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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만 예장 합동 장로가 만난 도마복음과 선불교 신심명

기사승인 2019.11.04  17: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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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 문자주의와 기복주의 비판과 대안

최근에 교회 장로가 『신심명을 통한 성경과 도마복음의 새로운 풀이』(미다스북스, 2019)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신심명(信心銘)은 불교 선종의 수행자들에게 전해지는 6세기 중국 선승의 보전(寶典)이다. 도마복음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45년에 세상에 드러난 2천년 전 예수 어록이다.

이 책을 출판한 구자만 장로는 예장합동소속 교회에 속해 있다. 책이 나오기 전부터 이단이니 사탄이 하는 위협과 협박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위험한 책을 교우들과 함께 읽고 공부한 목사가 있다. 예장통합소속 ‘지금여기교회’ 장용기 목사다. 조합이 그야말로 에큐메니칼 하다.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총무 장병기 목사는 구자만 장로의 이 책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 보수 교단의 장로였던 그의 이력은 이 책이 탄생하기까지의 산통이 얼마나 심했을지 쉽게 가늠이 되기에 더없이 고맙다.”

에큐메니안은 이런 쉽지 않는 조합의 사람들을 한 테이블에서 만나 또한 쉽지 않은 주제를 놓고 나누는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장소는 구자만 장로가 경영하는 사업소의 사무실이다. 예장합동교회의 장로와 예장통합교회의 목사가 만나 불교의 신심명과 기독교의 도마복음을 놓고 대담하는 자리였다.  

에큐: 장로님의 책 “신심명을 통한 성경과 도마복음의 새로운 풀이”의 추천사를 이현주 목사와 장용기 목사가 쓰신 경위가 궁금합니다.

▲ 구자만 장로는 예장합동 소속 교회의 원로장로이다. ⓒ윤병희

구자만(이하 구): 이현주 목사의 책을 많이 읽었다. 사람들이 이현주 목사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이현주 목사는 동양 고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요즘 젊은층들이 이현주 목사의 책을 두루 읽는다면 현실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랄까, 해방이랄까 좀 느낄 수 있을텐데. 요즘 교회 사람들이 이현주 목사의 책을 읽는다면 오늘날 교회가 훨씬 더 진리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장용기(이하 장): 이현주 목사의 책 “예수와 만난 사람들”에 문익환 목사가 추천사를 썼다. 그래서 그 책이 좀 반향이 있었다. 구자만 장로님이 우리교회(지금여기교회)에 가끔 오시곤 한다. 이 책의 추천사를 이현주 목사님이 쓰시면서 (이현주 목사가) 저에게도 추천사를 쓰라 하시면서 이 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구: 장용기 목사의 교회 이름이 ‘지금여기’인데, 나는 이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여기’가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여기’라는 말에 ‘용기’를 얻었다. (웃음)

(이 말 속에 ‘지금여기’ 교회의 ‘장용기’ 목사를 가리키는 중의적인 유머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이 기사를 쓰면서 알아차리게 되었다.)

장: (지금여기가 진리라는 말에 대해) ‘신심명’의 74번(마지막 장)이 ‘言語道斷 非去來今(언어도단 비거래금)’이다.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없다는 뜻이다.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한다.

구: 진리는 언어와 생각을 벗어나야 하는데, 우리(한국교회)는 문자대로 해석하려고 하니까 자꾸 언어와 생각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자꾸 진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6절에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 했는데, 예수님은 계속 비유와 영적인 것으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문자에 빠져가지고 진리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장: 장로님이 신심명과 도마복음을 하나로 엮으시려고 하신 이유가 궁금하네요. 
 
구: 도마복음은 (이전에도) 계속 읽고 있었다. 그러다 신심명을 읽다 보니까 도마복음 구절과 성경 구절들이 자꾸 생각이 났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성경책에 (연상되는) 신심명 구절을 계속 써내려 보았다. 이런 연관된 내용을 인터넷(블로그)에 글을 써서 계속 올렸다. 친구가 이 글을 보더니 ‘경전끼리 해석이 다 통하니까 (모아 놓으면) 좋은 책이 되겠다’고 해서 연재한 글들을 보완해서 모아 보았다.

진리끼리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은, 궁극적 진리는 하나의 뿌리이지 않나. 하나라는 것은 불이(不二), 둘 아닌 하나이다. 노자 장자 힌두교 모두 진리는 불이(不二)를 드러내는데, 특히 도마복음은 이것을 성경(정경)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책에 도마복음을 많이 인용했다. 신심명과 도마복음을 연결해 본 것이다.

이 책 『신심명을 통한 성경과 도마복음의 새로운 풀이』는 신심명(信心銘) 원문에 따라 2구 8자를 한 장으로 구성해 총 74장마다 해설을 달아놓았다.

대부분 사전은 신심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심명(信心銘)은 중국 선종(禪宗)의 제3대 조사(祖師)인 감지선사(鑑智禪師) 승찬(僧璨, ?~606)이 지은 글로 146구(句) 584자(字)로 되어 있다. 사언절구(四言絶句)의 시문(詩文)으로 73개의 대구(對句), 36게송(偈頌) 2구(句)로 구성된 이 글은 선(禪)의 요체(要諦)가 잘 나타나 있어 중국에 불법(佛法)이 전래된 이후 나타난 경문(經文) 가운데 ‘최고의 문자(文字)’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선종(禪宗) 불교(佛敎)에서는 제6대 조사(祖師)인 혜능(慧能, 638~713)이 남긴 <육조단경(六祖壇經)>과 함께 중요한 보전(寶典)으로 여겨왔다.

신심명의 자구수는 대부분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146구 584자로 되어 있다고 나온다. 그러나 구자만 장로의 이 책에는 신심명 원문이 592자이다. 8자를 한 장으로 삼아 총 74장으로 되어 있다. 혜국 스님이 복원했다는 원문을 따른 것이다. 혜국 스님은 그동안 국내 해설서들이 빼놓았던 ‘비고지금 삼세일념(非古之今 三世一念)’(제66장)이라는 구절을 찾아 전체 74구절 592자로 복원했다고 한다. (불교신문 2015년 7월 2일자 기사 참고)

에큐: 도마복음에 그런 불이(不二)의 특징이 (정경보다) 더 많다는 말씀에 대해 좀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 구자만 장로(왼쪽)와 장용기 목사 ⓒ윤병희

장: 도마복음은 어록이기 때문에 예수라는 한 개인을 신성화한다기 보다는, 즉 탄생과 죽음에 대한 종교적 각색이 전혀 없고, 예수의 말씀만을 어록으로 담았기 때문에 훨씬 더 진리에 가깝기도 하고 실제 예수가 한 말씀에 더 가깝지 않을까. 정경의 복음서는 당시 교회 공동체가 예수의 이름을 빌어 첨가한 것이 많다고 한다.  

구: 도마복음은 가감이 되지 않은, 편집되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인데, 내가 아는 한 (불교)스님은 도마복음을 읽고 우리(불교)와 너무 비슷하다고 놀라워하더라. 내가 해설한 글을 읽고 재미가 솔솔 난나고.(웃음) 진리는 불이(不二), 하나로 해석해서 읽으니까 너무 재미가 솔솔 난다는 것이다. 진리가 서로 통하는구나, 성경이 너무 재미있다고 하더라. 진리가 서로 통한다는 것을 조금만 인식한다면 세상의 종교간의 갈등, 가족끼리 친구끼리 갈등이 해소될텐데, 이 사회에 좀 도움이 될 텐데, 특히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더 보수적인데, 예수님이 강조하는 것만 잘 이해해도 더 나아질 텐데.

장: 장로님이 이 책에서 신심명을 해설하면서 도마복음과 성경의 뜻을 연결해 놓은 것을 보고, 기존의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할 수 없는, 탁월한 해석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장로님이 가지고 있는 재능일 수도 있겠으나, 이것이 어떻게 이렇게 나왔을까(해석될까) 의아할 정도로 놀라운 부분이 많았다. 진리에 대한 갈구와 탐구를 통해 나온 것이지 않을까.

구: 제가 대학시절 때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상대방을 다 죽이라고 하는 구절에서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잔인한 하나님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너무 흥분되고 충격을 받아서 성경을 탁 덮었다. 

그러다 30대 중반에 불교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었다. 불교학자인 친구가 권한 다나구찌 마사하루의 ‘생명의 실상’ 전체 40권을 다 읽었다. 거기(생명의 실상)에 성경 구절이 조금씩 나온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그후 순복음교회에 다니면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신학교도 가고 그랬다. 불교를 통해서 성령을 받은 셈이다. 로마서 1장 20절에 나오는 보편적 계시인 거죠. 만물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계시를 체험했다. 그러면서 불교 공부를 계속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불교티비를 보다가, 거기 나오는 스님이 신앙심을 가지려면 성경을 더 공부해야 한다고 하더라. 깜짝놀랐다. 성경을 공부해야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거였다. 청화스님이었다. 통불교, 즉 진리는 하나니까 서로 통한다는 거다. 그때부터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진리는 하나다, 불가분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내만 진리다’라고 하는데, 거부감이 있다. 진리가 아닌 걸 진리라고 평생 매달리는 사람들을 볼 때 참 안타깝다.

구자만 장로는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종교교육학 석사학위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했으며 신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고 예장합동 소속 교회의 원로장로이다.

장: 신심명의 저자 승찬대사는 문둥병이 있었다고 하는데, 문둥병이 내 업(죄)때문인 것 같다고 하자, 그 스승인 혜가가 죄를 가져오라고 하자 승찬이 문득 깨달았다고 전해진다. 죄의 문제 해결에 대해 교회는 예수의 보혈과 같이 타력적인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죄의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절대자에 의존하는 게 기독교의 맹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구: 공부하면서 제일 고민이 죄의 문제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라는 얘기다. 빛의 자녀라는 것이다. 우리를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죄악이다. 너는 본래부터 신적인 성품을 가졌는데, 하나님으로 꽉 차 있는데, 정 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여기에 꽉 차 있는데 단지 우리가 어둠에 가려서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어둠을, 이 에고(ego)를 벗어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여기에 주어져 있는데... ‘지금여기’가 참 좋은 말인 것 같다.

장: 에고(ego)는 마귀 사탄의 현대 용어라고 볼 수 있다. 에고의 가장 취약한 점이 이원성, 즉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나누는 것인데, 이런 문제에 대해 신심명의 제1장 ‘至道無難 唯嫌揀擇(지도무난 유혐간택; 지극한 道는 어렵지 않으니 다만 가려서 선택하지만 말라)’이 지적해주는 바이지 않을까 한다. 이원성은 학습의 도구일 뿐인데, ‘천국/지옥’과 같은 간택이 기독교에는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신심명이 주는 의미는 꽤 크다고 생각한다.

구: ‘나(에고)’라는 것은 현대 물리학에서 보자면 에너지일 뿐이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 때문에 이원성이 나오는데, 내가 내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한다면, 무념무심한다면, 에고의 이원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고 순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즉 에고를 죽이라고 하는데, 요즘 교회는 거꾸로 ‘구하라’는 것으로 세속적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에고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예수는 버리라고 하는데, 요즘 대형교회는 거꾸로 채우려고 한다. 예수님의 진리와 상반되는 것이다.

▲ 예장통합 소속 지금여기교회의 장용기 목사는 교우들과 함께 ‘신심명을 통한 성경과 도마복음의 새로운 풀이’를 공부했다. ⓒ윤병희

에큐: ‘지금여기’ 교회의 모습은 어떤가요? 

장: 우리 교회는 예장통합 교단 소속이지만 교단의 정체성과는 좀 다르다. (교단의 정체성은 명성교회의 영향 아래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모토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을 구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고 있는가. 큰 성전을 건축한다거나 전도를 할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하는 것이다. 성경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엄청난 일을 하겠지만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건지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뜻과 말씀대로 하는 것이 어떤 건지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한다.

우리 교우들은 주중에 모여서 신심명을 공부했다. 지난 달에 끝났다. 꽤 오래 걸렸다. 거의 반년 가까이 걸렸다. 한 주에 한두 장씩, 74장이니까. 신심명 본문은 A4 한장에 다 들어갈 정도로 짧지만, (74구절 592자)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심오해서 쉽게 나갈 수 없었다. 장로님은 각 장에 해설과 도마복음과 정경의 어록을 첨부해놔서 진도 나가는데 쉽지 않았다.

구: 진리는 언어도단, 즉 문자가 아니라 그 상징이므로 그 안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선악과 이야기에서 선과 악을 나누자마자 죄가 들어왔다. 진리는 하나이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I AM THAT I AM'이라고 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장: ‘나 이외의 다른 신을 구하지 말라’라는 의미도 ‘I AM’의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구: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말라는 것도 ‘하나’라는 맥락이다. 

장: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을 때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내리는 것을 유대인이 놀라워했는데, 유대인들의 놀란 이유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냐는 편견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구: 성령이 내린다는 말도 이미 충만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뜻일 것이다. 눈을 뜨라는 것이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안으로 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혜안’ 혹은 ‘불안’이라 하고 힌두교는 ‘제3의 눈’이라고 하고 우리는 ‘영안’이라고 하고, 공통점은 내면의 눈을 뜨라는 것이지 않을까 한다. 죄는 무지 무명의 상태이지 않을까.

장: 언어의 한계가 보이는 부분이 많다.

구: 도마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공관복음)과 달리 ‘불이(不二)의 진리’를 더 많이 표현하고 있다.

장: 왜 성경은 왜 문자적으로 오해을 일으키는 부분이 많을까? 만일 성경이 ‘네가 왕이다’라고 씌였다면 세속의 권력자가 성경을 그대로 두었을까? 없애버렸을 것이다. 도마복음은 오히려 20세기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질 수 있는 것 아닐까?

구: 요즘 기독교는 기복적인 것이 문제다. 기복은 에고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데, 오늘날 교회는 교회에서 평안과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죄의식만 키운다. 

에큐: 장용기 목사님은 교회에서 교우들과 함께 이 책을 읽고 공부하셨다는데, 어떠셨나요?

장: 이 신심명이라는 것은, 수행하는데 도움을 받는 책이다. 종교는 수행이 필수적인데, 기독교는 수행의 종교가 아니다. 담박에 깨닫는 것, 돈오돈수라고 볼 수 있다. 신심명은 ‘네가 식견만을 버리면 네가 바로 부처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 것처럼, 도마복음에도 ‘돌을 들어봐라 거기 내가 있다, 장작을 쪼개 보아라, 그 안에 내가 숨어 있다’라고 한다. 내 안에 신성이 가득하다는 것을 에고라는 것에 가려져 있어서 몰랐던 것을 담박에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치 어둠은 빛이 들어오면 바로 없어지듯이 말이다.

이 책은 그러한 의식을 많이 담고 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은 대부분 예전에 잘 나가다가 망한 분들이 대부분이다. 상처가 있는 분들이다. 전에 한번 망한 금액을 합해 보니 몇백억이었다. 본인이 실패하고 망한 것이 자기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자책감과 죄책감이 많았다. 신심명을 공부하면서, 내가 원래 완전한 존재이고 그러한 일들은 나라고 하는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 내가 주체적으로 뭔가를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화엄사상의 핵심이 연기, 즉 연해서 일어난다는 것이고, 이 책도 그런 것을 말하고 있고, 그래서 교우들이 읽으면서 가장 많이 한 것은 그 (실패가) 나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는 의식으로부터 좀 자유로와졌다. 많이 마음이 편해졌다. 네가 망한게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통해 망한거야, 연주자가 피아노를 통해 소리를 내듯이 피아노가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연주자가 망한거야, 이런 전환이 있었다. 상황이 변한 것은 없지만, 여전히 망해서 가난하고 그렇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을 '망한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은 너희 것이다'라고 보았다.

이 책에서 장로님이 하나하나 잘 포착해서 절묘하게 써놓으셔서 교우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한 곳에 머무는 순간’이라는 말을 편재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여기 있으니 저기에 없다’는 생각에 잡혀 있었던 것이다. 교우들이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장로님의 책을 보면서 이런 확인을 겪었다.

에큐: 구자만 장로님은 이 책을 쓰실 때 매월 정기적인 독서토론을 통해 지혜가 풍성해졌다고 하셨는데,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구: 한달에 한번씩 가족들이 다 모인다. 아들 둘 부부, 딸 부부, 아내 이렇게 다 모인다. 책 한권씩 정해서 읽고 모일 때 토론한다. 한 십년 되었다. 이 책도 3개월에 걸쳐 끝냈다. 아내도 처음엔 이런 책의 내용에 반대했다. 며느리는 영원할 수 없는 몸의 부활에 대해 의문을 품다가 성경의 영적인 재해석에 대하여 생각이 깊어졌다. 처음에는 가족들이 반대하다가 이제는 공감하는데, 큰딸은 아직도 나의 생각에 교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서로 생각을 주고받고 토론하다 보니까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들도 나오고 해서 나의 생각이 더욱 풍성해졌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나의 독선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한달에 한번 가족토론하는 게 보람된다.

장: 문자주의를 벗어내는 이러한 생각이 교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장로님이 이런 내용을 좀더 쉽고 평이하게, 접근하기 쉽게 더 많이 써 주시기를 바란다.

구: 앞으로 수행과 기도, 체험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 기복적인 방식으로는 기독교의 미래가 없다.

이현주 목사는 이 책의 추천사에 이렇게 썼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붓다는 불자(佛子)가 아니다. 그들을 따르겠다는 신앙인의 마지막 종점은 그러므로 종교라는 고치에서 벗어난 깨달은 이의 뒤를 따라 탈종교(脫宗敎)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아직은 대중에게 낯설지만, 중세기의 ‘지동설’처럼, 머잖아 일반상식으로 될 신선하고 오래된 생각을 이 책에서 읽게 됨은 반갑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윤병희 ubiquita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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