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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 상상계와 상징계를 상실한 실재계의 ‘웃픈 웃음’

기사승인 2019.10.11  19: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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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학 목사의 인문학으로 영화읽기

1. 웃픈 웃음

영화의 첫 장면, 광대 화장하고 있는 아서(호아킨 피닉스 분)는 입술 화장을 하며 웃고 있다. 그러나 그 웃는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웃픈 웃음’이다. 그가 이런 웃음을 웃는 까닭은 삶이 힘들고, 세상이 그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동네 꼬마들도 그를 갖고 논다. 아서가 평생을 살아온 도시 고담과 사람들은 갈수록 미쳐가고 있다. 힘든 세상, 사람들은 돈도 없고, 일도 없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의미 없는 스탠드업 코미디 방송을 들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코미디언을 꿈꾸는 조커에게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아니 그를 둘러싼 세상이 해체된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상상계의 상실이, 상징계의 살해로 이어지는 것이다.

2. 상상계 상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자궁과 태아는 둘이면서 하나이다. 동시에 하나이면서 둘이다. 태아는 자신과 환경 사이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는 절대 평형의 상태에 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자기 충족성의 상태, 곧 ‘일차적 나르시시즘’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유아는 출생과 더불어 자궁과 분리된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분리 경험, 종교적으로는 ‘최초의 실낙원’을 경험한다. 이제 자궁을 떠난 유아는 자신을 돌봐주는 엄마와 아빠, 곧 나와 다른 타자에 의존해 살아야 한다. 인간의 운명은 거기서 결정된다. 대상관계 이론은 그것을 잘 설명해 준다.

태초의 자궁과 분리된 유아는 무의식 속에서 자궁 속의 ‘자기 충족성’의 판타지를 꿈꾼다. 그리고 이러한 판타지는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 다시금 어머니와 무차별적으로 재결합하려는 퇴행적 판타지이다. 물론 프로이트도 이를 ‘퇴행적 공생(symbiosis)의 판타지’라고 잘 분석했다. 둘째, 태아가 타자에 대한 의존성과 타자의 필요성을 거부하고, 완전한 자기 충족성의 세계를 상상해 보는 판타지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유아론적(solipsism) 전능성’의 판타지라고 부른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깨달음이다. 쉽지는 않다. 종교적 신비주의가 그 단계를 충족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단계에 가기가 쉽지 않다. 아무튼 이 둘 모두 일차적 나르시시즘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이차적 퇴행 현상이다. 삶은 자궁 회귀의 역사이니까!

문제는, 아서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통해 돌아갈 자궁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알 수 없다. 지금의 어머니는 자신의 친모가 아니며, 어릴 적에 입양되었으며, 계부로부터 학대 받을 때도 어머니는 지켜만 보고 있었던 정신질환자이다. 말로는 아서에게 항상 웃고 행복하라고, “해피”라고 부르지만, 아서의 자궁 속 자기 충족성이 아니라, 자궁 밖 자기 분열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라캉식으로 말하자면 아서는 상상계를 상실한 것이다.

<아서와 어머니, 페니 플렉>

따라서 아서가 항상 담배를 물고 있는 상상계적 퇴행은 상상계 상실을 예고하는 것이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항상 담배를 물고 있는 아서는 어머니와 있을때는 담배를 물고 있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어머니를 살해함으로 아서는 상상계를 삭제한다. 돌아갈 자궁이 없음을 깨달은 이에게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의 이름’, 곧 ‘상징계’이다. 그러나 아서는 아버지로 부터도 버림 받는다.

3. 상징계 살해

조커로 변한 아서의 상징계 살해, 곧 아버지 살해는 두 가지로 이어진다. 첫 번째는 상징적인 아버지였던 머레이(로버트 드 니로 분)이며 두 번째는 환상적 아버지인 토머스 웨인(브래트 컬렌 분)이다. 이 둘을 제거함으로 조커는 이제 자신 스스로가 상징계가 되었다. 아니 아버지를 상실한 고담 시민들이 조커를 아버지로, 상징계로 만들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조커는 유아론적 전능성의 판타지로 들어간 것이며 고담 시민들은 자신들의 전능한 신을 유아론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아서/조커의 두 상징적 아버지, 머레이와 토머스 웨인>

물론 머레이의 살해는 영화적으로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1979)의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로버트 드 니로 분)의 상징적 살해이다. 실패한 암살자가 하루아침에 영웅으로 추앙받는 <택시 드라이버>는 어처구니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 촛불이 불탔던 저 숭고한 광화문 광장에서 떠들고 있는 전광훈씨의 광란의 메시지에 “아멘”하고 있는 극우 개신교도들을 보라. 그들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전광훈이라는 개인의 이름 안에 갇혀 버렸다. 그 상징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모순이자, 삶의 아이러니이다.

또한 토머스 웨인의 살해는(비록, 조커를 추종하는 이가 살해했지만) 영화적으로는 베트맨의 탄생을 보여주지만, 올바른 아버지의 이름을 갖지 못한 이들이 아버지에 대해 갖는 저항의 분출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살해된 조커의 상징계는 지금 우리 문명이며, 지금 우리들의 아버지이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다. 조커는 흑과 백, 혹은 어둠과 빛의 상징계 모두를 살해한 것이다. 여기서 흑은 비클이며, 백은 웨인이다. 그러나 그렇게 선명하게 가를 수는 없다. 아버지의 이름에는 흑과 백이 모두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4. 실재계의 춤

아무튼 상상계를 상실하고, 상징계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어머니를 상실하고, 아버지를 잃어버리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그때 인간은 실재를 경험할까? 필자가 보기에 조커의 춤, 호아킨 피닉스의 그 절묘한 춤은 실재계의 춤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부족함이 없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2009)에서 어머니(김혜자 분)의 춤이 아들을 상상계(여기서는 어머니의 품)로 호출하는 춤이라면, 조커의 춤은 상상계(어머니)를 상실한 아들이, 상징계(아버지)마저 살해하고 추는 실재계의 춤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도 화장한 조커가 춤을 춘다. 그러나 그 춤은 ‘웃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의 실재계는 어떤가? 서초동에 나타난, 절대 권력인 검찰에 대한 개혁의 열망이 실재계의 등장인가? 아니면, 광화문에 나타난 대통령이라는 어버지의 이름을 탄핵하는 외침이 실재의 표출인가?

<아서에서 조커로 변한후, 조커의 실재계의 춤>

* 답?

종교가 프로이트로 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우상파괴’의 개념이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전능한 신이나 권위적 지도자에 대한 믿음의 뒤에는 인간 존재의 무력감이 작동하고 있고, 그 뿌리를 따라가 보면, 유아 시절의 무력감과 전능한 부모에 대한 믿음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개인의 ‘무의식적 욕구’나 ‘집단적 나르시시즘’을 충족시키기 위해 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다. 위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에 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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