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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동체의 선택: 적은 무리여!(신 30:1-5; 골 1:3-14; 눅 12:22-34)

기사승인 2019.09.20  1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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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절 넷째 주일(9월22일)

1. 한 공동체의 선택

지난주 말씀은 한 인간의 타락으로 시작된 인류의 범죄에 관한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을 선택하시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영원한 ‘단 한분’이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재(先在)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my day)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공동번역은 이렇게 번역했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오늘 세 본문 말씀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 공동체’를 택하시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공동체는 구약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이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적은 무리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적고 연약한 무리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그들에게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2:31).”라고 말씀하십니다.

2.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먼저 구약의 말씀을 볼까요? 본문 말씀은 모세가 출애굽 2세대와 가나안 건너편 모압 평지에서 언약을 갱신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당시 출애굽 2세대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이스라엘 후손들과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과의 언약 갱신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차 가나안 땅에 입국하여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하도록 그들의 자유의지에 호소합니다. 핵심은 하나님께 돌아와, 생명과 복을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 30:1-4)

이제 출애굽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전, 모세는 장래의 일을 이야기 합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각 나라로 쫓겨 가거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그들이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다시 모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창조와 타락, 심판과 회개를 통한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바벨론 포로 시기와 이후 수많은 강대국들에 의해 짓밟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강대국에 의한 민족의 비극은 하나님을 따르지 못한 것,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 것에 있기 때문에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다시 재창조, 곧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신 30:5)

이렇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끝까지 선택하시어 구원의 새역사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새언약을 각 사람의 마음 밭에 새기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3)

그리고 이러한 새언약은 지난주 말씀과 같이 선재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한 민족의 선택에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3.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따라서 오늘 서신서 본문인 골로새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곧 기독론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가장 그리스도 중심적인 말씀이 바로 골로새서 말씀입니다. 골로새서와 짝이 되는 에베소서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이름을 붙인다면, 골로새서는 ‘교회의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교리적인 부분(1~2장)과 실천적인 부분(3~4장)으로 나눠지는데, 그리스도께서 만물 중에서 가장 먼저 나셨고,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것을 선포합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서 보호 받으며 그 안에서 온전하게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9b-14)

한사람으로 인한 타락, 혹은 한 공동체로부터 시작된 인류 타락의 역사를 이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함을 통해, 흑암의 권세를 물리치고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는 말씀입니다. 곧,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죄사함을 주시고,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예수 안에서 믿음을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복음 진리의 말씀을 잘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3-6)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한 사람의 수고가 있습니다. 바로 에바브라입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를 세운 귀한 사역자입니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소아시아와 지중해 지역의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교회를 세우며, 특별히 에베소 지역을 복음을 위한 전초 기지로 삼았습니다. 이때 에바브라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사도 바울에게서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고, 제자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고향인 골로새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또한 인근지역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복음을 전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사도 바울은 에바브라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에바브라에게서 들었던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을 듣고, 기뻐하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골 1:7-9a)

한 사람 에바브라의 신실함이 성령 안에서 골로새 교인들로 하여금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실하고 사랑의 공동체인 골로새 교회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이단 사상(골 2:4)이 있었으며, 세상 철학을 추구하며(골 2:8) 유대교 율법을 중시하는 율법주의자들(골 2:11-15)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천사숭배(골 2:18)와 금욕주의를 실천하였습니다. 특별히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골 2:16).

사실 먹고 마시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생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로이트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이것을 ‘자기보존 본능’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 보존, 자기 주장, 자신의 확장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본존하기 위해서는 하부구조인 의식주의 문제가 먼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먹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이야기해 본다면 ‘경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자는 어떻게 정치를 해야 좋으냐는 제후의 질문에 먼저 배불리 먹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물론, 단지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하다면 인간은 금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배를 불린 후에, 교육을 통해 인간됨의 틀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철학자 헤겔도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를 찾아라. 그리하면 천국이 너에게 더해지리라!” 그만큼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제가 중요합니다.

4. 다만 그의 나라를 구하라!

복음서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먹고 마시는 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눅 12:22-23)

그리고 까마귀와 백합화, 들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눅 12:24-28a)

까마귀와 백합화, 들풀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 곧 먹고 마시는 문제에 관해 잘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눅 12:28b-30)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단 하나입니다.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2:31).”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먹고 마시는 모든 문제들이 자동으로 해결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강대국에 의해 포로 살이를 하고, 흩어져 쫓겨간 모든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끝까지 선택하시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그러나 그 나라를 사모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 먹고 사는 문제가 닥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사랑의 아들의 나라를 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도 우리는 자의적인 선악 판단으로 오만의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진정으로 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2-33)

‘적은 무리여(μικρὸν ποίμνιον)’라고 말씀하십니다. ‘미크론 포이므니온’은 힘과 수, 소유나 신체적인 역량에 있어서 작다는 뜻입니다. 양과 같이 돌보는 목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배낭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놀랍지 않나요? 가진 것이라고는 별로 없는 이들이,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에바브로와 같이,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창조 방법입니다. 적은 무리를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하나님 나라입니까? 이 세상의 권력과 욕망과 오만의 바벨탑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잘 아시고, 이렇게 지적하십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지금 여러분들의 보물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우리를 선택하시어 새 날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천로역정’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예술평론과 문화비평을 비롯한 다양한 저술로 주목받는 작가이자 역사가인 리베카 솔닛이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는 환경·반핵·인권운동에 열렬히 동참한 활동가이기도 한 리베카 솔닛은 걷기 예찬론자입니다. 『걷기의 인문학』 (반비, 2017)이라는 책도 썼습니다. 아무튼 리베카 솔닛이 말하는 걷기란 ‘이 세계를 좀 더 높고, 먼 곳으로 보내는 일’, 즉 ‘진보(進步)’를 뜻합니다.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

사실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은 인종과 남녀의 차별, 성차별,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 오늘도 걷고 있습니다. 이러한 걷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새 희망의 역사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걷기는 느립니다. 그러나 솔릿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느리기 때문이다. 마음도 두 발과 비슷한 속도(시속 5킬로미터 이하)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생각이 맞다면, 현대인의 삶이 움직이는 속도는 생각의 속도, 생각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빠르다.”

느리지만 중요한 것은 옳은 일을 위해 걷고 또 걷는 것입니다. 오늘도 새로운 역사를 위해 걷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적은 무리들입니다. 좁은 길로 가는 이들입니다. 때로는 길이 힘들고 험해서 지칩니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솔닛의 말은 새역사를 창조하려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힘이 됩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인 걷기를 멈추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바느질>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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