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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율과 하늘의 법칙

기사승인 2019.09.24  17:3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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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강의』 9강 풀이

오늘 강의는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내용을 다석의 시각에서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1956년 11월 6일 자 <다석일지>에 수록된 말씀을 다시 풀어냈다. 특히 본문 끝 절(17절)의 말씀, ‘선을 향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받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아홉 번째 강의의 주제가 되었다.

익숙한 성서 내용이기에 다른 강의들보다 비교적 쉽게 이해되나 말씀의 깊이와 무게는 다른 어느 글에 못 지 않다. 17절의 말씀 한 구절을 이렇듯 심오하게 파헤친 신학자, 성서학자를 필자는 여태껏 보지 못했다.

< 1 >

다석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이 말씀을 보통의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라 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으나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두 눈 씻고 보아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들 현실인 상대세계에서 인간은 누구나 인과율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탓이다.

주지하듯 이 시대의 학문은 모두 인과율에 근거해 있다. 이용할 가치가 있어야 연구하고 돈을 벌 수 있을 때 개발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인문학을 홀대하는 대학, 돈되는 상담학이 신학의 저부가 되어버린 신학교 현실도 이런 선상에 있다.

이렇듯 우리들 사는 세계는 예외 없이 인과율이 지배하고 있다. 공부하는 목적도 출세(爲人之學)를 위함이다. 자신을 갈고 닦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가치는 실종된 지 오래이다.

글쓰기(논문) 역시 학문실적으로 의미를 지닐 뿐 자기 삶과는 무관해졌다. 이런 삶을 사는 수준에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 받으라’는 말은 정신 나간 소리일 것이다. 이런 일이 하늘의 뜻이라 설교해도 누구도 믿지 않는다. 상대세계가 납득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까닭이다. 그렇기에 이런 말을 선뜻 전하는 베드로를 다석은 하늘 뜻을 전하는 사람이라 여겼다.

여기서 다석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악을 행하다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에서 ‘낫다’란 우리말에 주목하여 자신의 풀이를 심화시켰다. ‘낫다’란 나아질 것이란 말뜻을 지녔다. 인과율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것을 믿으며 산다. 결과만 바라보고 사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런 삶은 우리를 속이기 십상이다. 나아질 것이라 믿었으나 그것이 허상일 때가 많았던 탓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낫다’란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낫다’를 진실로 믿는 사람이 있다. 정말 세상이 나아질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 안에 사나 세상 밖의 사람이다. 위(上)로 오를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다.

좋은 장사꾼은 밑지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장사꾼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밑지는 일을 으레 당하는 것이 장사꾼의 삶이다.

마찬가지로 신앙 역시 죽어야 사는 길을 아는 일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을 믿는 것이 종교다. 자신의 바탈을 태워 새로운 나를 낳는 것이 진정으로 ‘나아지는 길’인 까닭이다.

‘나’를 낳고 또 새로운 ‘나’를 낳은 것이 성서가 말하는 ‘낫다’의 본뜻이겠다. 이는 위(上)로 오른 사람, 영원과 소통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할 수 있다. 내가 점점 더 위로 오를 때, 다석의 말로 ‘나가마’, 즉 더 잘될 수 있는 법이다.

나를 낳는다는 말은 정신세계가 커졌다는 뜻이고 이런 상태를 얻는 것이 신앙이다. 이런 사람만이 남 앞에 서서 설교할 수 있다. 앞서 배웠듯이 증거(證)란 신(信)과 해(解)와 행(行)을 거친 최후의 언어(말)인 탓이다.

다석은 베드로의 설교를 이런 차원에서 이해했다. 이점에서 이 시대의 뭇 설교와 설법은 많이 잘못되었다. 자신이 믿지도 못하는 말을 남발하고 이해 없이 믿기를 강요하며 자신도 행할 수없는 이야기를 쏟아 놓는 탓이다.

그렇기에 상대세계를 벗고 궁극적 ‘하나’를 얻고자 비우는 과정을 지속해야 옳다. 이렇듯 ‘나’를 새로 낳고자 거듭 애쓸 때 비로소 상대세계를 떠날 수 있고 세상을 한 치라도 낫게 만들 수 있다. 다석은 기독교와 불교 사상이 본래대로 싹을 냈다면 마르크스 類의 세속 이념은 생겨날 이유가 없었다고 보았다. 낫게 할 것을 낫게 못한 탓에 나아지고자 하는 뭇 이념과 생각이 다투듯 발생된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베드로는 ‘선을 행하다가 오히려 고난을 받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상대세계가 지배하는 인과율을 끊어낼 목적에서이다. 더 나은 세상이 이로부터 비롯함을 믿었던 까닭이다. 하느님 말씀을 청종하는 자에게 복 내린다는 신명기 사관에 대한 욥의 저항과도 뜻이 같다. 예수를 열심히 믿었는데 남보다 못한 삶의 열매가 맺혔다 해서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것은 예수를 팔았던 가롯 유다의 정신을 좆는 일이라 했다.

여기서 다석은 미신(迷信)이란 말을 파지하여 그 본뜻을 찾았다. 쌀 ‘미’(未)와 갈 ‘주’(走)의 복합어가 바로 미신 ‘미’(迷)자이다. 즉 먹는 것을 따라 사른 삶의 도가 바로 미신이란 것이다.

먹어야 산다는 생각, 요즘 말로 경제 우선주의는 종교를 미신되게 하고 아편되게 한다. 빵, 경제 이상의 것, 곧 뜻이 있다는 것이 종교이고 하느님이 있다는 반증이다. 자신의 ‘참’(진리)을 찾고자 한다면 의당 자신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자기 속 알을 찾아야 진리에 이를 수 있다. 오직 한분 하느님에게로 오르고자 애쓰는 ‘나’, 이 나를 낳는 것이 삶의 목적인 바 그래야 세상이 낫게 변할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글(그리스도)이 서게 하는 일이겠다.

‘나’는 결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을 거듭 낳으라고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육체적 자살은 불가하나 정신적 자살은 지속되어야 한다. 내가 나를 낳아가는 과정이 바로 정신적 자살인 탓이다. 여기서 복음과 은혜의 본뜻을 마주할 수 있다.

이런 죽음의 자리에서 ‘왜’란 말은 가당치 않다. 오가는 세월 속에서 자신을 새롭게 낳는 일이기에 말이다. 다석은 이를 ‘가온찍기’라 하였다. 이에 대한 풀이는 다른 강의를 통해 후술 될 것이다.

< 2 >

다석은 ‘직이’, ‘지기’, ‘직히’ 그리고 ‘하남직’이란 우리글을 갖고서 다시 영혼의 공부를 시작했다. 앞선 내용을 한글공부를 통해 반복할 목적에서다. 우선 ‘직이’는 무엇을 지키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대문을 지키는 문지기를 생각할 수 있겠다. 이 ‘직이’는 그래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지기’라 써도 좋다.

아무리 다른 일을 하고 싶어도 그리 할 수 없다는 의미겠다. 자기 하는 일이 자연스레 그래지기를 바라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원해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다석은 ‘직히’를 다시 말했다. 이것은 ‘직’에 ‘히’가 붙어 그렇게 되도록 하는 작용을 적시 한다.

자신들 원(願)대로 되지 않기에 하느님 뜻을 작동시켜 지킬 것을 지켜 내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을 낳는 일이 하늘의 뜻이란 것이다. 자신을 지켜 할 일을 하게 하는 이가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남직’이다. 즉 하느님이 누구라도 남(타자)에게 그 할 일을 하도록 지켜준다는 뜻이겠다. 따라서 사람 또한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남직’의 삶을 살아야 마땅하다.

우리들 인간은 누구든지 ‘나남직’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났다. 출생 시부터 자신보다 큰 존재가 함께 했기에 하늘로 오르는 ‘직히’의 삶을 살아야 할 존재인 것이다. 자신도 남이 스스로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사랑이다. ‘나남직’한 세상의 부정은 성서를 거부하고 사랑을 부정하는 죄악일 수밖에 없다. 자기를 지키는 길이 남을 지키는 ‘남직’이 된다. 남이 지켜져야 자신도 지켜진다는 것 역시 옳다. 너와 내가 함께 하나가 되는 세상, 그 세상이 나아진 세상이다.

내 자식, 네 부모란 말이 더 이상 성립치 않는다. 모두가 큰 하나의 뜻을 좆는 존재인 까닭이다. 이런 차원에서 결국 ‘나’라는 것은 하나(절대)와 같이 되는 데에 존재이유가 있다. 그래서 다석은 ‘나’를 ‘하-ㄴ 아’로 파지하여 나가 곧 하나인 것을 역설했다. ‘하남직’한 세상에서 네/내 몫 구분하며 사는 것은 모순이다.

그렇기에 다석은 베드로서 말씀을 속 알의 말이라 했다. 상대세계를 끊고 더 나은 세상을 살아보자는 베드로의 애끊는 절규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데 누가 우리를 해(害)치겠는가?’를 반문했다.

하지만 생명외경을 말한 자 신학자 알버트 슈바이쩌는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바위덩이를 놓아 방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는 현실을 간파했다. 다석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이런 방해가 결코 해롭지 않다고 말할 뿐이다.

설령 해롭게 할(될)지라도 그것이 영원의 자리에서 해될 것 없다고 여기라 충고했다. 자신(나)을 낳아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그뿐 인 것이다. 해를 입고 아니고의 문제보다 중한 것이 자신을 낳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록’하면 즉 모두가 하나를 그리워하게 되면 누구도 해 받을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모두가 하나 되기에 해(害)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에 말이다.

< 3 >

이어지는 말씀은 ‘정의를 위해 고난 받으면 복이 있다. 그렇기에 그들 위협을 무서워 말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고난이 생길 것이나 두렵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서 동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해를 당할 지라도 그것이 필시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것임을 믿으라 했다.

실제로 다석은 베드로가 말했던 우리들 안에 있는 ‘소망의 이유’(벧전 3:15)를 이것, 즉 우리가 나아질 것, 새로운 나를 낳을 것이란 확신에서 찾았다. 내가 자꾸만 반복적으로 나아질 것이란 믿음이 바로 소망의 이유란 것이다. 여기서 다석은 다른 곳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동학의 13자 본주(本呪),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와 강령주(降靈呪)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을 언급했다.

다석 자신이 찾은 하느님과의 변별성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 주문을 외우면 전쟁터에서 죽지 않는다고 가르쳤던 동학이 다석에게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그의 제자 함석헌도 동학을 비합리적이라 해서 중히 다루지 않았다.

베드로의 말과 비교할 때 이 주문이 너무도 통속적인 신앙 양태로 여겨진 것이다. 하지만 동학에 대한 다석의 이해가 부족한 면도 인정해야 옳다. 동학의 철학적 측면이 여기에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 논문에서 동학과 다석사상을 『天符經』을 매개로 일치시킨 논문을 썼던 적이 있다. 이들 두 사상을 함께 수렴시킬 수 있다는 것을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여하튼 다석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고난(죽음)의 길인 것을 믿었다. 그 과정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자신을 낳는 길임을 확신한 것이다. 이 길로 들어 선 사람은 무서울 것이 없을 것이다. 나를 낳는 일이 이 길에서 일어나기에 결코 흔들릴 수 없고 흔들려서도 안 된다.

< 4 >

그럼에도 무엇인가 충족치 않다고 여겨 다석은 다시금 베드로 전서 3장 15절 이하에 실린 ‘소망의 이유’에 재차 답하고자 했다.

“여러분 속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가 있거든 항시 대답할 것을 준비하되 언제든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 선한 양심을 갖고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들의 선한 행위를 욕하고 헐뜯는 사람들이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서구 신학자들은 이 본문에서 신학의 방법론-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에 방점을 두었으나 다석은 여기서 신학의 핵심, 신앙의 본질을 찾았다. 자신을 해하는 악인들을 하느님이 심판할 것이란 확신이다. 모세가 원수 갚는 일을 자기자신의 몫으로 정한 것과 크게 달라진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나를 나아가게 하고 세상을 나아지게 하는 일인데 원수를 자기 마음대로 되갚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다석은 하느님이 자신을 낳았기에 내가 하느님을 찾아 알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자기가 없으면 하느님을 찾을 수 없기에 말이다.

하느님 주신 영원한 생명을 내가 갖고 있기에 내 눈을 열어 하느님을 보아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욕설이 난무하고 거짓이 횡행하겠으나 하느님만 찾고 바라는 것이 우리들 할 일이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우리가 하느님을 낳는 것이라 하였다. 대단한 역설이지만 다석은 이를 평생에 걸쳐 깨달은 진리라 여겼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쌓아 놓은 것을 되갚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 절로 되지는 않겠으나 그런 사람이 되기를 애써 노력할 일이다. 그래서 ‘직이’라는 말이 다시 중요하다. 곧을 직(直) 자를 쓰는 직이(直伊)는 ‘그래지기’, ‘그럼직’, ‘하남직’의 뜻을 내포한다. 한자음이 ‘지킨다’는 뜻을 지닌 우리 글로 풀어진 것이다.

이에 잇대어 ‘신이지래’(神以知來)란 말도 설명했다. ‘신을 갖고 온 것을 안다’는 말뜻이다. 온 것을 하는 주체는 의당 자기 자신이겠다. 자신이 신으로부터 왔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이 ‘본(本)’이 된다. 자기를 중심삼아 생각한다는 뜻이다. 점점 나아지기 위하여 이리 저리 애쓰며 사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다. 

‘지이장왕’(知以藏往)이란 말도 풀었다. 과거에 감추어진 지식을 깨내려고 부단히 애쓴다는 뜻을 담았다. 앎이 넘치게 풍부해지기를 바라는 상태이겠다. 여기서 핵심은 神과 교통(交通)하여 아는 지식이다. 그래야 지식은 세상을 낳고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

배운 것을 갖고서 거듭 자신을 낳고 나아가서 神이 일러준 것을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누군가가 배운 것을 감춰(축적해) 놓았기에 가능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神에 대한 이야기를 거듭 쌓아 놓았다. 주역이 바로 그와 같은 책이고 성서가 그렇지 아니할까? 이곳에서 神을 만나 자신을 낳고 ‘그럼직’, ‘하남직’한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들 몫이자 삶의 과제이다.

< 5 >

다석은 자신을 난파된 배의 키를 잡고 죽는 순간까지 상황을 기록하는 선장으로 비유했다. 자신도 끝까지 후대 사람들을 위해 깨친 바를 적어 놓겠다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앎(知)을 통해 신을 만나 자신을 낳고 세상을 낫게 만드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를 낳고 또 나아서, 바탈을 태워 마침내 자신도 벗겨내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그렇기에 다석은 자신의 임종시 ‘왜’라는 질문을 삼가 줄 것을 부탁했다. ‘왜 죽어’란 말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신을 낳고 나아 완전히 자신을 벗는 것이 죽음인 까닭이다. 이런 죽음만이 세상을 낫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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