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교회냐 카페냐

기사승인 2019.09.22  16:37:32

공유
default_news_ad1

- 삶을 얻을 율례(겔 20:10-12)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나와서 광야에 이르게 하고 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 12 또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노라

오늘은 교회와 우리의 신앙에 대한 간략한 생각을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최근 기독교가 무엇인지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 우리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입니다.

저는 말씀이 바로 서 있고, 말씀을 바르게 읽어가야만 교회가 하나님 안에서 바로 서게 되고, 말씀 안에서 바로 선 교회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이끄신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구약신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 한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이런 신앙이 있기 때문에 구약신학을 더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더 올바른 말씀을 전해드리려는 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요즘 저희 교회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기보다 교회를 나가는 성도님들이 더 늘어났고, 목회자들끼리 하는 이야기로 10년 안에 자체 건물이 있는 교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교회 합병이 일어날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도님들 뿐만 아니라 목회자도 줄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까 목사님들을 만나면 지금 시대에 교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내용이 대화의 단골 소재가 됩니다. 최근에는 유튜브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이야기를 하다보면, 대게 성도님들과 목회자 사이의 감정적, 감성적 교류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서로 마음을 열고 하나로 뭉치면 적은 인원의 교회라 할지라도 튼튼하게 설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이런 하나됨에서 출발하여 교회 운영의 방향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는 이점에서부터 생각을 넓혀보려고 합니다.

교회의 모임과 세상의 모임

교회가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마음을 합하고 하나로 뭉쳐진 공동체라고 생각한다면, 교회가 사회에 있는 수많은 친목모임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친목 모임들은 ‘친목’이 핵심이고 우리는 ‘신앙’이 핵심이기에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는 어느새 카페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양이 되었다. ⓒGetty Image

그렇다면 취미활동을 중심에 놓고 있는 친목 모임들과 교회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신앙’이라는 무언가를 중심으로 모였고, 그들은 ‘취미’라는 무언가를 중심으로 모여 있습니다. 주일에 열심히 바이크를 타는 사람들이나 낚시를 가는 사람들이나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자신들의 모임과 모이는 이유만 다를 뿐, 큰 차이가 없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그저 종교라는 취미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모임활동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여함으로 마음에 평안을 누린다고 말하지만, 주말에 교회 안 가고 취미 활동에 하루를 투자하는 일이 오히려 신체에 건강을 주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날려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취미 활동으로는 복을 못 받지만, 교회를 다니면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 하지만 많은 성도님들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받는 복’은 ‘물질적 복’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취미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명함도 내밀지 못할 이야기입니다. 교회 안다니고 차라리 돈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삶이 물질적인 충만함을 누리는 삶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또 이야기합니다. 취미는 죽음 이후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지만, 교회 다니면 천국이 보장된다. 물론 천국에 대한 소망은 우리의 중요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100세 시대라 불리는 이 시대에, 특히나 젊은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라는 주제가 크게 와닿는 주제가 아닙니다.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큰 의미를 주진 못합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 13절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말했듯이,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지 아닐지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 판단과 결정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에 관한 결정권도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은혜를 간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난 교회 다니니까 구원 확정, 넌 교회 안다니니까 지옥 확정”이라고 말하는 행위는 하나님만이 갖고 계신 구원의 결정권을 자신이 가진 것처럼 여기는 태도이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결정 사항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는 신성모독 행위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나오고, 교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모여야 할 이유가 점점 없어지는 듯 합니다. 굳이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주는 평안과 위로는 우리를 다시 혼란과 괴로움에 빠지게 하는 뭔가 부족한 평안과 위로이지만 교회에서 주는 평안과 위로는 참된 평안과 위로이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나타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교회에서밖에 얻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참된 삶

맞습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점입니다. ‘참된’ 평안과 위로는 하나님으로 밖에 얻지 못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에스겔 본문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삶을 얻을’ 법도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당시 에스겔의 선포는 지금 우리의 상황과는 조금 다릅니다. 에스겔에 나타난 연대에 따르면,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기원전 587년은 아니지만,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함락되었고, 일부의 유대인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상황입니다.

다윗 왕조의 붕괴와 유다의 멸망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큰 변곡점이 되었고, 자신들의 삶이 무너졌다고 느끼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시점에 선포된 ‘삶’에 대한 말씀은 분명 우리가 느끼는 ‘삶’의 의미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살아감’의 의미보다 더욱 처참하고 절박한 심정 속에서의 ‘살아감’입니다.

지금의 우리가 이들과 똑같은 심정의 ‘살아감’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나라의 안정, 평화, 그 안에서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아간다는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지금 우리에게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삶’도 이들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법도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법도를 저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참된 삶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바벨론에 함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에스겔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삶은 우리가 말씀을 바르게 ‘지키며 살아갈’ 때에 주어집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수’를 얻었다. ‘참된 평화’를 이미 얻었다. 우리는 분명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 성도님들 간에 교제를 나눌 때에 어떠한 평안을 얻습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교회 밖을 나가서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길면 몇 일을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불안과 걱정과 근심에 쌓인 삶을 살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말과는 다르게 영원한 생명수를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이점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든 점일지도 모릅니다. 구원받고 평안을 누린다는 사람들이 실상 세상 속에서 전혀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고, 때로는 너무도 거칠고 폭력적인 언행들을 일삼는 모습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구원받은 사람들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더 나아가 교회에 다닐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생각하는 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개념이 애매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는 또 죄를 범한다. 그렇기에 교회 와서 또 회개하면 된다’, ‘구원은 영적인 것이며 죽음 이후 천국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은 전혀 상관 없다’, ‘구원은 행위와 별개이기 때문에 삶에서의 선한 행위와 구원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본래 구원이란 죄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그렇기에 끝없이 죽음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지만, 성경은 이에 이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이 보여주신대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다른 말 같지만, 모두 같은 말입니다.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점 자체가 기쁜 소식이지만, 영원한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점도 기쁜 소식이 됩니다. 오늘 에스겔이 선포한 말도 우리가 영원한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참된 삶, 참된 평안, 참된 안정은 우리가 참되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바르고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참된 삶이 주어집니다.

사람들 속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에스겔은 ‘삶을 얻을 법도’를 말하면서 그 앞에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 준행하면’, ‘그들’도 아니고 ‘너희’도 아니고 굳이 인류 전체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담’을 사용합니다.

이는 특정한 몇몇만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저는 여기에 또 한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 혼자만 잘 지킨다고 끝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법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사람들 간의 관계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때로 이 점을 잊어버립니다. 그냥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군계일학처럼 나만 고고하게 살아가면 바르게 살고 있다고 여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만 바르게 사는 건 정말로 바르게 사는게 아닙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게 바른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다는 것은 함께 잘 살아가라는 뜻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교회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고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말씀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서로의 교제를 통해 함께 잘 살아갈 힘을 주고 서로를 위로하며 독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힘을 얻은 우리들은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잘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세상 속에서 낮아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런 삶을 산다는게 너무 힘들어 보이긴 합니다. 세상에서 왠지 나만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 같아서 불공평해보이기도 하고 어려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도 살면서 느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악하게 대했을 때, 우리가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뭔가 마음에 찝찝함이 계속 남습니다. 상대방이 워낙 악하게 해서 어느정도 응수한 경우야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뭔가 악한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계속 찝찝합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상대방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선하게 대했을 때는 그 사람의 악함으로 인해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어도 나의 행동에 대해 찝찝함이 없습니다. 자신의 선한 대처에 왠지 뿌듯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선한 삶을 사는 일은 운동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할 때는 힘들지만, 점점 익숙해지면 힘들지 않습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 중에서 누구의 건강이 더 좋을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삶, 쉽게 말해서 선하게 사는 삶은 우리의 삶을 참된 삶으로 이끕니다. 참된 평안과 안정으로 이끕니다.

교회는 이러한 삶을 이끌어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아가기에 참된 삶을 누리는, 참된 평안을 누리는 성도님들을 이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점이 교회가 친목 동호회와 다른 점입니다. 친목 동호회는 모여서 즐기고 흩어지면 끝이지만, 교회는 교회에서의 모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삶을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에 교회는 참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세상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심으로 하나님 주시는 참된 삶을 살아가시고, 참된 교회를 이루어 가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참된 평안과 기쁨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