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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정신을 알면 끌려 다니지 않는다

기사승인 2019.08.27  18:3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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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강의』 7강 풀이

본 강좌는 1956년 11월 19일 자 『다석일지』에 수록되었다. 불교경전 『法華經』의 핵심인 “묘법연화경 신해품제사”(妙法蓮花經 信解品第四)의 내용을 풀어 낸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한자어 본문을 모두에 길게 소개했으나 여기서 다시 옮기기는 어렵겠다. 단지 법화경의 핵심을 묻고 불려 풀어낸 다석의 생각을 좇는 일에 충실할 것이다.

김흥호 선생님 생전에 들었던 말씀이 기억난다. 韓中日 사람들이 선호하는 불교 경전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었다. 중국인은 『圓覺經』을, 한국인은 『華嚴經』을 그리고 일본인의 경우 『법화경』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원각경』이 불교적 시각에서 유교를 수용한 것이라면 『화엄경』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구도과정에 초점을 맞추었고 『법화경』은 법(Dharma), 곧 진리자체를 강조하는 책이라 배웠던 것 같다.

물론 강조점이 다를 뿐 핵심내용에 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을 것이다. 『법화경』이 우리에게 소중한 또 다른 이유는 이곳에 성서의 ‘돌아 온 탕자 이야기’와 유사한 본문이 길게 소개된 까닭이다. 후자가 전자로부터 배워 전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만큼 내용이 서로 유사하다. 다석도 이점을 언급하며 본 내용을 갖고서 동서회통의 진리를 전하고자 했다.

『법화경』, 일명 “妙法蓮花經”이라 불리는 본 책은 ‘진리의 꽃’ 즉 더러운 곳에서도 피어나는 ‘연꽃’을 적시한다. “信解品第四”는 『법화경』의 해설서로서 진리를 믿고 이해하는(信解) 방식을 말하고 있다. 평소 성경을 갖고 논하던 다석이 이번에는 불경을 갖고 진리를 논하는 바 이를 연경(硏經)이라 칭했다.

늘상 성경 한 권만 손에 쥐고 다녔던 다석이었으나 그에게 유/불교의 경전들은 구약성서와 같았다. 신약성서 속 예수를 알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만 할 책이었던 것이다. 본인은 모든 경전의 내용들을 소화할 만한 깜냥을 지녔다고도 말씀했다.

이러 이유로 다석을 종교다원주의자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많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같은 진리를 말한다는 진술도 곳곳에서 발견되기에 쉽게 단정 짖기 어렵다. 필자는 다석의 귀일(歸一)사상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기독교나 불교의 진리이기보다 이들을 회통한 진리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종교다원주의인가 아닌가의 논쟁은 불필요하다. 그의 귀일사상은 이런 논의를 훌쩍 넘어서 있으니 말이다.

본 『법화경』 강의에서 핵심은 석가모니가 제자 사리불(舍利佛)에게 전해 주었다는 가르침(法), 곧 ‘아뇩다라삼막삼보리’(阿褥多羅三藐三菩提)란 말이다. 아뇩은 “無‘, 없다는 뜻이다. 다라는 위 상(上)자와 같다. 이를 합해 말하면 ’無上‘이 된다. ’더없이 높은 곳‘ 혹은 ’위(上)가 없는 지존자란 뜻이겠다.

삼막은 바를 정(正)과 두루 편(遍)의 의미를 지녔다. 온통으로 보편적이 된다는 뜻이겠다. 다석은 이를 하느님께 자신을 바쳐 인류에게 두루 쓰이는 일(자비)이라 풀었다. 보리는 익히 알듯이 깨달음(覺)을 일컫는다.

이를 다시 고쳐 쓰면 ‘무상정편각(無上正遍覺)이 된다. 여기서 편은 소리 순화를 위해 종종 ’변‘으로 읽혀지고 평등하다는 등(等)으로 바꿔 쓰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무상정등각‘이란 말이 불경에 자주 언급 되는 것이다. 이를 풀면 다음과 같은 엄청난 뜻이 된다. ‘꼭대기 없이 높기만 해서는 아니 되며 넓게 보편적으로 바르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자리에서 본 세상이 그러할 것이다. 개체의 자리에서 이런 절대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바로 각(覺)이겠다. 꼭대기 없는 높은 진리만 깨치지 않고 두루 보편적일 수 있는 길도 찾아야 한다. 앞의 것이 지혜라면 뒷 것은 자비일 것이다. 이 둘은 언제든지 함께 있다. 자비로 들어나는 것만이 지혜인 바, 이런 지혜를 일컬어 진리(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진리는 자신을 초월할 때 가능한 것으로서 이 경우 초월은 자신의 죽음과도 같다. 열반(涅槃)에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일 것이다. 다석은 이것만 알면 불교의 전부이자 진수를 안 것이라 말하였다. 석가가 오직 이 진리를 제자에게 전해 주었던 까닭이다.

다석은 여기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설명한다. 예부터 동양에서는 자기수하에서 공부하여 성숙한 지경에 이르면 선생은 제자에게 졸업장 주듯 ‘수기’(手記)를 통해 깨달음의 상태를 보증했다. 석가가 제자 사리불에게 수기로 준 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막삼보리’였던 것이다.

기(記)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공부가 인정될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제자는 자신의 깨달음 상태를 내보이는, 예컨대 오도송(悟道頌)을 스승께 바쳐야 할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 역시 이와 같았다.

다석도 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수기’를 준적이 있다. 故 김흥호 선생에게 현제란 호를 내렸고, 박영호 선생에게 졸업장을 선물했던 것이다. 교회에서 예수의 제자 되겠다는 이들에게도 이런 ‘수기’의 전통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장로, 집사, 권사가 아니라 호(呼)를 지어주는 것이 우리 전통에 더 부합되지 않겠는가? 이로써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으면 부모/자식 간의 관계보다 더 진하고 나뉠 수 없다.

필자가 다석 사상을 연구하면서 ‘스승 기독론’을 말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스승기독론은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를 ‘길’(道)이라 고백하나 그 길을 가다 우리도 그 길이 될 것을 요구하기에 말이다. 이런 생각이 성서의 본뜻과 근접하며 더욱이 역사적 예수 연구를 완성시킬 수 있다.

이런 지경에 이를 때 우리는 세상살이에서 자유할 수 있다. 삶이 짐이 되지 않으며 원치 않는 일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된다. 피안(彼岸)이란 이쪽 언덕에서 저쪽 다른 언덕으로 옮겨간다는 뜻으로서 상대세계를 버리고 다른 삶을 택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죽고 다시 살았다는 말이다.

이점에서 열반(涅槃)을 얻는 것이 신앙의 완성이라 할 것이다. 상대세계에서 벗어나 ‘우’(上)로 더 이상의 ‘우’가 없는 꼭대기에 닿으면 고난이 사라진다. 집착이 소멸되는 것이다. 너/나의 분별이 사라지는 탓이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더불어 평평하게 된다.

이점에서 다석은 피안과 열반을 세상 안에서 찾고자 했다. 이 모든 종교적 개념들이 현실을 달리 살자는 데 목적이 있지 이를 부정하는 데 초점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로 올라가서 모두와 두루 편해지는 상태가 열반인 것을 다석은 누차 강조하였다.

이점에서 그는 불교가 종종 인간의 열정을 소멸시키는 것을 보고 걱정했다. ‘우’로 향하는 열정마저 벗겨내지 말라고 했다. 무상한 세상을 벗어나자는 것은 세상 자체를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라 이 속에서 주인 노릇 못하고 끌려다나는 일을 그치자는 말인 까닭이다.

노자(老子)의 말을 원용하자면 일종의 ‘유위적 무위(有爲的 無爲)’라 할 것이다. 무위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맘껏 품으라는 말이다. 그래서 보살(菩薩)이 중요하다.

본래 이것은 ‘보리살타’(보디사트바)의 ‘보’와 ‘살’을 택해 나온 말이다. 몸뚱이를 지닌 상태에서 ‘깨달은 자’란 뜻을 지녔다. 그래서 이를 한자어, 각유정(覺有情)으로 표기한다. 감정을 지닌 상태, 곧 몸의 존재로서 깨달음을 적시하기에 말이다.

세상 속 중생들에게 열반을 설(說)하며 자기 깨달음을 심화시키는 이가 바로 보살인 것이다. 따라서 붓다를 聖人이라하면 보살은 賢人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이런 지경에 이르러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깨달음(覺)의 과정으로서 불교는 성문(聲問), 연각(緣覺) 그리고 보살(菩薩)을 말한다. 성문이란 말씀을 듣는 단계이다. 소리에 내포된 뜻을 새겨듣는 과정이겠다. 교회안에서의 성경공부가 바로 이런 단계일 것이다.

처음에는 많이 듣고 배우는 일이 중(重)하다.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단계를 거쳐야 옳다. 다음으로 연각은 전해들은 말을 스스로 깨쳐 실천해 보려고 애쓰는 상태이다. 무상(無常)함을 배웠다면 삶이 실제로 그런 것인 지를 몸으로 체득하는 단계이다. 그럴수록 열반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 질 수 있다. 무상의 인식이 기존 삶을 달리 만들 두 있으니 말이다.

보살은 앞서도 말했듯이 각유정(覺有情)이다. 살아있는 부처의 상태로서 삶에 새 정신(아뇩다라삼막삼보리)이 들어와 전혀 다른 삶을 깨쳐 실천하며 중생을 지도하는 자를 일컫는다. 여기서 삶이 오롯이 완성된다.

불교는 이 세 과정을 종종 ‘信解行證’이란 개념으로 좀 더 세분화시켜 설명한다. ‘신’(信)이란 자신 속에 불성(佛性)이 있음을 믿는 단계이다. 예수께서 우리 존재를 세상의 빛이자 소금이라 규정한 것과 비교될 수 있겠다. 빛이기에 빛 되라는 것이 예수의 증언이 아니었던가?

‘해’(解)는 자신이 믿은 바를 이해하는 단계이다. 자기 속에 자기 아닌, 자신 보다 큰 어떤 존재가 내재한다는 뜻을 깊게 헤아리는 일이다. 자신을 달리 이해하는 수순이겠다. ‘행’(行)은 자신이 믿고 이해한 바를 따라 살아가는 단계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행한 것만큼만 알고 믿을 뿐이다. 知行 혹은 信行합일의 단계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증’(證)은 자신이 행한 것을 세상에 전하는 일이다. 믿고 이해한 것만이 아니라 행한 것을 전하는 것이 바로 설교이고 설법이란 말이다. 그래서 옛 부터 법(法)보시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했다. 보살의 존재가 바로 이런 ‘증’의 현실태인 것이다.

이제 본 장 마지막에서 다석은 ‘탕자의 비유’을 연상시키는 법화경 속 아름다운 이야기를 상세하게 소개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가 구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에게 선물된 것을 기뻐 알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보배’ 혹은 ‘선물’은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일 것이나 기독교는 이를 하느님의 ‘영원한 자녀’된 것이라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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