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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탄생성의 교육사상과 양명의 치량지의 교육(2)

기사승인 2019.08.21  17:4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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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natality)의 교육학과 왕양명의 치량지(致良知)

‘감각적 직관력’(taste/intuition, 知)으로서의 판단력과 양지, 그리고 아동교육

아렌트와 양명의 아동교육사상에서 첫째로 ‘미감적 감각’(감수성, 직관력) 또는 ‘감정’으로서의 판단력과 양지 이해와 관련해서이다. 인간의 판단력을 특히 미감적 판단력으로 보았고, 어떤 반성적 사고 대신에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감각(sense)의 일로 보았다는 것은 인간의 교육에서 아직 사고가 발달하기 이전에 신체나 감정이나 느낌의 차원을 중시하라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어린 시절 혹독한 삶의 현실 속에서 신체나 감정의 필요물들을 온전히 배려 받지 못하고 자란 경우는 그 마음이 왜곡되기 쉽고, 자기 자신의 보존에 대한 본능이 강하고 두려움이 많아지기 때문에 자유롭게 세상과 만나지 못한다. 어린 시절 충분히 몸의 배려를 받지 못하고, 가까움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자기 안으로 빠져버리기 쉽고(introspected), 자신이 겪은 것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객관화 시키지 못하고 세계에 대해 벽을 쌓고 자기 속에 침잠해버리기 쉽다.

그런 사람의 판단력과 양지는 굳어서 잘 기능하지 못하고 심한 경우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가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해 서술한 것을 보면, 어린 시절 날씨가 무척 추웠는데도 장갑조차 없었던 혹독한 경험을 유추해 볼 수 있다.(1) 아렌트의 분석에 의하면 아이히만의 부모는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에 몰락한(declassė) 부르주아 사람들로서 큰 아들인 아이히만에게 학교도 잘 보내지 않았고 매우 혹독하게 대했던 것으로 보인다.(2)

아렌트 자신의 삶도 비록 경제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한 편으로는 육아일기를 쓸 정도로 교육적이었고 배려적이었지만, 아버지의 발병과 이른 죽음, 그런 가운데 종종 격어야 했던 어머니의 긴 여행으로 부재로 인해서 깊은 외로움을 겪었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슬픈 일에 대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아야한다”고 말하면서 어린아이의 명랑성을 잃어버렸다고 고백한다. 또한 청소년 시절 온갖 것에 대한 책을 읽었지만 결코 사교적이거나 정치적이지 않았고, 자기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었고, 이것이 나중에 같은 유대인 여성 라헬 반하겐(Rahel Varnhagen)을 만나서 그녀에게서 자신과 유사한 ‘페리아’(pariah)의 모습을 보면서 그 전기를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남편 브리허(Brueher)를 만나고, 스승 야스퍼스와의 만남 등으로 서서히 그 페리아성을 극복된 것으로 그녀의 전기 작가 영-브릴(Young-Bruehl)은 해석해 낸다.(3) 아렌트는 자신은 항상 삶에서 ‘페리아’(이방인)처럼 느꼈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스스로 “의식적인 페리아”(conscious pariah)로 남아기를 원했다고 밝힌다.

우리의 판단이 사고보다는 먼저 감정과 직접적인 몸적 감각에 달려있다는 아렌트와 양명의 탐구는 어린 시절 우리들의 감수성과 감정이 왜곡 없이, 억눌림 없이 잘 표현되고 발휘될 수 있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폭압적인 외부의 환경으로 인해서, 또는 과도한 지적 공부의 무게로 인해서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휘가 자주 억눌려지거나 왜곡 될 때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자신의 판단을 잘 믿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판단을 자주 유보하거나 아예 판단력을 갖지 못하고 단지 수동적이고, 가식적이며, 엄격하고 차가운 기계처럼 굳어버린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지적한 아이히만이나 스위스의 여성 아동심리학자 알리스 밀러(Alice Miller)가 관찰한 히틀러의 어린 시절을 보면, 그의 폭군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라거나(4), 또는 양명이 줄기차게 비판했던 당시 주희식 건조한 공부방식이 배출한 “혼동되고 어리석은”, “미사여구로 탁상공론만 일삼고”, “자기이익과 영달만을 추구하는” “세상지식인들”은 모두 어린 시절 그들의 신체와 감수성과 감정이, 즉 그들의 미감적 판단력(양지)이 배려 받지 못한 결과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육은 보수적이어야 한다

탄생성을 교육의 본질로 본 아렌트는 그래서 교육은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육은 기성세대 간의 일인 정치와는 달리 세상에 자신만의 고유한 “새로움”(the newness)을 간직하고 새로 오는 아이들과 관계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새로움이 잘 간직되어서 좋은 열매로 펼쳐질 수 있을 때까지 배려하고 간직해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5) 이런 의미에서 아렌트는 20세기에 들어와서 학교가 난장판 같은 놀이장이나, 직업훈련장, 또는 정치실험장처럼 변질되는 것을 비판하고, 가정적 사적 영역이 무너져서 아이들이 일찌감치 밖으로 내몰리는 것, 기성세대의 대변자로서의 교사들의 책임감과 권위가 무너져서 아이들이 보호받고 배려되지 못하고 그들만의 힘의 세계로 내몰리는 것 등은 모두 무엇인가를 ‘간직한다’(conserve)한다는 의미에서의 교육의 본래 모습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6)

▲ 정확하게 모든 어린이에게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위해서 교육은 보수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이 새로운 것을 보존하고 그것을 오래된 세계에 새로운 것으로 소개해야 한다. ⓒGetty Image

그녀는 60년대 미국에서 흑백통합교육 논의가 뜨거웠을 때, 평소 소수자의 권리와 인권을 위해서 싸웠던 그녀와는 달리 오히려 통합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린 흑인아이들이 어린 시절 온전히 그들 자신의 세계에서 인정받고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어른들의 정치적 이념의 싸움장이 된 통합학교에서 참된 권위에 대해서 배우지도 못하면서 부모들의 허영심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7) 이상의 아렌트의 교육적 입장들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8)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는 어린 시절 일수록 좀 더 친밀하고, 사적 영역의 모습을 띤 장소와 관계 속에서 책임 있는 기성세대의 보호와 배려를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특히 위대한 정치적인 행위는 이 시절의 기초가 흔들려서는 기대하기 어렵고, 그 악영향이 매우 크고 오래 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시와 노래와 체육교육

양명도 앞에서 그의 초등교육의 대의를 나타내는 글에서 당시의 교육이 과도하게 지적 교육과 책 공부에만 집중하고, 아이들의 감성과 의지, 예를 몸으로 익히는 것을 통한 신체의 건강과 도덕적인 자발성 등을 기르는 교육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였다.(9) 양명에 따르면 아이들의 감정은 놀기를 좋아하고 구속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마치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초목처럼 그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면 잘 자라지만 억지로 비틀거나 방해하면 잘 자라지 못하고 말라죽는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반드시 그들이 나아가려는 방향을 따라 격려해주고, 마음속으로 기쁘고 즐겁게 해주어서야 스스로도 멈출 수가 없을 정도로 발전할 것이라고 지적한다.(10)

이 맥락에서 양명은 ‘노래 부르기와 시배우기’ 수업을 중시하는데, 그것은 단지 그들의 의지를 돋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이 고함치고 뛰노는 일을 노래하고 시를 읊는 것을 통해서 발설함으로써 그들의 속으로 억눌려있고 맺혀있는 것을 풀어주고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밝힌다.(11) 즉 아이들의 감정의 순화를 말하며, 이 감정이 순화되지 못할 때 바른 의지와 인식, 자발적인 행동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감정의 순화가 아이들 교육의 기초가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양명은 또한 몸으로 예절을 익히는 활동을 중시 여기는데, 그것은 단지 그들의 품행을 고상하게 해줄 뿐 아니라 예의를 따라 나가고 물러가고 응대함으로써 그들 혈액의 순환을 원활히 해주고, 절하고 일어나고 몸을 굽히고 펴고 함으로써 그들의 근육과 뼈를 단련시킨다고 한다. 또한 그에 따르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단순히 그들의 지식만 확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와 문단들을 반복하는 가운데 집중력을 키워주는 것이고, 그들의 의지를 길러주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교육프로그램들은 결국 그들의 의지를 순조롭게 인도해주고, 그들의 성정(性情)을 바로잡아주며, 속에 있는 나쁜 생각들을 말없이 변화시켜 주고,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어렵다는 생각 없이 저절로 예와 의에 다가가고, 중화(中和) 속에 자연스럽게 잠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밝힌다.(12)

이러한 지적에서야말로 양명이 얼마나 인간의 감성으로서의 판단력 교육을 중시했고, 그것과 더불어 의지의 교육을 중시 했으며, 지적 교육 이전에 어린이들 교육의 기초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밝혀주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능력이야말로 바로 인간 활동의 기초이고, 인간 정신력의 토대이며, 그를 통해서 우리가 어렵다는 생각 없이 행위 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행위능력의 기초로서의 감정교육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행할 때, 가장 자연스럽게, 힘 안들이고, 온전하게 행할 수 있다. 판단력(취미)과 양지를 확장시키는 일은 그렇게 우리의 좋아할 수 있는 능력,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기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행위를 잘 할 수 있는 인간을 키우기 위해서는 이 미적 감수성으로서의 판단력과 양지를 기르고, 우리의 감정에 맺힌 것들을 풀어주어서 그것을 순화시키고, 그래서 대상이 그 앞에 왔을 때 대상이 그 자체로서 아름답게 현현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기초이고 우선이라는 것이다.

아렌트도 양명도 모두가 시를 썼으며, 시인들을 무척 좋아했고, 시와 예술의 정치적 속성과 기능을 잘 알고 있었다. 아렌트는 다시 지적하기를 시의 정치적 기능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르쳐 주듯이, 우리 마음의 감정을 ‘순화’(catharsis)시켜주어서, 판단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고, 그래서 거기서 행위가 나올 수 있도록 한다.(13) 사적 욕망에 사로잡힘이 없이 세상을 그 현현의 아름다움으로 전해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세상과 화해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도 그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시인, 역사가, 소설가(storyteller), 이들 모두는 우리의 감정의 순화, 판단력과 양지의  확장과 확충을 위해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14)

이것은 유교적 맥락에서 보면 우리의 일곱 가지 감정(칠정)이 일어났을 때 그것들을 잘 관찰하고 살펴서,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게 하고, 사적 욕망으로 물들지 않게 하여서 ‘화’(化)의 상태로 순화하는 일을 돕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양명은 우리 칠정의 감정도 그 안에 포괄하는 양지의 강조를 통해서 이 칠정을 그냥 억누르거나 부인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잘 길들여서 순한 것이 되게 하는 일이 치량지의 한 가지 일임을 밝혔다.

그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라는 말이 《詩經》의 시 삼백 편의 정신을 어떻게 모두 드러낼 수 있겠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詩經》의 시 삼백 편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육경의 모든 경서가 결국 이 말을 뜻하는 것이라고 밝힌다.(15) 결국 우리 마음의 감정을 닦는 일이야말로 공부의 가장 기초가 되고, 판단력과 양지가 우리 인식과 활동의 출발이 되는 길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렌트의 판단력 확장과 양명의 치량지의 교육은 우리 아이들의 교육에 있어서 시와 음악교육, 예술교육과 취미교육을 더욱 강화시키고,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밝혀주는 의미가 된다.

미주

(미주 1) 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New York: Penguin Books), 1977, 35.
(미주 2) Ibid., 28ff.
(미주 3) Elisabeth Young-Bruehl, Hannah Arendt for Love of the World (New He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82), 87.
(미주 4) Alice Miller, Am Anfang war Erziehung, Suhrkamp Taschenbuch 951, 1983, 169-231.
(미주 5) Hannah Arendt, “The Crisis in Culture”, Between Past and Future (New York: Penguin book, 1993), 192.
(미주 6) Ibid., 192.
(미주 7) E. Bruel-Young, 311-313.
(미주 8) Mordechi Gordon, “Hannah Arendt on Authority, Conservation in Education Reconsidered”, Educational Theory, Spring 1999, Vol. 49, No. 2, 161-180; 이은선, 「한나 아렌트 사상에서 본 교육에서의 전통과 현대」, 『교육철학』 제30집 (교육철학회 2003.8), 148.
(미주 9) 『傳習錄』中 195조 ff. <訓蒙大意示敎讀劉伯頌等>
(미주 10) 『傳習錄』中 195조 “大抵童子之情,樂嬉遊而憚拘檢. 如草木之始萌芽,舒暢之則利達,摧撓之則衰痿。今敎童子, 必使其趨向鼓舞,中心喜,則其進自不能已. 譬之時雨春風,霑被卉木, 莫不萌動發越,自然日長月化.”
(미주 11) 『傳習錄』中 195조 “故凡誘之歌詩者,非但發其志意而已,亦所以洩其跳號呼嘯於詠歌,宣其幽抑結滯於音節也..”
(미주 12) 『傳習錄』中 195조 “凡此皆所以順導其志意,調理其性情,潛消其鄙吝,黙化其麤頑,日使之漸於禮義而不苦其難, 人於中和而不知其故.”
(미주 13) Hannah Arendt, “Truth and Politics”, Between Past and Future, p. 262.
(미주 14) Ibid., p. 262.
(미주 15) 『傳習錄』下 249조 “『思無邪』 一言,如何便蓋得三百篇之義?” 先生曰:“豈特三百篇? 六經只此一言,便可該貫,以至窮古今天下聖賢的話,『思無邪』一言,也可該貫。此外便有何說? 此是一了百當的功夫。”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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