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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대한 하나님-예수의 관심과 사랑이 먼저다

기사승인 2019.08.17  1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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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가 민족에 대한 관심에 한정되지 말아야 이유

20세기 후반의 신학적 담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였고, 그것은 지금도 그 정당성을 잃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에서는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로서 세계에 관여하고 교회는 세계를 섬김으로써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 교회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더 이상 자신을 세계와 동떨어져 있거나 그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자기를 세계 속의 하나로 보고 자기를 낮추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도식으로 나타내면, 하나님과 세계와 교회의 삼자 관계가 그 순서에 따라 하나님-교회-세계에서 하나님-세계-교회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중심 사고에서 탈피하여 세계 중심 사고로 옮겨간 교회의 자기 이해는 변혁적이고 책임적이다.

이같은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보면 예수·교회·민족라는 말은 우선 관심의 방향이 크게 달라졌음이 눈에 뜨인다. 중심을 다시 교회 자체로 옮기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예수를 강조하는 것도 기독교의 자기 이해를 편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예수는 기독교의 존재 근거이지만, 독자적인 존재 의의를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이해했고 우리는 그 안에 있음으로 하나님 안에 있다고 했다. 예수는 하나님 안의 예수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하며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이라고 한다(요 13:44; 15:10 개역개정).

교회가 민족에 대한 관심에 갇히면

민족에 대한 교회의 관심도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이지만, 민족에 그 관심이 갇히면 교회는 비성서적이 되고 말 수 있다. 사도 바울을 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특수한 신분을 강조하고 그들을 변호.옹호하려고 무척 애를 쓰며 심지어 이방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기여한다고까지 말한다(롬10-11).

더 나아가 그는 자기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한다고 할 정도이다. 그렇다고 그가 다른 민족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월성을 주장하진 않는다. '교회 안에서'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방 기독교인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전통으로 이들을 지배하려는 것에 대해 "...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롬 3:22).

그가 보기에 하나님의 그리스도 사건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롬 10:12).  유대인임에 함몰되지 않은 사도 바울이다. 이는 그가 '이방 선교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 사건에서 보편성을 발견하고 그 토대 위에서 그의 민족에 대해 말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는 민족을 이야기할 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우리는 민족을 어떤 점에서 왜 말하는지를 묻게 한다. 성서에서 민족은 세계와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몇몇 구절들을 가지고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

▲ 평화의 왕이신 예수는 가장 낮은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Getty Image

아브라함을 향한 창세기 12:1-3의 하나님 명령은 후대 이스라엘의 자기이해를 잘 보여준다.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어라. 너를 무시하는 자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들이 너를 통해 복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데라와 함께 고향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온 지 오래다. 그가 하란을 떠난 때가 데라의 죽음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본문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분명치 않다. 야훼의 명령 당시 분명한 것 한 가지는 하란에 있는 그의 친척은 롯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1절의 명령이 실제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롯일 수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한 까닭은 뒤에서 분명해진다.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끝까지 롯에게 한없는 애정과 집착을 보인다. 이러한 사정에 비춰볼 때 그 명령에는 롯을 비롯해 그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은 고향 대신 (가나안) 땅을, 친척 대신 큰 민족을, 아버지의 집 대신 그 자신의 큰 이름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다. 과거와 단절된 그에게서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다. 하지만 이 복된 사건은 그 자체가 최종 목표가 아니다.

아브라함과 그 안에서 이스라엘은 타자 곧 이 땅의 다른 민족들에게 복이 되어야 한다. 복은 일종의 흐름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아브라함/이스라엘에게로, 아브라함/이스라엘에게서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로 계속 흘러야 한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복을 매개하는 역할 바로 그것에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스라엘이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보호장치를 마련한다.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약속하고 그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기만 해도 저주로 응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보호 장치 역시 그를 보호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를 보는 모든 다른 사람, 다른 민족들은 그를 축복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다른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지가 한번은 막연하게 또 한 번은 구체적으로 천명되고 있다.

아브라함/이스라엘은 그 의지 실현을 위한 도구인 셈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은 하나님에 의해 촉발된 축복의 상관관계를 지향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그 안에 있는 예수를 이야기하는 교회가 민족과 관련하여 성서에서 듣게 되는 첫 번째 소리이다.

민족만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

이 소리는 특히 예언서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사야 2:1-4는 모든 민족들이 야훼의 집이 있는 산 곧 야훼의 산으로 밀려오는 역사적 종말의 모습을 그린다(미 4:1-5도 참조). 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그 민족들이 하는 말에서 추론해낼 수 있다. “(야훼)가 그의 길에 대해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는 그의 길은 따라 살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야훼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끼친 영향 때문일 것이다. 야훼의 말씀이 이스라엘 안에서 실천될 때 야훼의 응답이 만들어내는 이스라엘의 현실이 그들로 하여금 야훼를 찾게 하는 동기이다.

이것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본 그/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반영한다고 충분히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야훼의 응답은 평화이다. 야훼가 민족들과 민족들 사이의 갈등과 시비를 판결하므로 그들 사이에는 전쟁 도발 이유가 더 이상 없다.

따라서 군대도 무기도 보유할 근거도 명분도 없어진다. 군대와 함께 전쟁 훈련은 사라지고 무기들은 해체되어 농기구로 재생산된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약탈을 위한 정복 전쟁도 소멸된다. 현실 세계에서 소위 강대국들이 누리는 우월한 지위도 소멸된다. 이스라엘과 야훼의 관계가 이보다 더 큰 축복을 세계에 선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스라엘의 숫자가 많아서도 아니고 지혜가 뛰어나서도 아니고 힘이 강해서도 아니다. 오직 야훼가 그를 의지하고 그의 말씀을 살아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평화의 현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숫자와 군사력 내지 경제력에 의지하고 강대국을 추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성서에서 누누히 이야기하는 대로 야훼에 대한 불신앙이다(호 10:13 비교).

실제로 이스라엘은 번성할수록 하나님에게 범죄하였다(호 4:7). 이것은 교회 이해에도 그대로 전용된다. 이를 비현실적이라고 하며 거부하려는가? 그것은 야훼의 계획을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야훼의 팔을 사람의 팔로 대체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암 6:13  비교).

스가랴 9:9-10은 그와 같은 역사적 종말에 앞서는 단계를 그린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 야훼는 정의와 평화를 수립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눈길을 끈다.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야훼는 한 왕을 약속하지만, 그에게서 일반적인 왕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네 왕이 네게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고, 겸손하고 나귀를 타시는 이, 그것도 어린 나귀 곧 나귀 새끼를 타시는 이다. 그가 에브라임의 마차와 예루살렘의 말을 없애고 전쟁 (무기인) 활도 없어질 것이다. 그는 이방 사람에게 평화를 말하고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여느 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왕이다. 현실에서 공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왕은 매우 적지만 그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겸손하고 군사용으로 적합하지 않은 나귀를 타는 왕은 기대하기 어렵다. 야훼는 바로 이런 왕을 약속한다. 그가 나귀를 타는 것은 일시적이 아니라 일상적이다. 그는 정복군의 상징인 전차를 폐기할 것이다. 그것을 끄는 말도 없앨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차에서 쏘는 활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에게서 드러난 야훼의 전쟁 폐지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어린 나귀 타고 오는 모습은 평화가 도래했음을 공표한다.

하지만 평화의 행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다른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언한다. 다른 민족들은 약탈과 정복 대상이 아니다. 성서에서 평화는 단순한 전쟁 폐지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 수립의 결과이다. 다른 민족들은 그 왕과 그의 통치에서 야훼를 보고 이사야 2:1-4에 보도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다.

예수, 정의와 평화의 왕

이같은 사유 패턴이 마태복음 5:16에서는 개인적 차원에 적용되고 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착한 행실의 실제 내용은 ‘정의와 평화’이다.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삶이어야 하지 않는가? 교회가 스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오만이요 타락일 것이다. 교회는 그 삶으로서만 ‘빛’이 될 수 있다.

나귀 타는 왕의 모습은 이사야 42,1-4.5-9에 나오는 종의 모습과 비교될 수 있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위압적이지 않다. 이런 저런 이유로 상하고 지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짓밟지 않는다. 이들을 위해 진리를 따라 정의를 시행한다. 상한 곳을 보듬고 시들어가는 것에 새 힘을 준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로 그렇게 한다. 그는 그렇게 온유하고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영예를 꾀하지 않는다. 그를 힘들고 괴롭게 하는 일들이 분명 있을 것이나 그 때문에 실망하거나 약해지지 않는다. 세상에 정의를 세워지기까지 그의 일은 계속된다. 다른 민족들에게 정의를 베푸는 것이 그에게 영을 부어주신 하나님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은 세상의 정의를 위한 영이다. 정의는 하나님의 영이 일하는 방식이요 목표이다. 그 목표에 이른 상태가 평화이다. 그러면 다른 민족들은 그 왕이 따르는 ‘법’(토라)에 대한 갈망으로 응답한다. 그는 이스라엘에게는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며 ‘어둠 속’ 다른 민족들에게는 하나님을 찾고 기다리게 하는 ‘빛'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시선은 이스라엘이나 어느 한 민족에 고정될 수 없고 교회에 한정될 수 없다. 하나님의 시선을 좇는 교회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하겠는가?

교회의 관심, 정의와 평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그 목표는 당연히 세상을 구원하는 데 있다(요 3:16-17). 그렇기에 그는 “세상의 구원자”(소테르 투 코스무)로 일컬어진다(요일 4:14). 교회가 이 진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세계 안에서 교회의 위치와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결정될 것이다.

구원이란 그 안에 머무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이다. 어떻게 그 안에 그리고 하나님 안에 머물 수 있는가? 사랑함으로써다. 사람은 사랑함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 안에 있을 수 있다(요일 4:16; 요 14:20-21.23; 15:10도 참조). 그 아들의 삶과 죽음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수 있는 길은 사랑하는 것 외에는 없다.

‘세상의 구원자’가 사랑으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데, 교회가 그 일에 참여하는 길은 사랑뿐이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또다시 사랑이 무엇인가를 물으려 하는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구체화하는 누가복음 4:17-19과 사랑과 영원한 생명의 관계 그리고 이웃에 대해 말하는 누가복음 10:25-37이 그 답이다.

이것이 물론 민족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성서의 입장을 다 드러내는 것일 수 없다. 아주 제한적이나마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추적하고 그 바탕 위에서 세계와 민족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가 마련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다행이다.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민족으로 좁혀지지 않기를 빈다. 하나님 안의 예수를 보고 또 예수 안의 하나님을 봄으로써 세계에 대한 하나님-예수의 사랑에 사랑으로 참여하는 교회가 많아지면 교회는 이 민족에게 희망이 될 것이다.

김상기 교수(한신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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