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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언어와 몸짓 언어”

기사승인 2019.10.18  17: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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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학 박경동의 서예 작품을 읽다

운학 박경동 작가의 붓글씨 전시회「심선心線 따라 묵향墨香 50년 전」이 끝났다. 이십사 일 동안의 전시, 그 이전에 운학 선생이 높이만도 3.8m인 대형 작품들을 갤러리에서 땀을 쏟으며 쓴 날들까지 하면 두 달이 넘는다. 수장고에 수많은 서예 작품이 있어도 찬찬히 감상한 적은 거의 없다. 서예는 그저 크게 쓴 한자를 독해하는 정도의 일이었건만,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서예에 반하고 말았다. 작품을 다 내리고 텅 빈 흰 벽을 보니 허전함이 깊다.

▲ 운학 박경동 & 동방서법탐험회 전시회 「심선心線 따라 묵향墨香 50년 전」ⓒU.H.M. Gallery 단해기념관

처음에 어디서도 본 적도 없는 대형 작품을 걸고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그 풍경만으로도 강렬했다. 관람객 대부분이 들어서면서 탄성을 지르고 사진에 담을 만했다. 그러나 몇 컷의 사진을 찍고 나면 얼마 머물지 않고 떠나곤 했다. ‘멋지기는 한데, 한자를 잘 몰라서요.’ 누군가 남긴 이 말이 그 모든 흐름을 정확히 요약한다. 한 폭의 멋진 배경 이상의 의미를 음미하는 이는 드물었다.

운학 선생에게 제안해서 작품마다 뜻풀이를 비치했다. 그러나 갤러리에서 한자 공부를 하고 싶은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해설 내용을 자세히 살피는 이 역시 드물었다. 운학 선생은 풀이를 몰라도 된다고 했다. 글자로 보지 않고, 그림으로 즐기면 된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 서서히 알게 되었고, 그렇게 서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여정을 나누고 싶다. 그림과 예술로 서예와 사귀게 된 뜻밖의 여정을.

처음 시선을 끈 글자는 문자라기보다 그림이었다. 그것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보였다. 무슨 글자인지 물어보니 있을 재在라고 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모습이 어떻게 있을 재在 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어보니, 있을 재의 가장 초기 형태인 갑골문 모양에서 온 것이었다.

한자는 상형문자여서 ‘있다’는 글자도 무엇인가를 형상화한 결과다. 땅에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거기에서 잎이 돋는 모양을 그대로 본뜬 것이 있을 재在의 최초 형태다. 그것이 수천 년 세월 변하면서 지금의 있을 재가 되었다.

ⓒ출처-네이버 한자사전

다시 있을 재在 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떠오르게 하는 재在 자는 ‘있다’는 말의 의미를 보여주었다. 있다는 의미를 자유롭게 그려보게 했다. 한자에서 있음은 어우러진 생명의 관계로 다가온다. 흙이 있고, 그 품에서 씨앗이 하늘의 젖을 먹고 뿌리 내릴 때, 싹은 드디어 ‘있다.’ 모든 존재는 땅에 기대 하늘의 젖을 먹고 어둠 속에 뿌리를 내려 드디어 ‘함께 있다.’ 무엇인가가 있다고 말할 때, 한자는 그 어울림을 그려준다. 그 맛과 멋은 서로에게 기댄 아늑함이었다. 어둠을 견디고 ‘있을’ 이유를 보여준다.

다음으로 마음이 머문 글자는 사람 인人이다. 자연스레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 음미했다. 보통 두 사람이 기댄 형상을 기원으로 알지만 자원字源은 달랐다. 그러나 자원과 상관없이 한 사람의 발걸음으로 보였다. 성큼 내딛는 발걸음이 왼쪽을 향한다. 내딛은 발의 진하고 굵은 선이 힘찬 걸음으로 보였다. 뒷발은 이제 막 움직이기 시작한 가벼움으로 보였다.

▲ 운학 박경동 작가의 붓글씨(좌),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Walking Man(우)

성큼 내딛는 발걸음이 사람의 모습이라면, 그것이 사람의 본질을 표현한다면, 무엇을 말하는 글자인가? 그것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Walking Man과 겹쳐왔다. 또한 십자가를 향해 내딛는 그리스도의 발걸음도 떠올랐다. 말기암과 사투를 벌이는 한 영혼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다시 일어나 걷는 발걸음으로도 다가왔다. 그렇다. 사람은, 참으로 사람은 걷는다, 나아간다. 불안과 두려움, 불확실성과 허무, 죽음과 실패가 어른거려도 한 걸음을 내딛는다. 백척간두에서 내딛는 한 걸음, 그 한 걸음이 사람을 참으로 사람이게 할 때가 있다.

서예를 그림으로 자유롭게 상상하며 음미하는 멋의 절정은 전각篆刻 작품이었다. 보통 돌에 새긴 도장쯤으로 생각하는 전각은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지니고 있다. 피카소가 말년에 전각 작품을 보고는 좀 더 일찍 전각을 알았다면 자신의 예술 세계가 바뀌었을 거라고 했을 정도다. 왜 그럴까? 앞서 살펴본 대로 한자는 상형문자에 뿌리를 둔다. 그래서 글자이면서 그림이다. 전각은 그 지점에서 피어난다. 사각의 좁은 공간에 한자를 새기 넣으면서 그것을 그림으로 변주한다.

운학 박경동 작가는 전각을 지죽 작품으로 새롭게 적용했다. 돌에 도장형식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한지의 원재료인 지죽을 이용해 조형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그 중에 「풍화일려 風和日麗」라는 작품이 단연 돋보였다. 풍화일려風和日麗는 바람이 멎고 파도가 잔잔하듯이 나날이 아름답기를 기원하는 말이다. 그런데 바람이 조화롭고 햇살이 우아하다는 이 네 글자를 아래 작품처럼 새겨 넣었다. 무엇이 보이는가? 오른쪽 밑에는 집이 있고, 그 왼쪽에 뿔이 우아한 사슴이 있다. 태양이 빛나는 하늘에는 새 한 마리가 난다. 풍화일려라는 글자를 상형문자로 되돌려 표현하면서 뜻 그대로 조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렸다.

▲ 운학 박경동의 지죽전각 「풍화일려 風和日麗」

화和가 집이 되고, 려麗가 사슴이 되고, 풍風이 새가 된 사연과 맥락이 있다. 그중 풍風 하나만 살펴보면, 풍은 원래 봉황의 모양을 본 뜬 글자다. 봉황의 날갯짓이 바람을 일으킨다고 본 탓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새의 모양에 가까웠다. 풍화일려 전각에서는 그래서 새로 표현한 것이다. 봉황을 본 뜬 풍風 자는 세월이 흐르며 새 조鳥와 구분 되면서 속에 벌레 충虫이 들어간다. 바람이 불어오면 그 속에 벌레가 함께 담겨 있다고 본 결과다. 현대 미술 작품처럼 보이는 풍화일려 지죽전각 작품은 결국 상상력을 간질인다. 바람은 그저 대류의 물리적 이동만이 아니라고, 바람은 봉황 곧 신비한 생명의 날갯짓이고 그 안에 생명을 담고 흐르는 춤이라고 속삭인다.

ⓒ출처-네이버 한자사전

한자학 강의가 길어졌는지 모르겠다. 멋있기는 한데, 서예는 잘 몰라서요, 돌아서던 그 발걸음들이 마음에 남았다. 그 뒷모습이 눈에 밟혀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욕심을 부렸다. 실은 여전히 아는 것도 변변치 않으면서 뭔가 아는 것처럼. 서예도, 한자도 전혀 모르다가, 처음으로 뜻밖에 반해 버린 탓이리라. 처음 반하면 그러듯이 좀 들뜨고 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나누고 싶던 울림이다. 잊히고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아름다움이다.

현실 속에서는 그림 언어인 한자로 표현하는 예술이 잊히고 있다. 대도시에서 서예 족자를 만드는 가게가 몇 년 새 1/10로 줄었다고 한다. 급격히 줄고 있다. 사실 아무리 그림으로 본다 해도 서예가 쉽지는 않다. 서예가나 전문가라는 이들도 전시된 작품을 쉬 읽고 풀지 못한다. 한자 자체도 많건만 한 글자마다 그 변형이 워낙에 많기 때문이다. 전문작가도 그 작품이 무엇을 썼는지 제목을 알고 난 후에야 암기한 내용을 더듬으면서 읽고 푼다. 그럼에도 그림으로 보고 가만히 음미하면 점점 보이기 시작한다. 그 맛과 향을 맛보기 시작한다.

한자를 그림 언어로 만나면서 문득 문득 주님이 떠오른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주님 역시 그림 언어에 가까워 보인다. 하나님의 은유이신 주님은 그 눈빛, 몸짓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예 인구보다 더 빨리 줄어가는 게 아닐까? 하나님의 은유가, 하나님의 몸짓 언어가 더 빠르게 멸종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유이자, 하나님의 몸짓 언어였듯, 교회도 그리스도의 은유이자 몸짓 언어다. 그러나 현실은 참담하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악의 몸짓 언어가 범람한다.

듣지 못하면 말하기도 어렵다. 몸으로 말하지 못하는 신앙도 듣지 못하는 신앙이기 쉽다. 목사의 유창한 혀에서만 말씀을 듣는다면, 잘 연출하여 감정과 욕망을 간질이는 예배에서만 듣는다면, 기적과 성공에서만 듣는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듣는 말씀은 그렇게 유창하게 연출되고, 기적과 성공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출과 성공에서 소외당한 일상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언어가 아니게 된다. 그러니 평범함과 실패 속에서는 어찌 듣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주님을 따르던 수많은 이들은 권위 있는 말씀과 기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디에서 들었을까? 어디에서 어떻게 들었기에 온 몸짓이 다 하나님 말씀일 수 있었을까? 들에 핀 백합화와 하늘의 새에게서 들으셨다. 들에 양떼와 목자, 길과 밭에 뿌린 씨앗에서, 잃어버린 동전, 등불, 길에 버린 소금에서도 들으셨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마주한 어둠과 침묵 속에서 들으셨다. 그렇게 무미건조해 보이는 일상 도처에서 들으셨기에, 모든 몸짓으로 말씀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씨앗과 땅과 하늘 사이의 관계에서 있음을 보고, 절망을 향한 한 걸음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보고, 바람 속에서 생명의 날갯짓과 춤을 보는 진득한 시선, 한자와 서예에서 만난 예술적 시선이 필요하다. 씨앗, 동전, 등불, 양, 백합화와 새에게서 듣는 귀가 필요하다. 열린 눈과 귀가 몸짓 언어가 자라날 일상의 텃밭이다. 주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셔도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 그러나 눈먼 이들은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구했다. 그들은 결국 보고 주님을 따랐다. 들어 안다는 제자의 착각에서 벗어나, 보고 싶다는 눈먼 이의 갈증으로 깨어나야 한다. 눈먼 이의 깨달음과 갈증이 절실하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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