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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기사승인 2019.10.17  1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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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묵상하며

3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여 40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보다!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 43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시라지. 그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다.” 44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욕하였다.(마태복음 27:39~44/새번역)

“너는 왜 메시야를 조롱하고 죽였느냐?” 다시 오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대부분, 메시야인 줄 몰랐다고 답하겠죠. 어쩌면 억울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몰이해는 당연할 뿐더러 자연스럽기까지 합니다. 가까운 제자조차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본문 바로 앞에서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깨달은 제자가 없었습니다(눅18:33,34). 그러니 다른 이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보이지 않아서, 모르고 저지른 폭력은 면책의 권리가 있을까? 만일 무지를 근거로 면죄부를 준다면,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무수한 폭력은 어찌될까? 그런데 정말 몰라서만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안다고 착각한 탓도 있다. 죽여도 될 만큼 확실하게 안다는 교만도 있다. 모르는 줄 알았다면, 모를 수 있음을 알았다면 그럴 수 없다.

▲ Edith, “Ceasr Orrico”(2017)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마지막 절정은 재판이다.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는 큰 아들 드미트리, 모든 정황증거는 친부살해를 가리키고 있다. 13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그가 범인일 수밖에 없다는 검사의 논거다. 그러나 변호사는 동일한 증거를 가지고 범인이 아닐 수 있는 상황을 그려준다. 변호사는 자신도 검사도 다 소설을 쓰고 있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개연성과 가능성만 보여주는 정황증거로는 어떤 소설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럴 법하다는 정황이 아무리 많이 쌓여도, 그것으로 확증에 이를 수 없다. “한 명의 죄 없는 자를 벌하느니 열 명의 죄인을 풀어주라”(『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3』, p. 472)라며, 변호사는 누적된 개연성, 그것이 아무리 거대해도 그것만으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판결은 어떻게 되었을까? 읽고픈 이들을 위해 덮어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떤 판결이 나고 있는가? 그것이 더 중요하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죽음에 이르게 된 인간, 이를 하나의 비유로 볼 때 울림이 깊다. 경험에 기초한 판단에서 볼 때, 그럴 법해 보이면, 그 개연성만으로 확신하고 만다. 죄인이라고, 죽이라고, 신성모독이라고 판단한다. 그렇게 수많은 불경죄를 판단했고, 문둥병자를 추방했고, 그렇게 예수님을 죽였다. 몰라서가 아니라 선과 악을 너무 잘 알아서. 모르는 줄 몰라서. 오늘날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소수자 집단을 모욕하는 말을 수집한 내용 중에, 뜻밖의 표현이 있었다. “한국인 다 되었네요.” “희망을 가지세요.” 이것이 왜 모욕인가? 칭찬이나 위로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듣는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다. 이주민에게는 어떻게 들릴까? 한국국적이 있어도, 오래 살았어도 여전히 아직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말로 들릴 수 있다. 한국인처럼 되고 싶지 않아도, 한국인을 그대로 따라 해야 한국인인가? 장애인에게는 왜 모욕일까? 희망을 가지라는 말은, 당연히 희망이 없는 삶이라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 p. 8, 9).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차별이 보이느냐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차별은 당하는 쪽에서는 확연한데 가하는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있는 데 가해자가 없다. 피해자는 너무 아픈데, 가해자는 그럴 줄 몰랐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한다. 맞다. 몰랐고 그럴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자기 의도대로 해도 된다고 확신했다면? 너무 쉽게 확신했다, 다 안다고, 뻔하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그 확신이 눈을 멀게 한다. 얼마나 많은 잔혹한 폭력이 그렇게 잉태될까? 눈먼 의로움과 선량한 확신으로, 게다가 주님의 이름으로도.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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