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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역사에 길이 남을 독립 의지

기사승인 2019.09.09  00:5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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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전투는 어떻게 준비되었는가 (2)

<독립운동의사부>는 만세시위 행사를 <독립선언서반포축하회>로 명하였으며 곧 다가올 독립선언을 축하하고자 하였다. 3월 13일, 과연 용정에서는 연길, 화룡 등지에서 온 간민 3만여 명이 모여 역사에 길이 빛날 독립선언축하회를 열었다. 오후 1시, 김영학의 사회로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의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이 낭독되고 배형식, 유례균, 황지영의 연설이 있었고 간민들의 열렬한 환호로 <조선독립만세> 소리가 진동하였으며 태극기 물결이 하늘을 덮었다.

3∙13 평화시위에 유혈이 낭자해졌어도!

대회가 끝나고 시가행진이 시작되었다. 시위대 맨 앞에 공덕흡이 <조선독립을 성원>이라고 쓴 오장기를 높이 들고 나갔고 그 뒤로는 태극기와 중화민국 국기를 추켜든 정동중학교와 명동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300여 명의 충렬대가 질서정연하게 전진하였다. 그 뒤로 일반 민중들이 열을 지어 따랐고 민중들은 <조선독립 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일본간도총영사관을 향해서 전진하였다.

그때 중국군경들과 숨어든 일경에 의해 총알이 발사되었고 총 19명이 시위대원들이 순국을 하였다. 오장기 기수 공덕흡을 비롯한 9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또 다른 9명은 제창병원에서 사망하였고 한 분은 제창병원에서 퇴원한 후, 집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48명이 부상을 입었고 300여 명이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였다. 불완전한 조사 자료들을 종합하면 동북의 조선족 거주지 3월부터 5월1일까지 각종 시위가 73차례나 열렸고 참가 인원수는 무려 104,850명에 달하였으며, 15현에 파급되었다. 3월 13일부터 4월말까지 연변(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에서만 하여도 46차의 항일시위가 열렸고 참가한 인원수는 86,670명에 달했다.

▲ <고등학교 국사>에서 보여주는 봉오동의 위치. ⓒ국사편찬위원회

1920년 연변의 조선 이주민의 인구가 192,532명이었다는 감안할 때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항일시위에 참석하였다는 것은 연변의 독립에의 의지와 열기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비폭력 시위로 평화집회를 시작하였으나 중국군경과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조선 이주민들은 피 흘리는 전쟁 없이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민족독립은 민족의 힘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라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주민들은 신속하게 무장독립단체를 조직하여 자신들의 신변 보호를 위한 자위대와 독립전쟁을 위한 독립군의 창설하였다.

1919년 한 해에 연변에서 창건된 무장독립단체가 30개나 되었다. 1920년 8월의 통계에 의하면 훈춘 한민회를 제하고 그들이 모금한 금액이 50만원이었다. 1910년에 쌀 한 가마에 3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모금액은 연변 이주민들에게는 천문학적인 숫자라 아니할 수 없다.

무장독립단체들의 독립군 모집, 교육 및 훈련, 보급과 활동이 차츰 자리를 잡으면서 1919년 8월부터 국내진공작전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며 단체들의 연합동이 일어났다.

준비된 첫 승리! 위대한 가능성! 아, 봉오동전투

1919년 8월부터 1920년 5월까지 독립군부대의 수십 차례의 전투는 모두 두만강을 건너서 조선땅에서 진행된 기습전이었다. 하지만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연합부대가 중국 연변 땅에서 일본군을 섬멸한 첫 전투였다.

봉오동은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남봉오동과 북봉오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남봉오동은 지금의 고려툰과 신선동일대를 말하고 북봉오동은 어구의 수남촌과 토성촌으로부터 동북방향으로 뻗은 20여리의 골짜기를 말한다. 당시 북봉오동골짜기는 하촌, 중촌, 상촌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봉오동을 개척한 최명록(최진동)의 자위대에 기초된 무장독립단체인 <도독부>가 소재하고 있었다.

봉오동전투전 인근 각지의 무장독립군 부대의 주둔상황을 보면 봉오동에서 동북방향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북로군정서가 있었다. 서쪽으로 약 10km 되는 석현에 신민단 본부가 있었고, 서북쪽으로 지점인 대감자에 광복단이 주둔하였다. 남쪽 가야하에는 의군단이 있었고, 가야하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의란구에 국민회본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1920년 5월 3일, 봉오동에서 간도국민회의 주도로 <군무도독부>, <신민단>, <군정서>, <광복단>, <의군단>, <국민회>가 모여서 연합작전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5월 22일, 대한독립군단과 도독부의 연합으로 군무도독부가 편성되어 홍범도장군이 북로제1군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5월 28일에는 국민회군이 연합에 동의를 하여 <대한북로독군부> 편성되어 홍범도장군이 역시 북로제1군사령관에 추대되었다.

당시 대한북로독군부는 봉오동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강력한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독군부의 산하 독립군은 1,200여 명, 기관총 2문, 보총 약 900정, 권총 약 200자루, 폭탄(수류탄) 약 100개, 망원경 7개, 탄환은 군총 1정당 150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무장독립운동의 의지와 열기가 고조되었을 때, “봉오동전투는 삼툰자 전투가 서막을 열었고, <후안산전투>를 거쳐서 상촌 <봉오동전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삼툰자전투

삼툰자전투는 6월 4일부터 6월 6일까지에 일어난 전투 또는 접전으로 1) 독립군의 강양동 초소 습격전, 2)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삼툰자에서 전개된 독립군과 일군 간의 총 싸움, 3) 삼툰자 서북방에 와서 숙영하고 있는 일군추격대를 독립군이 기습한 전투를 포함하고 있다.

강양동습격은 6월 4일 새벽 5시경, 신민단 소속 박승길의 부대 30여명이 강양동의 일군 초소를 습격하여 일군헌병군조 4~6명을 일시에 섬멸한 기습전이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독립군과 일군의 총싸움은 6월 4일, 중국 걸만동 방면으로부터 무기를 갖고 강양동 초소 습격하고자 삼툰자에 도착한 독립군과 일제의 종성수비대 순찰병들 사이에 일어난 접전이었다. 신민단의 박승길 이하 단원들은 강양동 초소를 치고 돌아오고 다른 길에서 다른 독립군 부대가 강양동 초소를 습격하러 들어갔다. 하지만 일군 순찰병에게 발각되어 교전을 벌인 것이다.

삼툰자전투는 독립군과 일군의 교전 소식을 들은 아라요시 중위가 6월 6일,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옴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독립군을 추격하여 삼툰자 서북방에 도착하였으나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화풀이로 마을의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하였다. 밤 10시경, 그들이 어둠 속에서 독립군 추적을 포기하고 숙영하고 있을 때, 무장 독립군들이 삼툰자 서북방고지에 이르러 보초들을 습격하고 안산방면으로 퇴각하였다.

후안산전투

후안산은 지금의 고려툰(당시는 남봉오동)에서 남쪽으로 약 8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령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 또 봉오동에서 도문으로 통하는 길옆에 위치해 있어서 당시 독립군들의 주요한 활동거점이 되었다. 후안산전투는 1920년 6월 6일 밤 12시부터 6월 7일 이른 새벽 2시까지 후안산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6월 6일 19사단 소속의 야스가와 소좌는 기관총 1소대와 보병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한다. 그리고 밤 9시에 남양에서 가까운 두만강을 건너 후안산으로 진군하였다. 야스가와와 아라요시는 후안산 앞에서 회합하였고 진군 작전을 짰다.

당시 후안산 앞에 집결한 일군 추격대의 병력은 대략 3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봉오동으로 가는 길 안내자를 찾기 위해 정찰병을 마을에 보냈다. 그 시각에 조선에서 의연금을 모아온 최명국 이하 13명의 신민단 단원들이 후안산 최진국의 집에서 비밀회합을 하고 있었다.

정찰병은 불빛을 발견하고 무작정 문을 열었다. 기습에 놀란 최명국 일행은 정찰병을 쓰러뜨리고 북쪽 고려령 기슭으로 후퇴하면서 추격해오는 일군에게 총 사격을 가하였다. 전투는 2시간 정도 진행되었는데 야밤이었으므로 손실은 크게 없었다. 독립군 1명과 여성 1인이 희생되었으며 부녀와 어린 아이가 부상을 당하였고 마을 사람 6명이 체포를 당하였다.
  
봉오동전투

후안산에서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군 추격대가 기세가 등등하여 <대한북로독군부>의 본부가 있는 봉오동을 향하였다. 독군부는 그들을 섬멸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작전을 수행하였다. 가장 큰 일은 추격대 전원을 매복권 내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독립군 부대원들로 알려져 있으나 계절 등으로 보아 봉오동 전투가 끝난 뒤 찍은 사진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복장이 정규군과 다름없다. ⓒ독립기념관 제공

6월 7일 아침 4시 45분 일군 전위 중대가 고려령 북방 1.5km 지점에 도착했을 때, 매복하고 있던 이화일 부대가 적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고 고려툰 뒷산 산등성이를 넘어 북봉오동으로 후퇴하였다. 일군은 퇴각을 하다가 대오를 정비하여 이화일 부대의 퇴각노선을 따라 북봉오동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하촌, 중촌을 지나 오후 1시경에 추격대 전원이 매복권 내에 들어섰다.

동서남 삼면에 매복해 있던 도독부, 대한독립군, 신민단의 군인들의 교차사격을 받고 전의를 상실하였다. 오후 4시 20분경 천둥번개가 치며 하늘이 어두워지고 폭우와 우박이 내리는 기회를 틈타서 그들은 비파동으로 퇴각하였다.

<길장일보>는 일군 150명 소멸, 부상자자가 수십 명이라고 보도하였다. 국민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독립군측은 군의 황하백, 군인 주택렬 양씨가 순직하고 2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마을주민 5명이 부상을 입었다.

봉오동전투의 정신이여! 영원하라!

봉오동전투 99년이 되는 해에, 한국이 아베의 망언과 경제전쟁으로 화산처럼 끓고 있다. 마치 100년 전 용정의 3∙13만세 시위가 폭력으로 유혈이 낭자해지고 독립의 길이 막히자, 우리 조상들이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분노와 애국애족의 열정으로 총칼을 들고 독립전쟁의 현장으로 앞을 다투어 나가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한일 간의 역사전쟁이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하늘이 어둡다.

봉오동전투는 민초들의 나라의 사랑이 핏빛으로 피어난 꽃이다. 감동이고 가능성이며 우리의 길을 보여주는 안내판이다. 봉오동전투는 역사에서 사라진 조선이 제국의 깃발을 흔들며 전진하는 일본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역사에 이름을 갓 올린 대한민국과 왜구의 나라 침략자 일본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민병이자 사병인 독립군과 일본의 정규 군인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동북으로 이주한 약 19만 명 조선인과 일본국민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최소한의 무기를 갖춘 독립군과의 신식무기를 갖춘 일군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모금으로 유지되는 독립군과 국가의 공급을 받는 일본군과의 전투였다. 봉오동전투는 일군의 침략과 학살로 부모와 고향과 나라를 잃은 슬픈 조선 청년들과 침략자, 살기 등등한 학살자 일본군과의 전투였다.

조선인들의 독립 염원을 담아 15년 긴 세월 동안 준비된 최초의 무장 독립전쟁이여! 조선 독립군으로 연합되어 침략자를 물리친 최초의 위대한 독립전쟁이여!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승장구했던 일군의 오만과 긍지를 무너뜨린 위대한 독립전투여! 우리의 독립이 가능하다는 확신과 희망을 준 어머니 독립전쟁이여!

꽃으로 피소서. 이 땅 우리 후손들의 가슴 속에 아름답게 기억되소서. 우리의 사랑과 흠모를 받으소서.

봉오동전투에 대한 나의 감사와 묵상은 친일파로 오염된 독립운동의 역사가 바로잡힐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영화 “봉오동전투”를 만드신 분들과 관람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봉오동전투”가 20년 동안 준비된 조선인들의 뜨거운 독립에의 염원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싶었다.

참고문헌

심영숙, 『중국조선족력사독본』, 민족출판사, 2016.
룡정3∙13기념사업회, 『룡정 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 도문시정협문사자료위원회 편, 『홍범도 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991.
김춘선·안화춘·허영길 저, 『최진동 장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북경대학조선문화연구소, 『종교사』, 민족출판사, 2006.
중국조선족교육사편집부, 『중국족교육사』, 중국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1년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개척』, 민족출판사,1999.
연변정협문사자료위원회편, 『연변문사자료』 제8집 종교사료전집, 연변인민출판사, 1997.
<연변조선족사>집필소조편, 『연변조선족사상』, 연변인민출판사, 2011.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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