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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심(放心)이 안심(安心)이다

기사승인 2019.09.10  18: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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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강의』 8강 풀이

이 강의에는 『다석 일지』 1956년 11월 6일, 12일, 13일에 썼던 세편의 한글 시(詩)에 대한 풀이가 담겼다. 한글을 천문(天文)이라 여긴 다석의 생각이 맘껏 표출된 대단히 흥미로운 강의라 하겠다. 유입된 서구신학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다석 고유한 신학이 펼쳐졌다.

철학자 이기상이 다석의 사상을 “태양(빛)을 꺼라”는 한마디 말로 정리했었는데 8강의 내용이 바로 이런 주장의 근거이자 배경이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언급되겠으나 ‘빛’은 서구 신학에 있어 핵심적인 상징이자 은유이다. 그것이 하느님이자 예수, 곧 어둠을 소멸시키는 주체라 보는 까닭이다.

기독교 서구는 성서가 말하는 빛을 어둠과 적대하는 실체로 여겼으나 다석은 오히려 어둠을 선호했다. 어둠 속에서 더 큰 실재, 하느님을 온전히 만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유교가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을 말했고 불교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설(說)한 것처럼 다석 또한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있음이 바로 없음이고 無가 온갖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점에서 다석은 기독교 서구가 성서가 말하는 ‘세상의 빛’, 그 의미를 왜곡했다고 보았다. 다석에게 빛은 누구도 볼 수 없는 無였던 것이다.

본 강의에서 다석은 이런 주장의 근거를 잘 밝혀주었다.

< 1 >

첫 번째 한글 시는 한 줄로 쓰였으나 아주 긴 풀이를 요청하는 중요한 내용을 담았다.

“빛드러 숨길 막지 말고 숨길로 드러가는 빛을 고디 보오”.

이 짧은 시에서 다석은 앞서 말한 빛(光)의 의미를 전혀 달리 해석했다. 젊은 시절 물리학도였던 다석의 관찰력이 작동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소리글자인 한글을 자유자재로 풀어 뜻글자로 만드는 나름 말놀이(장난)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

우선 ‘빛드러’를 다석은 두 의미로 풀었다. 하나는 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비뚤어’가 되고 뜻으로는 ‘빛 들어 간다’는 의미겠다. 위 시에서 ‘빛드러’는 비뚤어로 풀어졌다.

비뚤어지면 숨길이 막혀진다는 것이다. 숨길이 막히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목숨 길은 언제든 바르게 가야만 하는 것이다. 비뚤어진 길을 잘 피해가야 삶이 완성된다.

잘 피하려면 언제라도 숨길을 잊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숨길, 곧 자기 생명이 달린 그 길만을 곧게(고이)바라봐야 한다. 이 길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빛이다.

이것이 바로 ‘빛드러’의 참뜻이겠다. 하지만 숨길로 들어가는 빛은 밝지 않고 대단히 희미하여 마치 없는 듯하다. 그렇기에 이 빛을 고디 곧장 보라(貞觀)고 했다.

이 빛을 보지 못하면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존재이다. 그렇기에 살아서도 죽은 자 있고 죽어서도 산자가 있는 법이다. 다석은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을 세상이 좋아 할 이치 없다고 말한다. 그들에겐 자신의 말이 맛없는 소리일 뿐이기에 말이다. 그럼에도 다석은 이 말뜻을 아는데 그치지 않고 익혀 살아내고자 거듭 이야기했다.

ⓒ에큐메니안

< 2 >

그렇다면 이런 가르침이 어디서 비롯했을까? 말했듯이 다석에게 빛은 無와 같았다. 인간이 도무지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빛을 보고 안다고들 말하며 산다. 이 강의에서 다석은 제자 함석헌의 예를 들며 인간의 무지를 깨우쳐 주었다.

사람들이 빛을 봤다는 것은 실상 제자 함석헌의 얼굴을 본 것이다. 1초에 지구를 7바퀴 반을 도는 그 빠른 빛을 봤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빛의 방사(放射)로 인하여 구체적 대상을 보는 것뿐이다. 그를 좋고/나쁨, 귀하고/천함, 아름답고/못생김 등 가치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일상사이다. 이점에서 빛은 종종 의식과 동격처럼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러면서 이런 세상을 일컬어 대명천지(大明天地)라 하며, 이를 전부인줄 알고 살고 있다. 물론 ‘밝음’이 좋기는 할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색(色)의 세계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 세계만 알면 더 깊고 소중한 것, 정신(영혼)과의 대화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영원히 사는 것의 의미가 실종되는 것이다.

밝은 대낮만 좋아하면 인생을 잘못 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석은 ‘빛드렀다’를 ‘비뚤었다’로 풀어 읽은 것이다. 밝은 날이 우주 신비와의 교감을 오히려 방해할 수도 있다. 빚이 사라져야 오묘한 우주가 통 채로 들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양을 꺼라’는 말이 생겼다.

대낮의 허영을 벗기란 말이겠고 인간 의식의 한계를 여실히 보라는 뜻일 것이다. 인간이 살 숨길은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드러난다. 이것이 다석의 한 줄 시, ‘빛드러 숨길 막지 말고 숨길로 숨는 길로 들어가라’는 본뜻이다.

< 3 >

다석의 말장난(遊戱)은 계속 이어진다. ‘빛’과 유사한 언어 ‘빚’ 그리고 ‘빗’을 사용하여 앞서 말한 내용을 부언하였다. ㅁ, ㅂ, ㅍ처럼 ㅅ, ㅈ, ㅊ의 변화를 맘껏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고유한 삼재론(三才論)이 모음에서 뿐 아니라 자음변화 속에서도 역할 하였을 보여준다.

다석은 ‘빛드러’, 즉 비뚤어 가는 빛을 ‘빚’이라 풀었다. 빚은 부채인 바, 자기 할 바를 못해 남에게 부담지우는 것을 뜻한다. 사람노릇 못해 남에게 책망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빚’은 동시에 ‘빚다’, ‘빚어내다’란 뜻도 지녔다. 무엇을 만든다는 말이겠다. 여기서는 비뚤어진 상태로 빚는(빚어진) 세상을 적시한다. 밝은 대낮에 허영으로 못된 것을 거듭 빚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빗’은 흩으러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하게 만드는 빗질을 연상 할 수 있다. 대낮에 비뚤게 빚은 것들을 가려내는 작업이겠다. 성서의 예언자들이 바로 이런 빗질을 하는 존재들이다. 대낮의 빛을 가리고 비뚤게 된 것을 가지런히 하는 빗질을 통해서만 인간은 자신의 숨길을 옳게 찾을 수 있다.

다석에게 있어 우리글 ‘ㅅ’은 생명의 약동을 뜻한다. 여기서 다석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란 성서(마5:13-16)의 말뜻을 전혀 달리 풀어냈다. 지금껏 빛은 자기를 세상에 들어내라는 말로 이해되었다. 맘껏 세상에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자랑해도 좋다는 언술이었다.

하지만 다석은 이런 해석이 사람을 비뚤어지게 만든다고 보았다. 삐뚤게 빚어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식이 주객도식의 구조에서 자유 할 수 없는 탓이다.

하지만 예수가 말한 ‘빛’은 결코 이런 빛이 아니다. 이쁜(미운) 얼굴을 보고 이쁘(밉)다고 말하는 그런 빛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란 말이다.

다석도 이런 ‘빛’ 맛을 아직 충분히 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 난 것은 이 맛을 얻고 찾기 위함이다. 앞서 말한 ㅅ, ㅈ, ㅊ의 변화가 삶, 잚, 참, 즉 ‘삶’은 죽어야(‘잠’) ‘참’이 될 것이라 가르치고 있다. 단연코 세상에 ‘빚’없는 사람은 없다. 이 빚을 벗겨내고 아득한 숨길을 찾아나서는 것이 사람 사는 이유이자 목적이리라.

< 4 >

두 번째 한글 시는 “글 그리울밖에”이다. 다석의 예수 이해가 잘 들어나 있는 유명한 시이다. 이 시는 그가 새벽녘에 꾼 꿈 내용을 사색하여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글은 말 그대로 글이자 그리스도이다. 글을 그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글은 결국 그리스도를 그리워하는 데까지 진척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다석은 모음 석자 ㅣ, ㅓ, ㅣ를 갖고서 예수를 이해했다. 우리는 보통 지금 여기를 ‘예’라 한다. 위로부터 내려 내려서 지금 여기까지 이른 존재, 그 끝자락의 한 존재가 바로 ‘나’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처럼 영원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온 존재이다. 위 세 모음들 ‘이어이’가 합해져 ‘예’가 되었고 그 ‘예’는 우리 인간을 다시 위(上), 곧 하늘로 이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예’자에 대한 다석의 유희이다.

반면 예수의 ‘수’를 능력이라 풀었다. 우리말에 ‘어떤 뾰족한 수가 있다‘는 표현이 있다. 이 경우 ‘수’는 할 수 있다는 의미겠다. 따라서 ’예수‘는 지금 여기서 다시 하늘로 오를 수 있는 능력자란 뜻이 된다. 하늘로부터 이 땅에 왔으나 다시 하늘로 오른(를) 존재가 예수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그리할 존재로 태어난 탓이다. 어느 옛 신학자 역시 ’神이 인간이 된 것은 인간을 神으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 5 >

이어서 다석은 ‘몸성히, 맘 놓이 바탈ᄐᆞㅣ히’, 이 세 개념을 갖고서 위(上), 곧 하늘 오르는 길을 설명한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든지 우선 몸이 건강해야 만사가 편한법이다. 따라서 다석을 몸을 부정하는 금욕주의자 혹은 영지주의자라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몸이 성해야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강조한 까닭이다.

여기서 ‘맘놓이’를 다석은 한자로 방심(放心)이라 적었다. 방심은 조심성 없는 상태가 아니다. 소를 부릴 때 소 고삐를 당기듯 자기 마음을 조심스레 붙잡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런 방심은 안심(安心)으로 이어진다. 마음이 안심되는 것이다.

다석은 이를 ‘맘놓이’라 했다. 이것은 마음을 비우는 일, 진리(곧은 말씀)를 담기 위해 자신 속을 비우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비로소 위로 오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바탈ᄐᆞㅣ히’가 바로 그것이다.

바탈은 본래 하늘로부터 받은 ‘성’(性)의 순수 우리말이다. 위로부터 ‘받’아서 ‘할’ 것을 지녔다는 뜻을 담았다. ‘받할’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바탈’이 된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바탈을 온전히 지켜 이루는 일이 우리들 과제란 말이다.

예수는 이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 십자가가 바로 ‘바탈ᄐᆞㅣ히’인 것이다. 여기서 ‘ᄐᆞㅣ’는 ᄐᆞ에 ㅣ를 더한 것으로 바탈을 태운다란 뜻을 지녔다. 하늘로부터 나올 때 갖고 나온 것, 성(바탈)을 세상에서 다 불살라 태워 온전히 새로운 ‘나’를 만들라는 것이다.

이런 존재를 일컬어 다석은 예수라 했다. 하느님 아들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이 바로 예수인 것이다. 예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바탈 ᄐᆞㅣ히’ 이다. 여기서 ‘히’는 지속하다, 끝까지 밀어 올린다란 뜻을 지녔다. 단박에 절로 되지 않고 백사천난(白死千難)의 과정 속에서 이룰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 6 >

지금껏  l, ㅓ, ㅣ, 석자 곧 예수를 설명했다. 이 시의 두 번째 줄에는 ‘숨쉬는 한목숨 히어늘-긔륵’이라 쓰여 있다. 사람은 숨을 쉬며 사는 존재인바, 자신의 목을 통해서 이일을 지속한다. 그래서 목숨이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목의 숨만 쉬자고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말숨’도 쉬고 ‘얼숨’도 쉬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숨 쉬는 목을 갖고서 인간은 ㅁ, ㅂ, ㅍ, 즉 므름 부름 푸름의 삶을 살아내야만 한다. 그렇기에 다석은 ‘히어늘’, 영원까지 이어질 목숨인 것을 강조했다. 하느님을 머리에 이고(이마) 사는 목숨이란 말이다.

‘긔륵’은 거룩이다. 여기서 히어늘의 끝자 ‘늘’과 긔륵의 ‘륵’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다. 영원처럼 늘 거룩한 존재가 되란 것이다. 이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나가마다 그만 마다냐?’, 말숨, 얼숨을 쉬자고 세상에 나왔는데 나가다 말고 그만 두는 일이 어찌 가당한 가를 반문하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인 듯싶다. ‘빛드러 숨길 막지 말고’, 이에 대해서는 앞서 길게 언급했다. 삐뚤게 살아서 숨길을 방해하지 말하는 뜻이었다.

‘숨드러 고디 고디 나가는 빛을 따러 타다낳란’, 빛 속에서 허영으로 살지 말고 숨을 고르게 쉬며 참 빛을 따라 자기 바탈을 태워 나가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나’에 ㅎ받침이 붙은 ‘낳란’은 높이 타올라 나가라는 말로서 여기서 ㅎ은 하느님, 하늘을 적시한다.

‘희 이히히 히이마로다’, 비우고 또 비우면서 위로 자신을 끌어 올리라는 말이겠다. 탐진치를 버려야만 안심(安心)하며 바탈을 불사를 수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바탈을 태워 새 바탈,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 한다.

‘그리스도록’, 앞서 말했듯이 글과 그리스도는 다석에게 종종 동의어였다. 여기서 글이 글되도록, 말씀이 말씀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이라 한다.

‘나갈말슴’, 하느님 말씀을 그리워하도록 태어난 존재들이기에 이 말씀을 옳게 설 수 있도록 사는 것이 우리들 사명이다. 온 몸으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자가 그리스도이다.

‘그를 그리울밖에’, 글은 본래 그림이자 그리움이다. 영원을 그리고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글이다. 영원을 이어온 ‘예’의 능력, 그 ‘수’를 그리워하는 것이 글인 것이다. 그래서 글은 영원하신 하느님에게로 통하다.

글을 그리워하는 것은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이는 자기 바탈을 태워 위로 솟구치는 일과 다를 수 없다. 하늘의 아들은 이 일을 통해서만 자신을 증명할 뿐이다. 십자가를 진 예수는 그렇기에 하느님 아들일 수밖에 없다. 예수를 그리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7 >

다석은 마지막 시 ‘가나다라’에서 앞선 내용을 다시 반복하여 설명한다. 말한 대로 소리글자 한글을 천문(天文)으로 여겨 뜻을 찾은 결과였다. 인간을 하늘로 부르는 글이 바로 한글이란 것이다.

우선 어미글 모음(母音) 10글자를 ‘아야어여오요우유이’로 적으며 그 뜻을 다음처럼 펼쳤다. 애야(아야) 어여(어서) 오라(오요), 위로(우유)’라고. 이렇듯 하늘이 부르면 인간은 ‘으아’(으이)라고 답하며 위로 나가는 존재라고 했다. 자식을 부르는 어미(하늘)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석은 아들 글인 자음 14글자도 풀었다. ‘가나’는 내가 간다. 위로 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카’란 뜻을 좆아 가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겠다. ‘나가마’는 기왕지사 세상에 나왔으니 열심히 가겠다는 말이다. 이를 ㄴ, ㄷ, ㅌ의 변화에 따라 ‘나다타’로 다시 적었다. 세상에서 태울 것 다 태우면서 살겠다는 다짐이다. 이러 마음으로 세상에 나갈 것을 장담한 상태가 ㅁ, ㅂ, ㅍ, 마바파의 ‘파’라고 하였다.

이어서 다석은 ‘자’를 ‘고아구어’라 설명했다. 이것은 물을 불로 거듭 끊여 없게 한다는 뜻이다. 물이 마르면 삶도 없는 법이다. 인생이 한낱 마른 풀과 같음을 말한 것이리라.

‘차자아사’를 ‘와 l 워ㅣ’라고 다시 적었다. 소를 몰고 끌 때 사람이 소에게 내는 소리이다.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듯이 사람 역시 하늘 소리를 듣고 위로 오르라는 말뜻을 담았다.

이 시의 마지막에 적힌 ‘글보리Y에타낳’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위로 오르는 삶을 살라는 권유이다. 글을 보며 그 위에 타면서 인생을 살자는 것이다. 여기서 ㅎ은 하늘을 뜻하는 말인바, 그(글)를 바라며 세상에 좋은 길, 바른 길을 많이 터(만들어) 놓으라는 것이다.

결국 자음 14자는 하늘의 소리를 좆아 글이 서도록(그리스도)하는 길라잡이인 셈이다. 다석은 이어이어 온 예수되기를 힘써 바랐으며 글이 서도(그리스도)록 하는 것을 믿었다. 빛 속에서 빚지고 사는 일을 피하고자 빗질하며 살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글이 바로 서는 삶일 것이다.

다석은 자신의 한글풀이가 궤변처럼 들릴 것이나 섯 본뜻과 다르지 않음을 역설했다. 그이 방식대로 예수를 이해하고 따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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