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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과 봉사1: 너그럽게 헌금하기(신 26:1-11; 고후 9:6-15; 눅 12:13-21)

기사승인 2019.10.04  15:5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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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절 여섯째 주일(10월6일)-세계성만찬주일

1. 우리가 내는 헌금은 어떻게 쓰이는가?

우리들이 주일날 내는 헌금은 어떻게 쓰일까요? 우리 교회의 경우, 헌금은 교회의 재정을 위해 수고하도록 부름 받아 섬기는 이들인 집사(διάκονος, 디아코노스)님들에 의해, 교회 안팎의 여러 용도로 사용됩니다. 가령 말씀봉사자를 위한 사례비(고전 9:4-14)와 교육비, 전도비 그리고 구제비(행 4:32-37)와 선교비(빌 4:15-19), 예배당 유지비용과 그 밖에 여러 용도로 지출됩니다. 또한 다른 교회나 기관, 단체, 선교사를 돕기 위한 비용으로도 사용됩니다(행 11:27-30; 롬 15:26; 고전 16:1-4). 그런데 여기 집사라는 말이 디아코노스죠? 봉사(διακονία)라는 ‘디아코니아’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영원한 다섯 가지 사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다섯 가지는 첫째 예배(λειτουργια, 레이투르기아), 둘째 전도(κήρυγμα, 케리그마), 케리그마는 말씀선포라고도 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전도가 되겠죠? 셋째 봉사(διακονία, 디아코니아), 넷째 교육(διδαχή, 디다케), 다섯째 친교(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입니다. 여기서 세 번째 사명인 봉사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가장 실천적인 섬김’입니다. 따라서 디아코니아는 교회 현장에서 구제, 선교, 섬김, 헌신, 공궤(供饋) 곧, 음식 대접 등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의 국수나눔’ 잔치를 통해 이웃 주민들을 공궤하죠?

아무튼 초대교회는 이러한 디아코니아(봉사)를 위해 디아코노스(봉사자)를 세워 섬김에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적 책임과 선교적 사명으로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섬기며 봉사하라고 합니다(신 24:17-21). 사회구제의 책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 디아코니아, 섬김과 봉사입니다.

이러한 섬김과 봉사는 우리의 손과 발이 합니다. 반면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또 복음사역을 위해 힘쓰는 기관을 물질로 돕는 일, 이웃교회를 섬기는 일 등 우리의 손과 발이 하지 않지만, 우리가 봉헌하는 물질로 섬기는 일도 디아코니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에 봉헌하는 예물도 디아코니아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삶은 궁극적으로 섬김과 봉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섬겨,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희생하며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섬김과 봉사를 실천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세계성만찬주일인데, 예수께서 자신을 온전히 세상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셨던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섬김과 봉사에 관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연보(헌금)에 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은 토지소산의 맏물을 하나님의 제단 앞에 놓으라고 하며, 사도 바울은 서신서인 고린도후서 말씀에서 연보를 할 때, 억지로 하지 말고 즐겨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물질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고 천국을 사모하라고 훈계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세 본문 말씀을 통해 물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져야 하며, 또한 헌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주님께서 명하신 섬김과 봉사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먼저 구약의 말씀입니다. 본문인 신명기 26장 말씀은 ‘십일조 규례’와 ‘첫 열매’에 대한 규정입니다.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첫째, 소산물을 얻어 그 첫 열매를 감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의 구약 본문 말씀이죠. 그리고 둘째,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26장 12-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의 뒷부분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 말씀을 볼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첫 열매)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신 26:1-4)

첫 열매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땅의 첫 소산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땅이 없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볼까요? 땅을 받은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5-9)

사실 히브리인들은 유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아람 땅에 속한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입니다. 이후 아들 이삭을 지나, 손자 야곱의 때에,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하란)에 있는 삼촌 라반의 집에 머물며 가족을 일구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스스로를 아브라함처럼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기근으로 인하여 아곱은 아들 요셉의 때에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 가나안 땅에 살다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들어가 살게 된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소수자(minority)였습니다.

<하란지도와 하란의 전통가옥>

사실 유랑인이나, 마이너리티로 산다는 것은 힘겨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마이너리티란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도 보호 받지 못하고, 바깥으로 내몰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바로 왕은 이들을 핍박합니다. 따라서 유랑하던 아람 사람들은 그들과 같은 떠돌이들과 하나가 되어 애굽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땅을 향했고, 마침내 그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지어 얻은 그 소산물을, 아니 처음 거둔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린 후, 그것을 함께 나누어 먹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 이 나눔에는, 이들 가운데 거주하는 나그네도 포함이 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신 26:10-11)

여기서 ‘거류하는 객(the aliens)’이 중요합니다. 공동번역은 ‘떠돌이’로 번역합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방랑하는 아람 사람, 곧 땅이 없었던 사람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거둔 열매는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고 그것을 나그네, 곧 떠돌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오늘 우리의 섬김과 봉사가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3. 너그럽게 연보(헌금)함은

사도 바울은 우리의 섬김과 봉사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인 연보에 관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인 고린도후서 9장과 바로 앞장인 8장은, 함께 연결하여 별명을 붙여보면 ‘연보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로 말씀드리면, ‘헌금장’, 더 정확히는 ‘선교헌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선교헌금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형제들을 파송합니다. 미리 작정하여 구제금, 곧 선교헌금을 거두어 놓아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갔을 때 선교헌금이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고후 9:3-5).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러한 연보에 관한 바울의 생각입니다. 들어볼까요?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첫째 연보의 정신은 억지로 하지 않고, 즐겨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연보는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힘든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선교헌금을 하되,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착한 일은 영원토록 있는 의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결국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후 9:8-9)

연보는 하는 이들에게 복이 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보는 너그럽게 연보해야 합니다.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풍성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뿌릴 씨와 먹을 빵을 농부에게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뿌릴 씨를 마련해 주시고 그것을 몇 갑절로 늘려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뿌린 자선의 열매입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부요하게 되어 아낌없이 남을 도울 수 있게 될 것이며 우리를 통해서 그 선물이 전달될 때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애써 거두는 의연금(義捐金, 자선이나 공익을 위하여 내는 돈)은 성도들의 가난을 덜어 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고후 9:10-12)

바울은 연보함을 봉사의 직무로 이야기 합니다. 즉 우리가 헌금하는 것이 바로 디아코니아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이러한 선교헌금이 예루살렘 교회 등 이웃 교회 성도들의 가난을 덜어 주며, 결국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3-15)

4.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기

우리가 가진 물질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산을 가지고 분쟁하는 형제에게,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물질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고, 천국을 사모하라고 훈계하시는 내용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눅 12:13-14)

유대인들은 형이 아버지로부터 상속을 물려받으면, 동생은 자기의 몫을 따로 떼어 받아 독립합니다. 따라서 지금 동생의 요구는 정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다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재물에 관한 탐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사람의 생명은 물질의 소유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6-19)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을 더 많이, 더 높이 쌓아두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가진 재화를 늘려가는 재미로, 아파트 평수를 넓혀가는 것을 목표로, 고급 차량, 혹은 고급 핸드백을 마련하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

▲ 제임스 티소트,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894) ⓒGetty Image

그렇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지 못하는 인생의 결국이 어떻게 되는지 예수님은 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5. 우리가 내는 헌금을 어떻게 써야 할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부요한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없어질 재물에 부요한 것이 좋은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잘 살려면,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있어야 한다!” 돈이 중요하죠. 돈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영혼을 도로 가져가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눈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회에서 한반도평화연구원 이창현 사무국장은 ‘40대는 한국교회에 외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글에서 한국 교회의 위기를 진단하며 40대 기독교 신앙인으로 이렇게 제안합니다.

“40대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몇 가지 제언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 저출산, 맞벌이, 양육의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가 장소를 제공하고 반값 학원비를 실천해주면 안될까? 다음세대가 문제라면 청소년들이 쉬고 교제할 수 있는 청소년 스터디 카페를 만들 수는 없을까? 둘째로,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가 처한 문제에 대해 다각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유연한 구조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교회에 공론의 장을 만들고, 다양한 제안을 수용하는 창구가 필요하다. 현재의 권위, 리더십을 모두 해체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작은 분야에서 자율성(재정/권한)을 주는 구조,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 격려하는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지금은 하나를 제안하고 싶어도 교회에서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막히는 구조다. 마지막으로 결국 본질의 문제에 교회가 나서주길 기대한다. 이 시대의 현실에 뿌리박으면서도, 여러 우려 속에도 정면 돌파하는 비전을 보여주는 교회를 우리는 기대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분간하기 어렵고, 악은 디테일마다 살아있으며, 삶은 더 파편화되고, 사람들은 더 목말라하고 있다. 분주한 달력행사에 매이지 말고, 이 시대를 관통하는 본질적인 메시지를 교회가 주었으면 좋겠다.”

저는 이 제안에 관해 첫째 우리 교회 건물을 이 지역을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 될지를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교회 공동체의 의사소통 문제인데, 수직적인 소통구조가 아니라, 수평적인 소통구조가 필요합니다(물론 우리 교회는 너무 수평적이라 수직적인 위계도 필요할 때가 있긴 합니다만! ^^). 셋째 이 시대를 읽고 이 지역과 사회에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섬기고 봉사하며 봉헌하는 것입니다.

서두에 우리가 내는 헌금이 어떻게 쓰이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내는 헌금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이 물음을 갖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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