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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부인하거나 자기를 부인하거나”

기사승인 2019.08.26  17:5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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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묵상하며

24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27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2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마태복음 16:24~28/새번역)

“누구든지 나와 함께 가려면 내가 가는 길을 따라야 한다. 결정은 내가 한다.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피해 달아나지 말고, 오히려 고난을 끌어안아라.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내가 방법을 일러 주겠다. 자기 스스로 세우려는 노력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너희 자신, 곧 너희의 참된 자아를 찾는 길이며, 나의 길이다. 원하는 것을 얻고도 참된 자기 자신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너희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태복음 6:24~26/메시지성경)

“둘이 먹다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데리러 왔습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간판의 글귀입니다. 저승사자로 보이는 남자가 그려진, 부서진 액자모양의 간판, 잠시 멈춰 웃음 지으며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시 길을 가면서 동행에게 말했습니다. “교회 앞에 저런 간판을 두면 재미있겠어. ‘자신 안에 주님께서 사시고 자기는 죽었다고 해서 데리러 왔습니다.’ 이렇게 쓰는 거지. 아! 저승사자는 안 어울리나? 천사를 그려야 하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마음까지 웃을 수는 없었습니다. ‘진정 자신은 죽고 주님께서 사는 사람이 있다고 당당히 간판을 걸만한 교회가 얼마나 될지. 그렇게 걸면 허위과장광고가 되겠지.’ 뒤끝이 씁쓸한 웃음이었습니다.

▲ 연남동 길가 어느 광고판

“주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들었고 알았습니다.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베드로는 부인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부르심 앞에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보면, 자기를 버리고 따르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부인하다/버리다’라는 같은 헬라어가 두 곳에 정반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버리고 따르라 부르시는 장면과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버리고 도망가는 두 곳입니다. 같은 단어가 다른 대상에게, 자기가 아닌 주님께 사용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나 제자들은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가르침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앎이, 그 앎에 대한 결단과 맹세가 십자가 앞에서 너무 무기력했습니다. 이 부르심을 모르는 신앙인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게다가 베드로와 제자들의 배신, 주님을 부인하고/버리고 도망 간 사실까지 압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 그 약속도 압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앎이 얼마나 힘이 있습니까? 그것을 아는 신앙인들 중 몇이나 자기를 부인하고/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 위해 애씁니까?

주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 바로 뒤에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27절) 이 문맥 안에서 행실은 부인하는 행실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부인하느냐, 자기를 부인하느냐 하는 그 행실에 따라 갚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아무런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무런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더 위기인 부르심입니다. 이 본문 안에서 어떤 신선한 깨달음이나 더 깊은 통찰을 기대하십니까? 그보다는 물음 하나에 붙들리는 것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알면서도 안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알면서 안 되는 이 현실, 그 앞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깨달음이나 통찰, 감동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중요합니다. 어떤 깨달음이나 통찰도 자기를 부인하고/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지적 유희나 감정 놀이과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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