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실천하는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

기사승인 2019.08.21  17:37:31

공유
default_news_ad1

- 분열을 일으키러 오신 예수님(사5:1-7; 히 12:1-2; 눅 12:49-56)

< 1 >

예수님을 ‘평화의 왕’, ‘화해와 일치의 길’로 이해하는 이들에게 오늘의 누가복음 말씀은 매우 당혹스럽게 들립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눅 12,49-53)

병행말씀이 있는 마태복음은 누가보다 훨씬 더 과격합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에게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마 10,34-35)

누가는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맞서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마태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맞서는 일종의 하극상(下剋上)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부장제와 권위주의가 엄격하게 지배하던 상황에서 갈등과 대결이 억압적인 상하관계에서 일어났음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마태와 누가는 모두 ‘한 집 안에 있는 세대 간의 갈등’을 보여줍니다. 갈등은 언제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법, 멀리 있는 사람과는 갈등이 생길 수도 없지요.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법이고, 특별히 가족 안에서 주고받는 상처는 더 깊고, 분열은 더 오래가고, 증오는 더 지독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평화’와 ‘분열’을 대립시키고 있는데, 마태는 ‘평화’와 ‘칼’을 대립시켜 긴장과 갈등을 더 날카롭게 하고 있습니다. 무기로서의 칼은 평화의 반대말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칼은 모든 것을 갈라놓기에 분열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누가의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에게 불은 ‘성령의 능력’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불은 누군가에는 심판을, 누군가에게는 성령의 은사의 표징이 되는 것이지요.

이 말씀이 마태와 누가에 같이 전승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 말씀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평화의 왕으로 추앙받는 예수님께서 왜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떤 학자들은 이 말씀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필연적으로 분열을 가져 온 당시의 현실, 다시 말해 유대교와의 갈등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안식일 규정 등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자유로운 태도는 필연적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갈등을 가져왔고, 그 갈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저주와 추방, 마침내 유대교로부터의 분열을 초래한 역사를 반영한다는 것이지요.

▲ G&#233;rard Douffet, “The Taking of Christ”(1620) ⓒWikipedia

물론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리고 의도적으로 유대교로부터 결별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후 70년, 유대전쟁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직후, 얌니아(구약성경에는 야브느엘로 등장)로 이주한 유대교 바리사이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정식으로 파문하면서, 모든 유대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전에 그리스도교 이단에 대한 저주를 반복하고, 추방했던 유대교와의 갈등관계가 그 배경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마 10,36)를 덧붙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말씀 뒤에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마 10,37-38)는 말씀을 첨부함으로써, 이 말씀을 제자직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다른 종교적 전통과의 과격한 단절을 의미한다고 이해되어 왔습니다. 선교가 개종과 동일시된 배경이 되기도 했고, 종교문제로 가족이 불화하고 분열하는 수많은 사례들을 만들어 냈지요.

그러나 철저하고도 급진적인 제자직은 타종교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분열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신을 실천하는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 사이의 분열이 그것이지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는 언제나 가까이 있는 법,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가(행 20,28) 역설적이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가 된 것을 우리는 교회의 2,000년 역사 속에서는 물론,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말씀에 ‘때를 분간하라’는 말씀을 덧붙임으로써 ‘평화를 주러 오시지 않고,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른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누가는 청중도 제자들이 아니라 ‘무리’로 바꾸었습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소나기가 오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날이 덥겠다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눅 12,54-56)

새번역은 ‘분간’으로 번역했으나, 영어성경은 ‘해석’(interpret)로, 루터는 ‘판단’(beurteilen)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때는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이 ‘위선자들아!’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식한 자들아!’라고 말하지 않으신 것이지요.

그 사람들은 무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땅과 하늘의 기상을 분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신 것은 그들이 ‘지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변화가 어떻게 땅에 영향을 끼치는지 자연현상을 분간할 줄은 알았지만,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분간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리가 분간할 줄 알았어야 할 ‘때’는 어느 ‘때’를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학자들은 곧 다가올 유대 전쟁, 즉 로마 제국에 의한 유대의 완전한 멸망이라는 정치적, 군사적 사건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역사의 종말 자체가 임박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시대는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유대 지배층은 ‘위기의 시대’를 분간할 능력은 있었으나, ‘시대의 위기’를 변혁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칼 맑스가 말했듯이 ‘철학의 과제는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세계의 변혁’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시대를 해석할 줄 알았지만, 시대를 바꿀 의지를 갖지 않고, 기존의 질서에 기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변혁보다는 ‘현상유지’(status quo)가 더 그들에게 이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의 식민통치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아니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른바 ‘친일파’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시대를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빠르게 일제에 빌붙어 사는 것이 때를 잘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립에의 의지가 없었기에 일제가 망할 때가 온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일제의 식민통치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아니 지속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던 것이지요.

< 2 >

자기 시대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에, 기상의 변화는 해석할 줄 알면서, 이 ‘때’, 곧 ‘카이로스’로서의 시간은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예언자 이사야 시대의 유대 백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앗시리아의 침략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통치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해서 자기 집을 가득 채웠고, 예루살렘의 여인들의 사치는 극에 달했습니다(사 3,14-24). 주님은 자기 백성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지만,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고,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지만,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었습니다.(사 5,7)

부정한 백성들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하나님은 스스로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그 때, 이사야가 아뢰었습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사 6,8)

이사야가 감히 자기를 보내 달라고 말한 것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거나,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자기도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는, 입술이 부정한 한 사람임을 알고 부르짖었습니다(이 6,5).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의 악은 사라지게 하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셨기에, 이사야는 담대하게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이사야는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을 예언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하고,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도 알지는 못한다’하고 일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사 6,9-10)

참으로 말하기도 무서운 고통스런 심판입니다. 행복과 번영을 선포하는 예언자는 존경과 추앙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통치자와 백성이 듣기 거북한, 아니 듣기를 원하지 않는 심판을 선언해야 했습니다.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시대를 깨닫지 못하는 둔감함, 변화에 귀를 막고 눈을 감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심판입니다. 더 무서운 심판은 회개의 가능성마저 차단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런 심판을 선언해야 했고, 그 선언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성읍들은 황폐해져 주민이 다 없어졌고, 집들은 비었습니다. 밭은 모두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먼 나라로 흩어지게 되었고, 겨우 남은 사람들도 불에 타 죽었습니다.(사 6,11-13)

그러나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임을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사 6,13). 잿더미에서 새 싹을 피우는 그루터기 같은 사람들, 이들은 주님께서 땅 끝까지 주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뭇 민족의 빛으로 삼은 사람들이었습니다(사 49,6)

그루터기 같은 사람들, 이들은 권력은 없어도 의지는 있었던 사람들, 잿더미가 된 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민족이 걸친 수의를 찢어서 벗기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사 25,7-8)

< 3 >

이런 의지, 이런 희망, 이런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낡은 세상과 대립하면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합니다: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가라’고.

신앙생활을 ‘달리기’에 빗대어 설명한 것이지요. 달리기 선수가 몸에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달릴 수 없듯이, 신앙인은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히 12,1)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우리가 짊어지는 갖가지 무거운 짐, 우리 어깨를 짓누르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 우리 발목을 끈질기게 잡고 있는 죄를 벗어버리고, 오직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과거와 현재와의 단절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를 참으심으로써,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계신다’는 고백은 사도신경에도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왜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일까요? 본래 왕의 오른쪽에는 적장자가 앉게 되어 있던 고대의 전통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성경의 관용구적 표현은 시편 110편 1절과 관계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천사들과 사제들과 족장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서 있다’는 것은 섬김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의 보좌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 4 >

예수님은 유대교 율법주의와 부딪치시면서 불화하셨고, 그 결과 십자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눅 12,51)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결코 폭력으로 세상을 바꿀 것을 선동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힘이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신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화는 세상의 평화, 오직 힘에 의해서만 지켜지고 유지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평화가 오히려 세상을 분열시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는 분열되지 않은, 총체적인 행복으로서의 ‘샬롬’입니다. 이 샬롬은 어떤 힘에 의해서도 분열될 수 없고, 어떤 칼로도 위협받지 않는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짜 평화’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무기가 침묵하는 기간’, 혹은 ‘이미 일어난 전쟁과 앞으로 일어날 전쟁 사이의 기간’으로 정의되는 소극적인 의미의 평화, 혹은 ‘냉전’이나 ‘저강도 전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평화는 갈등을 감추거나, 다툼을 잠시 유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값싼 평화’, ‘위장된 평화’입니다. 차라리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맞서듯이, ‘가짜 평화’의 정체를 밝혀주는 분열이 ‘진짜 평화’를 찾는 길임을 뜻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평화를 찾는 이들은 가짜 평화의 거짓 안정을 폭로하고, 다툼과 분열을 통해 진짜 평화를 찾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