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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짓을 다듬는 예술”

기사승인 2019.09.27  18: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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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채劉寀의 「세 마리의 물고기」

빛바랜 비단 위에 먹 빛 스쳐간 간결한 몇 개의 선, 그것만으로 물고기 세 마리의 고요한 유영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작은 인기척만으로도 순식간에 숨어버릴 것만 같다. 유채劉寀의 「세 마리의 물고기」,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어가다가 만난 이 작품 때문에 오히려 동양화의 멋과 맛에 반해버렸다.

▲ 유채劉寀의 「세 마리의 물고기」 1066-85년경, 화첩, 비단에 먹물과 물감, 22.2 x 22.8 cm, 필라델피아 미술관

감탄이 절로 나온 이유를 알 것 같다. 고대 미술에서 중세 미술로 이어지는 긴 흐름 속에서 페이지를 넘기다가 만났기 때문이다. 그냥 이 작품을 만났다면 이 만큼 감동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고중세 서양 미술의 흐름과 대비되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이 더 도드라졌을 것이다.

서양 미술에도 간결한 선으로 대상의 본질을 표현한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여러 번의 붓질로 풍성한 색채와 입체감을 담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유화와 달리 화선지나 비단에 먹으로 그리는 손길에게는 긴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유화처럼 끝없이 고쳐 그리는 덧칠의 기회가 없다. 그나마 몇 번이라도 덧칠이 가능한 채색화와는 달리 수묵화는 순간만이 주어진다. 순간의 붓놀림으로 물고기의 유영을, 꽃과 난과 대나무 그리고 그 모두를 감싼 여백을 표현한다. 몇 번의 붓놀림으로 충분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선을 그렸을까?

서양화와 동양화 재료비를 비교하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유화나 아크릴화가 물감, 캔버스 등 재료비가 더 비싸니, 작품 가격도 당연히 더 높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화나 서예 작가는 반론을 제기한다. 한국화나 붓글씨는 한 작품을 위해 무수히 많은 작품을 그리고 또 그린다고. 어느 서예가는 보통 한 작품을 위해 백 점 이상을 쓴다고 한다. 한 작품이 화선지 한 장과 약간의 먹으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스갯소리 같은 이야기였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차이가 드러난다. 유화나 아크릴화는 원하는 모습이 될 때까지 하나의 캔버스 위에 색과 형을 꾸미고 또 꾸민다. 그러나 한국화나 서예는 일순간에 원하는 선과 그릴 수 있는 몸짓을 다듬고 또 다듬는다. 이는 작은 차이가 아니다. 중대한 차이다.

손짓, 몸짓이 마음과 함께 갈 수 있을 만큼 다듬고 또 다듬는다. 아니 마음이 멈추고 몸이 붓과 하나가 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작품은 몸과 마음을 닦은 결실이 한 순간에 드러난 결과다. 작가의 무수한 붓놀림은 수행이 아닐까? 몸과 마음의 간격을 줄이는 닦음이자, 앞서가는 마음, 헛된 욕망을 비워내고 비워내는 닦음으로 보인다.

몸보다 앞서 가면 쉬 지치고, 맘보다 앞서 가면 허무해진다. 붓과 몸과 마음이 함께 춤추게 하려는 반복은 예술을 넘어 수행과 기도로 향한다. 삶도 영성도 사랑보다, 하나님보다 앞서 가면 죽음을 향한 질주가 아닌가. 그러니 붓도, 영도 함께 갈 수 있도록 닦고 또 닦을 수밖에.

화가의 그런 몸짓에서 영원성과 일상성이 교차한다. 삶은 유화처럼 덧칠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을 다시 꾸밀 수도, 반복할 수도 없다. 리허설은 없다. 오직 이 순간뿐이다. 그 순간 자체를 3판 2승으로 재도전할 수 없다. 단판이다. 돌이킬 수 없는 그 일회성은 그러므로 절대적이다. 한 순간만이 지닌 절대성을 오롯이 맞아들여야 하는 몸짓을 화가는 닦고 또 닦는다.

단 한 순간, 한 번의 몸짓은 그저 한 번이 아니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랑하는 이의 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 그 간결한 몸짓에 말할 수 없는 모든 것이 담기듯.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과 몸짓이 응축 되어있다. 한 순간에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모든 것이 담겨있다. 한 번의 붓질에도 그렇게 삶이 담긴다. 마음과 뜻, 기쁨과 슬픔, 아름다움과 추함, 수많은 실패가 쌓이고 쌓여 먹빛을 깊게 한다. 무한히 쌓인 몸짓들이 한 순간에 영원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두 번 만날 수 없는 오늘, 단 한 번의 몸짓을 매 순간 연습하는 삶, 그 역시 기도고, 예배고, 영성이 아닌가. 아니 그것이야 말로 영성이어야 한다. 누군가는 매순간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힘을 줄 수도 있다. 누군가는 매순간 불안도 집착도 비우려 놓아줄 수도 있다. 또한 누군가는 매순간 신비로부터 솟아오른 사랑에 자신을 맡기며 그저 사랑의 통로가 되도록 비켜 설 수도 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죽음의 순간, 죽음 같은 순간을 한 번의 몸짓으로 맞이한다. 살아온 모든 삶을 담은 마지막 몸짓으로. 살아온 삶이 붓이 되어 그려낼 것이다. 마음의 붓질 한번 한번으로 지금도 그 순간을 향하고 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기도하고, 중간이나 마칠 때 다시 기도한다면, 그 기도로도 다듬을 수 있다. 삶의 태도, 영성의 결, 마음의 방향을 다듬을 수 있다.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이후에 하루의 매순간을 맞이할 마음을 품고 또 품는다면 어떨까? 난을 치고 또 치듯, 마음의 선을 긋고 또 긋는 것이다. 마음에 결을 새기고 또 새기는 것이다. ‘저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과 함께 사랑으로 맞이하는 마음을 새기고 또 새긴다면, 어떨까?  어떤 상황, 어떤 사람, 어떤 조건을 만나도 주님을 향하는 마음의 닻이 묵직하게 자리 잡지 않겠는가. 붓질을 다듬듯, 마음길을 다듬는 기도는 영적 예술이다.

▲ 문봉선의 「설죽도 雪竹圖」, 한지에 수묵 145×367cm(2014)

동양화, 한국화에서 여백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세 마리의 물고기」에서 여백은 물로 가득 차있다. 문봉선의 「설죽도 雪竹圖」에서 하얀 여백은 숲이자 설경이자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 서양화 전통과 다르게 표현하는 여백은 그 방식만이 아니라 방향에서도 깊은 차이를 보여준다.

텅빈 하늘, 자욱한 안개를 하얗게 칠하는 유화와 달리, 한국화는 그대로 둔다. 모든 존재를 낳고 존재하게 하는 “없음”(無)을 표현하는 탁월한 방법, 그대로 두는 비움을 택한다. 풍경이든 인물이든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돋보이게 하려는 비움이 아니다. 깊은 경지에 이른 한국화는 오히려 그 여백을 보여주기 위해 무엇인가를 그린다. 사진에서 중심대상 외에는 들러리로 만들어 버리는 아웃포커스의 배타적 폭력성과도 다르다.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없음을 표현하려는 그 정취가 깊고 멋스럽다. 충분히 없는 공간, 맑게 비운 여백이 그 속에 그린 존재를 살아나게 한다. 여기에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표현이 더 생생히 살아온다. 하나님을 “없이 계심”으로 이름하기 때문이다. 없이 계셔서 모든 존재가 있게 하시는 분, 있음뿐 아니라 없음도 가능하게 하는 신비하신 분, 그 정취가 한국화 여백에서 엿보인다.

비록 구정물일지라도 수면의 흔들림이 없어질 때, 하늘이 비친다. 텅 빈 여백이 그대로 깃든다. 모든 일상사, 몸짓과 말투도 흔들림이 고요해질 때 탁한 그대로에 하나님이 비칠 수 있을까? 욕망과 두려움의 구정물이어도 고요해질 수 있다면, 그대로 하나님이 비춰올 수 있지 않을까?

프랭크 루박 선교사는 기도한다. “오늘 제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저를 대신하여 말씀해주소서! 제 마음 안에서 걸으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하옵소서! 제 가슴 안에서 타오르소서! 제 눈을 다스리소서! 오늘 하루 종일 제 안에 거하시고 제 안에서 사랑하소서!”(프랭크 루박의 기도일기, 40)

함께 계신 하나님, 그 향기로운 현존이 그대로 비칠 수 있도록 가만히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기도한다. 그 시선을 닦고 또 닦는다. 무슨 일을 하던, 누구를 바라보던 그 시선으로 바라보며 맑게 비출 수 있게. 어떤 일이든, 어떤 사람이든 함께 계신 분을 바라보면 비칠 수밖에 없다. 마치 수묵화의 모든 대상이 여백을 드러내주듯이 일도, 사람도, 바라보는 시선도 다 “없이 계심”을 드러내줄 수 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편46:10) 이 말씀에서 ‘가만히’는 그러므로 얼음, 땡의 얼음이 아닐 수 있다. 활동하는 삶 가운데, 모든 일과 모든 사람 속에서 하나님 됨을 알아보는 고요한 시선이자 기도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일을 기획하고 진행시키면서도 가만히, 고요히 하나님 깃드실 여백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활동하는 기도”이고 “기도 어린 활동”이다. 그것은 함께 계신 “없이 계심”에 깨어 그대로 비춰내려는 자기비움이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역시 잘 모르는 그 무엇을 표현하는 티를 지울 수 없다. 무슨 말인지 몸으로 써보고 써보고 또 써보는 수밖에, 몸짓을 다듬은 일상의 기도로.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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