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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맹과 조국 법무부장관 내정자

기사승인 2019.08.15  17: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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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아닌 전위적 학생운동조직 사노맹 논란

서울대 조국 교수(법학과)가 법무부장관에 내정되면서 때아닌 이념 논쟁이 펼쳐지고 있다. 자유한국당에서 연일 조 내정자의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이력을 문제삼고 있다. 한국당은 연일 논평을 쏟아내며 부적격자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조국 법무부장관 내정자를 향한 색깔 공방

특히 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국가 전복(顚覆)을 꿈꿨던 사람이 법무부 장관이 될 수 있는가. 사노맹은 무장봉기와 사회주의 혁명 달성을 목표로 폭발물을 만들고 무기 탈취 계획을 세우며 자살용 독극물 캡슐을 만들었던 반국가 조직”이라 평가하며 조 교수의 내정을 비판하고 있다.

▲ 조국 전 민정수석이 법무부장관에 내정되면서 과거의 사노맹 활동이력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News1

이와 맞물려 일각에서는 장관의 자질을 평가하는 국회 인사청문회가 자칫 ‘색깔론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장관으로서 얼마나 능력을 갖췄느냐 보다는 과거 사회운동 경향을 문제삼아 청문회가 호도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이다. 청문회의 파행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이를 의식한듯 조 내정자의 발언이 이목을 끌고 있다. 즉 조 내정자가 “저는 28년 전 그 활동을 한번도 숨긴 적이 없다.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고 밝힌 것이다. 청문회를 앞두고 야당의 ‘색깔론’을 역으로 적극 공략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노맹 사건의 전말

이러한 상황이 연출되자 사노맹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사노맹이 사건이 무엇이냐를 넘어 사노맹 자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먼저 사노맹 사건은 1990년 발표된 혁명조직 사건으로, 정보기관에 의한 고문·조작 사실이 밝혀진 대표적인 공안 사건이다.

이 당시 조 내정자는 징역 2년 6개월에 자격정지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94년 6월 열린 2심 재판에서는 형량이 줄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다. 죄목은 사노맹 산하 남한사회주의과학원(사과원) 설립에 참여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선고한 것이다.

이러한 선고는 사과원 설립이 사노맹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을 뿐 국가 변란을 일으킬 목적이 없는 만큼 ‘이적단체’로 분류돼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이적단체’라는 것은 반국가단체 활동에 동조할 것을 목적으로 삼을 경우에 쓰이는 용어이다. 이에 반해 국가보안법은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직접적이고 1차적인 목적이 있을 경우 반국가단체로 분류한다.

실제 조 내정자는 93년 6월 국보법 위한 혐의로 구속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95년 5월 대법원은 조 후보자에 대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확정했다. 이후 사노맹 관련 핵심 인물들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98년 8월 15일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났고 99년 3월 1일에는 사노맹 관련자들이 모두 특별사면 및 복권 조치를 받았다.

2008년에는 국무총리 산하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보상심의위원회’가 사노맹 핵심 인사들을 민주화 운동 인사로 인정했다.

국제 엠네스티, 사노맹 관련자들은 양심수

특히 사노맹 사건에 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당시 세계인권감시기구인 국제 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의 활동이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국제 앰네스티가 조 내정자를 양심수로 분류한 것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국제 앰네스티는 94년 7월 ‘94년 연례보고서’를 통해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거나 가혹 행위를 받은 정치범 및 양심수’로 사노맹 관련자들을 포함시켰다.

그 당시 국제 앰네스티 ‘94년 연례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기존의 양심수를 포함하여 250여명의 정치적 수인들이 구금되어 있다. 대부분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기소되었으며 일부는 불공정한 것으로 보이는 재판을 받은 후 구금되었다. … 사노맹은 정부 당국에 의해 ‘반국가 조직’으로 간주됐으며 이 단체를 지지하거나 가입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해 30명 이상이 체포됐다. 이들 중 일부는 사노맹과 관련이 없으며 양심수다.”

또한 동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도 명시해 놓았다.

“6월에 국가보안법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조국 교수를 포함한 9명의 양심수인은 사회주의과학원에 소속됐다는 혐의와 소위 사노맹과 연관됐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 국제 앰네스티는 양심수를 석방하고 고문과 가혹 행위를 중단하고 공정한 조사를 할 것을 촉구한다. 또 한국정부에 정치적 수인을 구금하는데 이용하는 국가보안법과 다른 법률을 개정할 것과 장기수의 사례에 대해 재조사할 것을 촉구한다.”

국제 앰네스티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사노맹 사건의 재판과정에서는 공안당국의 고문·조작 사실이 실제로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 이 당시 안기부 등에 연행됐던 인물들은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한 채 옷이 모두 벗겨진 상태에서 구타를 당했다고 폭로했다. 고문에 못 이겨 사노맹에 가입했다고 허위로 진술한 사람도 있었다.

사노맹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도 당시 공판에서 진행된 취조 과정에서 고문이 행해져 3번이나 실신했다고 폭로했다. 은수미 성남시장은 당시 고문 후유증으로 소장과 대장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결핵이 후두로 번져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노맹, 전위적 학생운동조직 중의 하나

그렇다면 사노맹이란 무엇일까. 사노맹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최대의 비합법 사회주의 혁명조직으로 평가된다. 사노맹의 탄생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정치투쟁의 중심축 이동과 관련이 있다.

1970년대까지 정치투쟁의 중심은 학생운동이었으나, 광주항쟁 이후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가거나 노동운동의 성장을 지원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구성되었다.

1985년 말 학생운동은 변혁론을 바탕으로 NL(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진영)과 CA(제헌의회그룹)가 대립하게 되면서 이후 변혁운동진영은 NL진영과 반 NL진영으로 양분되었다. 여기서 제헌의회란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기 전에 설치되는 의회를 일컫는다. 기존에 있던 국가의 기존 헌법과 국가체제를 바꿔 새로 건국된 국가에서 새로 건국된 국가의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전에 설치되는 의회라는 것이다.

다양한 학생운동조직 중의 하나인 ‘제헌의회그룹’은 1986년 초부터 활동한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의 학생운동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다. 사노맹의 전신인 ‘제헌의회그룹’은 구 소련 혁명의 중심이었던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원적인 전위당 조직원칙에 따라 ‘사상적 중앙’과 ‘실천적 중앙’의 분리 지도부 구성을 목표로 했다. 제헌의회 조직은 1986년 말부터 검거되면서 조직적으로 붕괴되었다.

하지만 제1차 제헌의회조직 중간지도부가 조직을 재건하면서 제2차 제헌의회그룹의 지도부로 나섰다. 그들은 조직명을 ‘노해동’(노동자해방투쟁동맹)이라고 명명했다. 1987년 대선 및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과정에서의 의견차를 보인 ‘노해동’의 소수파는 ‘사회주의를 명확히 내건 노동자계급의 전위전당 결성’을 목표로 ‘노해동’으로부터 분리된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출범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사노맹의 출발이다.

▲ 사노맹 핵심 인물 중의 하나인 노동자 출신의 시인의 시집 ⓒGetty Image

사노맹, 전태일의 후예들

1988년 6월 1일 ‘사노맹 출범의 역사적 의의와 사노맹 준비위의 당면임무’라는 창립취지문을 작성·배포함으로써 준비위원회 상태에서 조직의 정식 결성을 준비했다. 1989년 11월 12일 ‘지역별·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가 주최한 서울대 집회에서 사노맹 출범 선언문을 발표하여 공개적으로 그 결성을 선언했다. 사노맹은 각종의 유인물과 책자, 월간지 『노동해방문학』 등을 통해 “노동자 중심의 민중통일전선 형성 → 노동자 전위당 결성 → 무장봉기를 통한 혁명 → 민중공화국 수립 → 자본주의 철폐 및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전국 규모의 조직을 결성했다.

하지만 사노맹은 1991년 4월3일 조직의 중심인물이 검거되고, 1992년 4월 29일 조직총책 중앙상임위원장을 비롯 조직원 등 39명이 잇달아 구속됨으로써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에 대한 구속과 재판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이 당시 사노맹의 핵심 인물 중의 하나인 노동자 출신 시인의 시와 시집은 여전히 회자되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을 시작으로 전두환·노태우 군부개발독재 체제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앞세워 착취했던 노동자들의 해방을 기치로 내세운 것이다. 노동자 출신 시인의 “시다의 꿈”은 대표적인 노동문학으로 손꼽히고 있다.

<시다의 꿈>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흘리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 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 타이밍정이라는 불리는 이 약은 1980년대 대표적인 졸음 예방약이었다. 수험생들이나 특히 공장노동자들이 졸음을 예방하기 위해 많이 사용되었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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