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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심성과 문화속의 ‘없음’ 이해

기사승인 2019.08.11  1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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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류영모의 텅빔과 성스러움 (5)

서양의 문화와 역사에서는 존재, 즉 ‘있음’이 주도적인 근본 낱말이었다. 존재에 대한 이해가 일상생활을 각인했고, 학문세계를 이끌었고, 예술세계와 종교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관계맺음, 다시 말해 자신과의 관계맺음, 타인과의 관계맺음, 사물과 도구와의 관계맺음, 문화와 역사와의 관계맺음, 초월과의 관계맺음 등 모든 관계맺음이 존재이해의 지평 안에서 펼쳐졌다. 서양의 역사는 시간 속에 주어진 존재의 ‘자신을-보냄’에 인간이 응답해온 역사이다.

그렇지만 우리 문화와 역사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삶, 생각과 행위를 각인하고 이끌어온 근본 낱말은 ‘있음’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있음’은 ‘없음’을 배경으로 한 ‘있음’,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한다면, 없음의 지평 안에서 있음이다.

우리에게는 없음이 있음보다 더 근원적이다. 바로 이 점이 서양과 우리를 갈라놓는 가장 큰 구별점이다. 우리는 있음의 관점보다는 없음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 근본적인 ‘존재관’의 차이에 말미암은 서로 다른 삶의 모습과 사유 태도 그리고 행동 양태를 여기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겠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의 생활세계를 각인하며 우리의 삶의 문법을 형성하고 있는 근본 낱말인 ‘없음’의 의미구조를 파헤쳐 보는 것이다.

서양말의 ‘없음’은 거의 ‘있음’에 대한 부정으로 쓰여서 그 낱말 형태도 부정의미의 전철이나 부정사를 사용한 형태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독립된 긍정적인 의미 차원을 갖는 것이 드물다. 그러나 우리말의 경우는 다르다.

다음에서 ‘없음’이 가리키는 의미구조를 찾아내어 그 구조계기들을 하나씩 밝혀보기로 한다.

없앰: 가이-없다, 그지-없다. 무한 부정 그 자체(無, Lichten)

우선 ‘없앰’ 그 자체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말로 ‘가이 없다’고 표현되는 사태에 주목해보자. 없앰은 ‘가’, 즉 끝, 테두리, 한계, 형상, 형태, 모습의 단순한 없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절대부정의 작용을 일컫는다.

모든 ‘것’을 없애는 부정 그 자체 말이다. 이것은 마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잡아먹어 무화시켜 버리는 ‘블랙홀(검은 구멍)’에 비유될 수 있다. 없앰은 모든 끝, 즉 모든 ‘가’를 갉아먹어 사라지게 만드는 저 텅빔에 다름 아니다.

어느 것도 이 텅빔의 흡인력 앞에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가이-없는 텅빔’ 속으로 빨려 들어가 가이-없는 고요 속에 머문다. ‘가 없는 텅빔 그 자체’가 곧 늘 ‘없앰’인 것이다.

▲ 한국과 동양에서 무 혹은 없음의 상징 ⓒGetty Image

없음은 근원적으로 보자면 ‘가이-없음’이다. 이 ‘가이-없이는’ ‘가를-없앰’에 터하고, 이 ‘가를-없앰’은 다시금 ‘없앰’ 그 자체에 바탕한다. 없앰은 자신마저도 없애 마침내 오직 텅빈 없음만이 ‘있을’ 뿐이다. 내용물은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턱 트인 들녘만 있을 뿐이다. 내용은 없고 형식만이 있을 뿐이다. 얼개는 없고 바탕만이 있을 뿐이다.

없앰 그 자체는 공간 안에 등장하는 가 있는 모든 사물들의 ‘가’를 없앨 뿐 아니라, 이 공간의 ‘가’까지 없애 무한한 공간, 가이-없는 공간, 텅빔 그 자체, 빈탕한데, 끝이 없는 일자, 온통 하나(한, 한 나)를 이룬다. 그것은 또한 시간 안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의 시작과 끝을 없앨 뿐 아니라 시간 자체의 ‘가’까지도 없애 가이-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시간, 끝없이 이어지는 ‘늘-그러함’을 만든다. 가이-없는 공간, 가이-없는 시간, 이 둘은 본디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그것을 하나이며 전체로 묶어서 이름한 것이 ‘한늘’, ‘하늘’, ‘한’, ‘하나’, ‘한 나(大我)’이다.

‘하늘’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일상적으로 일컫는 근본 낱말인 셈이다. 하늘은 하나이고 온통이다. 그 많은 별들이 생겨났다 사라지지만 하늘은 더 넓어지지도 않고 더 늙어지지도 않는다. 늘 그러한 텅빈 온통이다. 하늘이 그렇게 늘 그러한 텅빈 온통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갖고 있는 ‘없앰’의 힘 때문이다.

이 ‘가이-없는’ ‘가를-없앰’의 바탕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를 받아(1) 주어진 ‘빔-사이’를 이으며(채우며) 주어진 ‘때-사이’를 잇다(살다, 사르다)가 다시 ‘가이-없어져’ ‘가이-없는’ 텅빈 온통 속으로 돌아가 다시 텅빔과 하나 된다.

가이-있는 모든 것은 오직 이 가이-없는 텅빈 온통을 배경으로 하여 자신의 ‘가’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텅빈 ‘빔-사이’가 아니라면 ‘가’는, 즉 형태, 모습, 형상은 그것이 무엇인 바 그것일 수가 없다. 다시 말해 텅빈 온통으로서의 ‘없음’, ‘무(無)’가 모든 유(有), 있음의 유래이며 가능조건이다. 이러한 맥락 아래에서 우리는 무극과 태극의 관계, 공(空)과 색(色)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텅빈 온통으로서의 없음의 상태는 한마디로 ‘깨끗함’이다. 모든 끝이 완전히 다 깨뜨려진 가이-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끝을 다 깨어버리는 부정 그 자체의 체험을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나 자신의 끝까지도 깨져 다다르게 된 체험이 곧 ‘깨달음’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깨지고 나 자신도 깨져 존재하는 것 속에 빠졌던 상태에서 깨어나 이제 비로소 나의 근원이고 바탕인 텅빈 온통 하나와 하나되는 체험이 곧 ‘깨우침’이다.
독일어로는 Lichten, Freimachen, Vernichten, Nichts, absolutes Nichts 등의 낱말이 우리가 설명한 사태와 연관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텅빔: 텅빈 온통, 열려 있음 그 자체(空, Offenheit)

앞에서 우리는 없음의 일차적 의미구조로 ‘가를-없앰’을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두 번째로 다루려고 하는 비움 또는 텅빔은 ‘없음’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앞의 것이 작용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여기에서는 상태에 주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무한 부정이 강조되었다면 여기서는 가능조건이, 절대긍정이 부각된다.

텅빔은 가이-없는 텅빔과 가이-없는 ‘늘-그러함’을,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다 함께 고려해 넣은 온통 하나, 절대공 또는 단일허공의 상태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텅빈 온통’이 순전히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마당만은 아니다. 하늘 아래 땅 위에서, 아니 ‘한늘’, ‘하늘’ 속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그 모든 삼라만상과 사건들을, 나아가 앞으로 생겨났다 사라질 그 모든 만물들과 사태들까지도 포함한 무한한 ‘빔-사이’와 영원한 ‘때-사이’를 하나의 온통으로 생각한 것이 여기에서 말하려는 차원이다. 무극과 태극을 헤아린, 공(空)과 색(色)을 포괄한 하나이며 전체로서의 텅빔을 말하는 것이다.

앞에서 모든 세움을 쓰러뜨려 ‘빔’을 만들어내는 부정의 작용이 강조되었다면 여기에서는 생겨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끝이 없는 되풀이, 되삭임, 되먹임의 맴돌이 과정과, 그런 과정 속에서 온통 하나의 텅빔이 이르게 되는 됨됨이에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 끊임없이 되어감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존재발생의 사건이 벌어지는 텅빔의 마당을 이름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열린 마당, 열린 터 또는 열려 있음 그 자체라고 지칭한다.

이러한 구조계기에 대한 우리들의 체험은 각양각색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단순하고 장엄하고 원대하다. 끊임없이 터져 나와 끝없이 펼쳐져 나가는 생성 그 자체의 끝없이 되풀이되는 시원적인 비롯됨을 우리는 ‘한’, ‘하나’, ‘한 나(큰 나, 참 나)’라고 부른다.

이 하나의 텅빈 온통은 모든 펼쳐진 것을 자기 안에 포개어 간직한 단순한 것(das Einfache, Einfalt, 포갬 그 자체)이다. 이 단순함이 펼쳐 보이는 장대한 생성소멸의 사건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벗어난 엄청난 것, 장엄한 것이다. 일어나고 있는 개개의 사물들과 사건들, 사태들에 매달린다면 우리는 전체를 잃어버리고 만다. 절대를 놓치고 상대에 매달려 상대의 관점에서 유한한(가이-있는) ‘있음’만을 보게 된다.

온통 하나인 텅빔에 알맞은 우리의 태도는 침묵이다. 장대한 생성소멸의 사건들이 펼쳐지는 저 가이-없는 빔-사이와 때-사이의 고요와 적막을 느낄 수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한다.

이 구조에 해당되는 독일어는 ins Freie, ins Offene, die Offenheit 등이라 할 수 있다.

미주

(미주 1) 존재하는 것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가’를 받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무로부터의 창조, 일자에서부터의 유출, 무극에서 태극, 태극에서 음양의 생성 등과 같이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다. 여기 우리의 논의에서는 우주의 살림살이의 대원칙이 ‘나눔’과 ‘비움’이라는 것만을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빔-사이’와 ‘때-사이’를 잇는 찰나적인 있음으로서 잠시 ‘없음’과 ‘없음’ 사이를 잇다가 ‘없음’ 속으로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때의 사라짐이 ‘절대무’로의 사라짐인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의 바뀜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단 한번 존재하게 된 것은 절대무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힘을 사르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나누면서 우주의 생명운동에 동참하다가 결국 자신을 비워 우주의 생명력 안으로 흡입되어 버린다. 개체의 존재자들을 흡입한 우주의 생명력은 끊임없이 다른 것을 생성해낸다. 여기에서 우리의 논의는 ‘없음’의 관점에 한정되기에 이러한 존재생성의 사건들은 다루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이기상 명예교수(한국외대) saemo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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