후예이다. 우리는 것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는다. 율법은 그런 전수를 통해 거룩하게 된다. 율법을 훼손하는 자는 화가 있을 찌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고 더 이상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다. 율법은 개인의 삶에서나 공동체의 삶에서나 그런 것으로 되고 만다. 전승이라는 축복이 저주가 되고 도움을 주는 것은 구속이 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성서학식이 성서주석인 한 이것은 성서학식에도 적용된다. 살아있는 성서 자체로부터 진리와 더덕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문자에서 얻어낸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알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식으로 해서 율법서가 되어버린 성서를 한번 보기만하면 된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정의는 지나쳐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적 성서관의 어쩔 수 없는 기능이다. 그들이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살인한다. 이것이 바로 율법학자들의 정의이다.

문: 이것은 단순한 성서학식말고도 모든 신학에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답: 물론이다. 교리(Dogma)도 일종의 율법이요, 교리론은 율법서이다. 이런 것들은 응고의 결과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와 함께 신학도 율법의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언급은 신학이 참된 학문이요, 겸손한 학문인 한에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학도 일종의 정신적 태도인 한에서 문제가 된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그 모든 형식상 쉽게 율법이 되고, 동시에 짐이 되고, 저주가 된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완수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규칙이 되고, 기쁨과 자유는 짐과 강요가 되고, 축복은 저주가 된다.

레온하르트 라가츠/신요섭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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