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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게 전부 빛은 아니다

기사승인 2019.10.08  17: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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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강의』 10강 풀이

본 강의에는 한글, 한문시를 포함하여 4편이나 수록되었다. 한글, 한문 각 두 편씩이다. 1956년 11월 6일과 12일 이틀간의 기록을 담았다. 한문시는 『周易』의 내용을 옮겨 놓은 것이다. 물론 다석 나름대로 제목을 달리 붙여놓은 것도 있다.

지난 강의와 내용적으로 유사점이 많고 특히 빛보다는 어둠을 중시여기는 시각이 재차 강조되었다. 본 강의제목이 그래서 ‘밝은 게 정부 빛은 아니다’로 되어 있다. 직전 강의에 언급된 ‘신이지래’(神以之來)를 제목으로 긴 한글 시를 지었던 바, 그를 ‘나말슴’이라 달리 이름 붙였다.

< 1 >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이 ‘긋’이란 말이다. 다석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다석은 ‘긋’이란 말을 갖고 본 강의를 시작했다. 다석에게 긋은 ‘끝’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긋을 모른다고 했다. 어떻게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자신의 마지막을 알 수 있을까? 하지만 긋은 좀 더 깊은 차원을 지녔다. 인간의 생물학적 끝이 아니라 정신적인 끝을 말하는 까닭이다.

인간이 인격적이고 정신적 존재이기에 누구든지 사람은 자신의 처음보다 크게 되어 자기 인생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보다 큰 존재가 되어 삶(인생)을 끝맺으란 것이 바로 ‘긋’이 지닌 뜻이다. 우리 말 ‘끝’에 ㅌ받침이 붙은 것은 이 ‘긋’을 위해 삶의 싹을 티우고 터트리라는 의미로 보았다.

긋이 시작이라면 끝은 그 긋의 마지막이겠다. 그렇기에 인생은 누구게나 한 긋 밖에는 없는 셈이다. 이 긋을 갖고서 자신의 끝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사는 이유이겠다. 다석은 이 긋을 ‘나말슴’이라 풀었다. 이것은 앞 강의에서 보았듯이 神以之來의 우리 말 표현이다.

< 2 >

이제 다석은 ‘나말슴’을 갖고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여기서 ‘나’란 무엇을 일컫는 것인가? 예수의 ‘예’가 ‘이어이어’였듯이 나 또한 이어 이어온 ‘한 긋’이라 했다. 한 긋의 존재인 나는 끝을 봐야하기에 지속적으로 나가야만 한다. 처음보다 더 나아 질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인간이 달라지는 상태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좋게 달라지는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나쁘게 달라지는 ‘변질’이다. 인간사를 보면 후자의 경우가 적지 않다. 항시라도 누구일지라도 크게 유념할 일이다.

인간을 달리 만드는 이 긋은 마무리 감추려고 해도 드러나는 법이다. 늘 나가야하기에 그 끄트머리가 보일 수밖에 없다. 그 끄트머리가 바로 ‘나’다. 몸뚱이가 아니고 터져 나오는 ‘생각’이 나인 것이다. 생각의 끄트머리가 바로 우리들이다.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며 살라는 말이겠다.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을 나가게 하는 길은 생각밖에 없다. 생각의 끄트머리가 싹 나오듯 삐죽하게 나오려하기에 첫 시 제목을 ‘나말슴’이라 한 것이다. 이를 다석은 ‘긋말슴’, ‘생각말슴’이라고도 불렀다. 누가 뭐라 해도 생각이 있기에 ‘나’란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석이 본 강의에서 서양 철학자 데카르트를 많이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듯 전체적 안목 하에서 다석은 시를 풀어갔다.

< 3 >

‘이긋제긋 이제긋이오 l ㅓㅣ예 예긋이오니’,

여기서 ㅣ는 머리를 하늘 향해 둔 인간을 말한다. 天地人 삼재(三才) 중 인간을 뜻하는 것이 바로 ‘ㅣ’ 이다. 따라서 이(l)긋제긋은 하늘로 머리를 둔 존재, 즉 하늘의 끄트머리로 태어난 인간이란 뜻이겠다. 다석은 소리글자 한글을 뜻(상형)글자로 다시 풀었다. ‘긋’의 ‘그’를 하늘을 뜻하는 ‘ㄱ’ 밑에 땅을 뜻하는 가로 줄(ㅡ)하나를 보탠 것이라 했고 그 아래 있는 ‘ㅅ’을 세상에서 노니는 인간이라 본 것이다. 인간은 본래 하늘에서 온 생명이기에 하느님을 받들되 그 뜻을 세상에서 끝내 이룰 사명을 지녔다는 말이다.

이로써 사람은 하느님을 받드는 ‘긋’이 될 수 있다. 이 때 긋은 ‘제긋’, 곧 이제긋이 된다. 지금 여기서 하늘의 끄트머리가 싹을 티웠기에 말이다. 이 긋은 영원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다석이 ‘예수’를 이어 이어온 것. 곧 ‘예긋’을 지금 여기서 행했던 분(능력)이라 풀었던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이 ‘긋’이 지금 여기서만 드러난다는 의미에서 ‘예긋’이다.

‘고디고디 가온찌기 끗끗내내 디긋디긋’,

여기서 고디고디는 곧다는 의미이다. 가온찌기는 하늘(ㄱ)과 땅(ㄴ) 사이에서 곧게 한 점을 찍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天地와 같은 존재(人)로 여기는 것이다. 『天符經』에서 말하는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人中天地一)라는 자각이라 해도 뜻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일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 길을 가야한다. 그럴수록 머리를 위에 두고 곧게 서는 일이 중요하다. 머리 들어 하늘 바라보는 형상이 바로 ’ㄷ‘이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머리 들고 살라는 말이 ’디긋디긋‘이다.

’이긋이 첫긋맞긋야 인제 몰릅거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처음을 알고자 한다. 여기서 이긋이란 처음과 마지막 즉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래서 다석은 이긋이 첫긋이자 마지막 긋이라 하였다. 이긋을 알면 처음과 마지막 모두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이긋을 모르고 과거와 미래를 안다는 것은 사기꾼의 행태라 하겠다. 그렇기에 첫긋맞긋을 모른다고 해야 옳다.

다석은 인제를 ’ㅤㅡㅇㅤㅣㄴ제‘로 써야 한다고 말한다. 꼭지 없는 ’ ㅤㅡㅇ‘은 과거와 오늘을 머리에 인 상태를 형상화한 것으로서 아래 것은 알지만 자신을 낳은 위(上)는 알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꼭데기로 오르지 못하면 자신의 처음을 알 수 없다. 그것이 바로 ’ㅤㅡㅇㅤㅣㄴ제‘이다.

< 4 >

’이승에서 날 알려신이 몇몇 사ㄹㆍㅁ이라오‘,

여기서 다석은 세상에서 불려 진 이름을 대수롭지 않다고 말한다. 남에게 불려 지기 위한 것일 뿐 그 이름이 자신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자어 뜻을 좆아 이름 짓는 일도 무익하다 여겼다. 오히려 순수 우리글로 지으면 좋을 것이라 하였다.

세상에서 자기 이름 불러 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유명하다 한들 한계가 있다. 명함을 주고받으며 자신을 알리려 애쓰지만 ’긋‘을 모르면 소용없다. ’나‘를 알려고 한다면 ’긋‘을 반드시 긋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석 유영모(柳永謨)란 부모 지어 준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긋‘의 사람이기에 귀할 뿐이다.

’나란옛적 이름업서 내오직 나로 나란ㄷㆍ‘,

세상에 살면서 이름 불리는 것은 감옥서 수인번호 불리는 것과 다름없다. ’긋‘을 찾지 못하여 진짜 ’나‘를 모른 채 붙여진 번호처럼 이름 불리는 것에 만족하며 살 수 없는 노릇이다. 본디 이름이란 없는 것이다. 노자 『道德經』이 이를 말하지 않던가? 이 역시 서구 정통 기독교와 다른 생각을 전한다. 주지하듯 성서는 이름 짓는 일을 중히 여겼다. 아담과 하와에게 동식물의 이름 짓는 일을 맡긴 것이 그 시초다.

하지만 다석은 그와 달랐다. 이것은 빛보다 어둠을 좋아한 아시아적 사유와 맥이 닿는 일이겠다. 하느님에게로 이어진 한 끄트머리, ’긋‘을 아는 것, 그보다 좋은 일이 없다. 그것이 바로 참 ’나‘인 탓이다. 이것을 이룬 사람이 큰 행복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나라나 개인이나 모두 자신을 과대 포장하고 있으니 걱정스럽다.

’아ㅂㆍ의 아들일거고 속알실은 수렘직‘,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 족보를 자랑하며 심지어 거짓 가계도를 만들기도 했다. 대단한 집안 출신임을 강조할 목적에서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잘 데 없다. 제 아버지만 제대로 알면 그분이다. 속알은 덕(德)의 우리 식 표현이다.

다석은 이를 끄트머리라 불렀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삶을 밝혀주는 속알이다, 옛 사람들은 속알 밝히는 일을 일컬어 속알 실었다고 말했다. 속알은 이름이 없다. 그렇지만 이것을 갖고 자기 끄트머리를 드러내는 삶이야 말로 ’수렘직‘이다. 석가가 자신을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한 것도 바로 이 끄트러미를 드러냈기에 가능했다.

지금껏 내걸었던 이름모두를 내려놓고 제그슬 힘껏 부여잡아 하늘 아버지의 아들 되었기에 터진 소리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 이름을 잊고 가온찍기 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다. 종교는 이런 정신에 입각하여 반상(班常)제도를 철폐해야 옳다. 국가와 민족이란 것도 이런 식으로 해체되는 것이 마땅하다.

< 5 >

’데카르트 말을 비러 다시 생각해 보니‘,

다석의 사유와 데카르트의 ’코기토‘ 철학이 같을 리 없다. 하지만 생각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다석은 데카르트를 좋아했다. 이들에게 생각은 불꽃이었다. 생각은 사람을 나아가게 하는 하늘의 끝자락, 곧 단초였던 것이다. 나를 생각하니 나가 나올 뿐이다. 심지어 생각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念在神在)고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나가 어제의 나보다 의당 나아져야 사람이다.

’생각의 불이 나타나 내가 나 남 나가 나 남 생각으로‘,

생각의 불꽃으로 내가 조금씩  나아진다는 것은 자기만의 해탈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생각함으로 내가 여기(예)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세상을 더욱 좋게 만들기 위해서도 생각하는 나를 확신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나 남‘이라는 표현이다. ’내가 나다‘라는 뜻이겠다. ’나다‘라는 확신이 있어야 우리는 ’나라‘(국가, 세상)를 염려할 수 있다.

’옛잇다 나생각사리 잇다 업다 모름직‘,

예잇다는 여기 확실히 있다는 옛적 말이다. 생각하는 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명백히 있다는 말로 사용되었다. 데카르트 명제의 우리식 표현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上)의 유/무는 확신치 못할 지라도 우리를 나가도록 하는 ’긋‘, 생각의 불꽃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하자고 말했다.

< 6 >

’진난적히 그러ㅎㆍ고 그러ㅎㆍ이‘,

진난적은 역사적이라 말뜻이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니 앞으로의 길도 그리 될 것이란 말이다. ’긋‘을 찾아 나가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장래에도 다를 수 없다.

’물끄럼이 불끄러마 가온찌기 생각나다‘,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은 세상 속에서 생각의 불꽃을 통해 가온찍기의 삶을 살아내야만 한다. 생각의 활성화를 위해 다석은 새벽을 사랑했다. 앉아 생각(기도)하는 일좌(一座)의 삶을 택한 것이다. 자신을 ’생각하러 온 자‘로 여기면서 말이다.

’나타나 생각나다타 타나가온 물불풀‘,

이런 가온찍기는 세상 속에서 물 불 풀, 즉 묻고 불려 풀리는 생각의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풀이 물기 없는 풀이 죽듯이 죽음의 길이다. 그래서 다석은 고전을 통해서 이런 길을 걸어간 위인들을 오늘에 전했다. 그가 연경반을 평생 열었던 것도 진난적, 곧 역사의 궤적을 살피기 위함이다.

’나가만 ㅎ금 나갈 말이게 나간 만큼 나갈 말이지‘,

다석은 이 시구(詩句)를 갖고 자기 말의 결론을 삼고자 했다.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자꾸만 반복해서 ’나‘를 낳아가야 한다는 뜻이라 했다. ’나‘와 ’가‘를 합하면 ’마‘가 된다. 그래서 ’나가마란 말이 만들어졌다. 나가겠다는 것이다. 자신을 보낸 하늘에 닿을 만큼 커지라고 다석은 ‘ㅎ’을 덧붙여 놓았다. 하늘 향해 나간 그만큼 나란 존재는 조금씩 커져 간다. 나갈 말은 모두 생각에서 비롯한다. 생각에서 나온 말, 이것을 바로 계시라 했다. 생각이 나야 말이 터지는 까닭이다. 생각을 통해 나온 말은 나를 나가라고 밀어 낸다. 그래서 다석은 ‘나간만큼 나갈 말’을 자기 사유의 핵이라 여겼다.

‘나가는 금 아주 긔노코 나가는 말 미리 짜가진 나랄 누낳본고’,

자신이 나갈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해 놓고 그만큼 실천에 옮기는 삶을 개인과 국가 모두가 목적해야 옳다.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생각이 주는 힘에 의거하여 조금씩이라도 나가야 마땅하다. 하지만 나가는 일 그 자체는 가온찍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 금(線)이 무한에 이를 수 있다. 이런 금을 그어 놓은 분들이 성현들이고 그들의 말씀이다. 이들 말씀을 목표로 정하고 나가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겠다. 이 말씀을 아무도 본 적이 없다. 예수도 하느님을 본적이 없다 하였다. 오로지 말씀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내로란 집힌 긋이 ㄱㆍㅤㆍㄴ찌기 나가만’,

여기서 집이란 비워진 집. 즉 빈집을 말한다. 따라서 집힌 은 비워 내준다는 뜻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없는 자리(공간) 만들어 비집고 세상에 태어났다. 수차례 고비를 넘고 귀한 생명으로 태어 난 것이다. 비집고 비집어서 이곳까지 이르렀다.

불교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을 망망대해 바다에서 눈먼 거북이가 자기 목을 의지할 수 있는 구멍뚤린 널빤지를 만나는 확률로 설명했다. 유교의 경우 오늘의 ‘나’가 있기 위해 수 천만 명의 조상을 언급했다. 수십대에 이르는 그들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 때 그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다고 본 것이다. 기독교가 인간을 하느님 형상이라 부른 것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될 일이다. 사람 태어나는 일이 이처럼 어려운 일이기에 나를 낳는 가온찍기를 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 7 >

이어서 다석은 『周易』의 개물성무(個物成務)란 말을 풀어냈다. 주지하듯 주역은 변화의 책이다. 역(易)을 일컬어 개물성무, 곧 물건을 열어 그 역할을 완성시키자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물성(物性)을 밝혀 세상을 편안하고 좋게 만들기 위함이다. 물성을 파악하여 물건을 잘 연구하는 것이 과학의 세계, 모천하지도(冒天下之道)이다. 이런 역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불역(不易)이란 말이 있다. 변치 않는다는 것으로 진리를 일컫는 말이다.

또 교역(交易)이란 말도 있는데 이것은 자꾸 변한다는 뜻이다. 불역과 상대되는 말이다. 하지만 불역은 개물성무와 결코 무관치 않다. 세상이 좋고 편안하게 변화되지 못하기에 그럴수록 진리인 불역을 찾아야 한다. 개물성무가 지속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의심을 통해 불역을 찾고자 한 것이다.

옛 사람들은 이를 위해 가끔씩 신과 통(通)할 목적으로 점(占)을 치곤하였다. 오늘의 기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둥그런 세상, 누구도 홀로 슬프지 않는 덕(德)을 세상에 펼칠 목적에서였다. 그래서 나온 말이 시지덕원이신(蓍之德圓而神)이란 말이다. 길흉여민동환(吉凶輿民同患)이란 말도 이어졌다. 성인들이 세상 속 길흉을 백성들과 함께 겪는다는 뜻이다. 백성을 위한 우환의식을 누구보다 크게 소유한 자가 바로 ‘나갈 만큼 나간’, 가온찍기한 성인들이다. 이때 신이지래(神以之來)란 말이 성립한다. 신과 관계하고 그와 통하는 세상이 열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기도의 응답, 곧 神과 관계하여 앞으로 올 것(德)을 작정하여 믿으란 말이다. 또한 하느님과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을 옛 적 가르침과 비교하여 오늘을 다시 성찰(생각)하라고 했다. 지이장왕(知以藏往)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일들이 능하게 되면 세상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도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석은 ‘고왕금래 왕고내금‘(古往今來 往古來今)이란 말을 풀었다. 앞서 말한 새로운 세상이 ’이제‘가 되길 바라서이다. 금래(今來), 지금 오는 것을 일컬어 우리는 ’이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언제든 ’올‘ 또는 ’오는‘것을 뜻한다. 2019년 ’올‘해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고 있기에 말이다.

온 해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들이다. 하지만 ’올‘은 우리가 거듭 찾아야 할 시간이고 세상이다. 여기서 다석은 정신(생각)과 시간의 관계를 우리들에게 가르쳤다. ’이제‘를 사는 것이 ’올‘ 세상, ’올‘ 시간을 사는 것이란 깨침이다. ‘올’이 ‘이제’가 되려면 나갈 만큼 나가는 삶이 필요하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가온찍기’라 하였다.

< 8 >

마지막으로 다석은 ‘기하학’(幾何學)이란 한문 자작시를 소개하고 풀었다. 앞의 내용들과 어떤 연관성을 맺기에 그리 한 것이다.

‘천천흑동천(天天黑洞天), 어간유암물(於間有暗物) 만(萬)’,

여기서 천천은 하늘이 아니라 나날을 말한다. 매일 매일이 검은 하늘이란 말이다. 이것은 태양을 꺼라는 다석 사상의 요지를 환기시킨다. 대명천지 밝은 빛에 취하면 영원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이다. 밝기만 하면 궁극적인 것을 보지 못한다. 이런 마음을 비울 암물(暗物), 곧 어두운 것이 있음을 유념하라고 했다.

‘일일광명체(日日光明體), 형형색색체(形形色色體)’,

이런 빛의 세계 속에서는 온갖 것들이 자기를 들어낸다. 내 얼굴, 네 얼굴, 내목소리, 네 목소리로 세상이 가득 차 있다. 거듭말하지만 여기서 빛은 의식과 진배없다. 따라서 의식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다석은 빛 ‘양’(陽)자 속에 거짓이란 뜻이 담겼음을 명심하라 일렀다.

‘가롱문명연(假弄文明然), 체체접생면(體體接生面), 정견지비례(正見知非禮), 면면대월계(面面對越界)’,

자기 홀로 세상을 산다면 얼굴이 중요치 않다. 빛이 사라지면 잘난 얼굴도 소용없다. 남과 접해 살기에, 빛이 있기에 자신을 꾸미며 산다. 이것이 가롱(假弄)이다. 빛의 세상에 가롱 아닌 것이 없다. 이런 세상에서 예절이란 자기 몸뚱아리 하나 건사하는 것쯤으로 축소되고 만다. 하지만 면과 면이 접해 면이 사라지면 선이 나오는 바, 이 선을 넘나드는 것이 대월계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선선교원점(線線交原點) 점점상무례(點點相無例)’,

실상 점(点)은 없다. 점을 연결하면 선이 되나 그것이 차지하는 면적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점에서 선이 나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선이 붙어 면(面)이 된다는 것도 동일하다. 면이 합쳐져 체(體)가 된다는 것도 그렇다. 이 모든 것은 편의상 그리 말한 것일 뿐 실제가 아니다. 점과 선의 정체는 누구도 모른다,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무한한 선상에서 점이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없는 탓이다. 이 모든 것들은 넘나들 수 있을 뿐 홀로 고립될 수 없다.

‘문복접부득(問卜占不得), 현현묵묵게(顯顯默默契)’,

위 아래로 한 선이 내려지면 사람(ㅣ)이 된다. 여기다 점을 찍으면 ㅏ가 되고 아 소리 내는 것이 ‘나’가 된다. ㅏ 점(占)의 실마리를 입(口)으로 말하는 것이 점(占)이다. 거듭 점을 들여다보고 점을 모아서 대답하는 행위를 점친다한다. 하지만 다석은 이 점(占)을 생각의 불꽃으로 여겼다. 문복(問卜)이란 자기 점을 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역시 ‘모를 뿐’이다. 생각의 시작은 오직 무한한 하늘, 대답 없는 하늘(顯顯黙黙界)에 있다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다.

‘유물체물래(有物體物來), 불가유물체(不可有物體), 은현칭귀신(隱見稱鬼神), 성불종가체(成佛從可體)’,

모든 물건에도 저마다 고유한 가치가 내재되었다. 그것을 다석은 ‘머사니’라고 했다. 인간의 ‘머사니’는 바로 정신이겠다. 이것은 그 물체를 떠나지 못한다. 이것 없으면 물건(인간)의 본질이 사라지는 탓이다. 사람의 경우 이 ‘머사니’가 몸속에서 활동할 때 비로소 활기 있게 된다. 정신이 사람 몸속으로 돌(들)아가는 것을 귀신(鬼神)이라 할 것이다. 이렇듯 ‘머사니’가 사람 몸속에 드나드는 것을 일컬어 다석은 자기 말로 ‘제긋’이라했다. 이것이 제 몸 속에 들어와 끝까지 봉사하는 것이 언성진실(言成眞實), 일명 성(誠), 무망체(無妄體)이다.

다석이 앞서 면선점(面線點)이 본래 없다고 말한 것도 이들이 모든 것을 다 이루면서 자기 흔적을 남기지 않은 탓이다. 이것이 다석의 기하학이다. 무망체란 이를 일컫는 말이겠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도 이처럼 무망한 상태가 되어야 옳다.

‘심심매실신’(心心每失神), ‘자공점심례’(玆供點心禮), ‘일월등비광’(日月燈非光), ‘필요적광체’(必要寂光體)‘,

앞서말한 신이지래를 통해 얻은 지혜, ’가온찍기‘에서 가운데 점(ㆍ)을 잃으면 인간은 실신, 곧 하느님을 잊은 존재로 살게된다. 영원과 단절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태양이 우리들의 등불이 아닌 것을 수차 강조했다. 그것만 알면 인간 삶은 허영에 취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점심(點心)이란 마음에 점을 살린다는 뜻이다. 하루 한끼를 아주 간단하게 먹는 일식도 여기서 비롯했다. 우리가 세상에  한 긋으로 태어났고 이를 완성하려면 점을 찍어야만 된다. 앞서 말햇듯이 이 점(點)은 본래 없었다. 이 점을 찍는 것(가온찍기)이 자신을 낳는 일이자 세상을 낫게 하는 길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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