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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규 목사,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독재에 맞서다

기사승인 2019.09.10  01: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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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형규 목사 3주기 기념 학술심포지엄 통해 삶과 신학 조명

“박형규 목사가 유신체제가 들어선 이후 최초로 대중적이고 공개적인 반유신투쟁을 전개하려고 한 것에 주목했다. 반독재투쟁 또는 민주화운동은 한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반유신투쟁을 최초로 공개적으로 벌이려고 시도한 것은 특별한 각오와 결단이 없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박 목사가 이렇게 어려운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 본회퍼라는 독일인 목회자가 함께 있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상국무회의라는 데서 유신헌법을 만들고 체육관에서 유신 대통령에 취임할 때 박 목사는 <본회퍼와 독일 고백교회>를 썼다. 이 글과 그의 반유신투쟁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그가 본회퍼처럼 ‘(유신) 국가라는 차’를 저지하기 위해 나서겠다는 각오와 결단을 말해주는 공증(公證)이었다.”

“수주(水洲) 박형규 목사 3주기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박형규·본회퍼 그리고 유신체제”라는 제목의 첫 번째 발표를 맡은 한국 현대사의 거장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가 박 목사의 민주화 운동 투신을 가능케 했던 요인을 이와 같이 설명했다.

‘(사)박형규목사기념사업회’(이사장 김상근 목사)가 주관한 이날 학술심포지엄은 9월9일(월) 오후 4시 종로5가에 소재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입추의 여지없는 참석자들이 자리를 가득 매운 가운데 진행되었다.

▲ 9월9일 오후 4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박형규 목사 3주기 기념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 1부 발표회의 발제자들. 왼쪽부터 사회를 맡은 권진관 성공회대 명예교수,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최형묵 목사,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이정훈

박형규 목사, 독재에 맞서 좁은문을 선택했던 거인

서 교수는 먼저 박 목사가 투신했던 박정희 유신체제에서의 민주화운동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두 사건을 언급했다.

이 두 사건은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과 민청학련사건으로 지적했다. 먼저 서 교수는 남산부활철연합예배사건은 그 이전 대학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민주화운동이 혹독하게 탄압받아 맥이 끊겼을 정도였는데 대학도 아닌 사회에서, 그것도 최초의 본격적인 대중적 반유신 투쟁이었다고 평가했다.

두 번째 사건에 대해 서 교수는 민청학련사건과 박 목사에 대해 “이미 (박형규 목사) 학생들과 좁은문을 들어가려는 준비가 다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가 보기에는 엄청난 일을 윤보선과 함께 했고, 민청학련사건의 외연을 넓히면서 공산주의로 몰아붙이기 어렵게 했다.”며 민청학련사건에서 박 목사가 차지하고 있었던 위상을 이와 같이 설명했다.

특히 서 교수는 박 목사가 민청학련사건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배경을 밝히면 두 가지 중요한 자료를 언급했다. 그 중 첫 번째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박 목사의 민청학력사건 참여를 이해하는 데는 두 자료가 참조된다. 어느 글이나 <본회퍼와 독일 고백교회>보다 더 직접적이고 강렬해 당시 박 목사의 정신세계와 신앙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을 짐작하게 한다. 첫 번째가 1973년 5월21일 나온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이다.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이 터지기 전으로, 세계교회들은 이 선언을 ‘제2의 바르멘 선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신앙선언은 197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말을 해도 부족할 정도로 중요하다.”

▲ 박형규 목사 3주기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성균관대 서중석 명예교수는 박형규 목사의 민주화운동을 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자리매김했다. ⓒ이정훈

계속해서 서 교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는 1974년 1월 13일에 행했던 설교 <대결>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설교를 통해 박 목사는 박정희 유신체제를 준비했던 긴급조치 1, 2호가 발동된 5일 후의 설교에서 “‘예수와 사탄의 대결’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건설될 때까지 멈출 수 없음”을 역설했고, 박 목사는 “교회가 이 대결을 회피할 때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포기하는 것이며, 십자가를 버리고 사탄과 타협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고 설명했다.

박 목사가 박정희 독재체제와의 “대결”을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방해하는 사탄과의 대결로 인식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 교수는 자신은 “박 목사의 신학을 얘기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며 다만 “현대사 전공자로서 박 목사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목회자에 대해” 네 가지로 평가했다.

▲ 박 목사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목회자들은 최초로 공개적으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는 것, ▲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반유신활동을 펴기 위해 플래카드와 전단을 마련한 것은 학원 밖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행위이기 때문에 반유신 투쟁 기획은 특기할 만하다는 것, ▲ 1974년 1월8일 군법회에서 15년 형까지 선고하겠다는 긴급조치 1, 2호가 발동된 다음 날 박 목사와 뜻을 같이하는 목회자들이 반유신 활동 결의를 해 정면에서 유신체제 및 긴급조치 1호와 대결한 것을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학생들이 긴급조치 하에서도 유신체제와 싸울 愿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는 점, ▲ 박 목사는 지학순 주교처럼 민청학련으로 알려진 학생들의 전국적인 조직망을 만들어내는 데 대단히 중요한 ‘활동 자금’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배후’가 되어 주었다는 점 등으로 박 목사의 민주화 운동을 평가했다.

박형규 목사, 한국의 니묄러, 한국의 본회퍼

▲ 박형규 목사 3주기 학술심포지엄 두 번째 발표를 통해 최형묵 목사는 한국기독교운동 속에 박형규 목사의 영향력을 삶의 과정을 따라 정리했다. ⓒ이정훈

서 교수에 이어 민중신학회 회장이자 NCCK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최형묵 목사는 “박형규 목사의 삶과 신학: 길을 열어간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발제를 이어갔다.

최 목사는 박 목사의 삶과 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한국의 니묄러 혹은 본회퍼”라 불리는 박 목사를 평가함에 있어 “전반적인 삶의 행보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최 목사는 박 목사의 삶의 “신학수업”, “해방의 길목”, “십자가 행진” 등으로 구분하고 규명해 갔다.

특히 최 목사는 박 목사가 “민중운동은 종으로서의 교회의 일을 보완”하며 “민중운동은 하나님이 교회의 테두리를 넘어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언급했다.

즉 현대사회에서 교회가 진정한 삶을 표현하고 그 사명을 수행하는 방법에 관한 물음에서, “세계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울타리와 기독교 기관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증거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교회의 예배의식과 신도들의 모음에서보다도 오히려 치열한 생의 투쟁의 자리에서“ 더욱 절실히 느끼고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현존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자각해야 한다.”고 강조했음을 밝혔다.

이러한 교회와 기독교운동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박 목사의 강조는 제2세대 민중신학이 탄생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고, 오늘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실존, 교회의 실존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박형규 목사를 추모하며 기리는 모두가 박 형 규

▲ 박형규 목사 3주기 학술심포지엄에서 논찬을 맡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서광선 명예교수는 박형규 목사를 추모하며 기리는 모두가 박형규라며 참석자들을 격려했다. ⓒ이정훈

마지막으로 서중석 교수와 최형묵 목사의 발표에 대해 논찬을 맡은 이화연대 기독교학과 서광선 명예교수는 먼저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처음으로 만나 “선후배, 형님 아우, 친구, 평생 동지”로 함께 한 박 목사와의 추억을 술회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준 박 목사와의 일화를 소개하며 박 목사 스스로가 “완전 자유인”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박형규 목사님에게는 적어도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내세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박 목사님에게 있어서 교회다운 교회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되는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위한 교회였습니다. 박 목사님에게 있어서 나라다운 나라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였습니다.”라고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서 명예교수는 “박 목사님의 삶과 행동과 운동과 말씀과 설교와 신학을 기리며 추모하는 우리 모두가 박 목사님을 박 목사로 만든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박 형 규입니다.”라며 참석자들을 격려해 많은 갈채를 받았다.

얼룩진 한국교회,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한국 민주화 운동에 있어 빼놓을수도 지울수도 없는 박형규 목사의 삶을 오늘 이 시대에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가 남은 과제이다.

개혁된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모토와 교회를 교회답게 해야 한다는 박형규 목사의 일성이 얼룩으로 가득 찬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데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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