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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성대 신학과 이진경 교수, 예수의 그림자를 다시 보다

기사승인 2019.08.08  17: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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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트 타이센,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비아) 재출판

“태양이 비치지 않는 순간에 나는 태양의 존재를 믿는다. 혼자일 때도 나는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도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1945년 독일 쾰른의 지하실 벽에서 발견된 낙서

종교문학을 이 문구에 빗댈 수 있지 않을까. 종교의 창시자들이나 중요한 인물을 다루어 종교적 진리나 사상을 이야기 하는 문학 말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상관없이.

엔도와 타이센

▲ 협성대학교 신학대학 이진경 교수가 독일의 저명한 신약성서신학자 ‘게르트 타이센’의 명저, 『갈릴레아 사람의 그림자』(비아, 2019)를 다시 번역해 출판했다. ⓒ이정훈

늘 ‘가까운 이웃 나라’라는 정형구가 따라 붙었지만, 이제 이런 정형구를 쓰기에도 곤란한 형편이 된 일본의 작가 ‘엔도 슈샤쿠’의 소설은 이러한 종교문학의 커다란 성취로 회자된다. 그의 작품 속에는 신이라든가 예수는 늘 간접적이다. 오히려 그 예수를 둘러싼 사람들이나 혹은 후대에 예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드러날 뿐이었다.

이런 엔도 슈샤쿠의 문학과 비교해봄직한 소설이 한 권 1988년 성탄절이 지나 한국어로 번역·출판되었다. 독일의 신약성서학자 게르트 타이센(Gerd Theißen)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Der Schatten des Galiläers. Historische Jesusforschung in erzählender Form)였다. 자신의 전공을 넘어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경우에는 에세이 류가 대부분이지만 소설을 발표했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의 특이점이었다.

책의 성공을 판매부수와 다른 언어로의 번역이라는 속물적인 기준으로 판단해 본다면 타이센의 이 책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1986년 독일에서 처음 출간한 이래 독일에서만 75쇄를 찍었고, 영어·프랑스어·덴마크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중국어·일어 등 19개나 되는 언어로 번역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어 번역본도 원저가 출판된지 2년이채 되지 않은 1988년에 번역되었으니 원저의 출판과 더불어 번역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첫 번역자인 한신대 독문학과 차봉희 명예교수는 독문학에서 위상이 높았던 학자였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독문학을 전공한 학자답게 번역도 가독성이 높았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출판사의 사정 때문이었을까 이 번역본은 절판되고 말았다.

새로운 번역 통해 몇몇 오류도 바로잡아

▲ ‘게르트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는 1988년 한신대학교 독문과 차봉희 명예교수에 의해 번역되어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했었다. ⓒGetty Image

그런데 기자에게도 익숙한 학자가 이 책을 재번역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출판사를 옮겨 다시 출판되는 것도 아니고 다시 번역 출판한다니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에게도 이 책은 그저 단순한 책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훌륭한 번역본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재번역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기꺼이 도맡은 협성대학교 신학과 이진경 교수를 만나 이 책과 관련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진경 교수를 만날 때면 늘 느끼는 유쾌와 상쾌 그리고 그 밑을 통과하는 유머와 웃음이 가득한 인터뷰였다.

만나자마자 이 교수는 이 번역이, 독일어에 워낙 뛰어난 학자인데 겸손하게도, 자신의 번역이 가독성이 높다면 출판사 노력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존에는 번역을 출판사에게 넘기면 편집부에서 오타나 매끄럽지 못한 문장들을 다듬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비아” 출판사는 책을 출판하기 전 3회에 걸쳐 번역자인 이 교수와 함께 독회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저 단순히 읽어보는 수준이 아니라 3일에 걸쳐 어느 날은 반나절 가까이를 그 자리에서 꼼꼼히 번역을 대조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차 명예교수님이 연구활동을 하던 시절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났던 옛스러운 문체가 많이 수정될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이진경 교수가 진행했던 개인적인 번역 과정에서도 원저에 나타났던 저자의 사소한 실수라든지 기존 번역의 많지 않은 실수도 찾아내어 이번 번역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2년의 수고가 이번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오히려 흥미 가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이전에는 역사적 예수 연구 자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었지만, 이책을 번역과정에서 오히려 역사적 예수 연구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를 대하는 많은 사람들, 아니 이미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종언(終焉)을 고(告)했던 그 옛날부터 있어왔던 현상이었는데, 이진경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역사적 예수 연구에로의 한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진경 교수의 회심이라 부를 수도 있을까.

서울 도심 한 카페에 앉아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였다. 인터뷰를 가장한 기자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따뜻함과 웃음으로 인터뷰에 응해 주신 이진경 교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협성대 신학과 이진경 교수의 번역으로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가 ‘비아’출판사에서 재출판되었다. ⓒ이정훈

다음은 이진경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제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90년대 중반 즈음이었습니다. 차봉희 명예교수님의 번역본이었습니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으셨지만, 독문학에서 위상이 높으신 분이었기에 번역이 좋았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출판사의 요청이 있었겠지만, 이 책의 재번역을 결정하신 이유가 있으셨을까요?

일단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성과들을 소설 형식으로 잘 녹여낸 이 좋은 책을 더 이상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재번역을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절판된 지 꽤 오래고 그럼에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중고로 무려 10만원이 넘게도 판매가 되고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더 나은 번역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선 재출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결정을 한 셈입니다. 물론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건 저를 선택한 편집자의 눈을 믿기로 했죠.(웃음)

▲ 저도 타이센 교수의 원전, 이 책은 아니었지만, 책을 끙끙거리고 들여다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쉬운 문체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소설이라는 장르이지만 번역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이 어떤 것이었나요?

모든 번역이 겪게 되는 어려움을 제외한다면, 형식이 소설이긴 하지만 책의 목적이 문학적 감성에 대한 호소보다는 정보를 잘 전달하는데 더 중점을 두고 있어서인지 생각보다 문체가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타이센 교수가 쓴 다른 전공서적보다는 읽기가 한결 수월했다고 할 수 있겠죠.

▲ 번역 작업이라는 것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번역을 마치고 나서도 늘 아쉬움이 남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무엇이었을까?

1차 언어인 외국어를 2차 언어인 모국어로 옮김에 있어 단어의 선택이나 문체나 더 적확한 표현이 있지 않았을까에 대한 고민은 불가피했던 것 같습니다. 외국어를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한계적 어려움이 가장 안타까웠던 것 같습니다.

▲ 이건 굉장히 실례되는 질문일수도 있겠지만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요, 차봉희 명예교수님의 번역과의 차이점 혹은 더 나아진 점은 무엇이라고 평가하세요?

사실 차봉희 선생님은 독문학을 전공하신 분이신지라 그분의 번역 자체가 이미 부담이었습니다. 저는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아예 처음엔 차봉희 선생님의 번역을 보지 않고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차 선생님의 번역에서 목차를 보자마자 바로 선생님의 아우라를 벗어나기 힘들겠다 싶은 기분이 들어 아예 보지 않고 시작하기로 한 거죠.

오히려 나중 후반부에 들어서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차 선생님의 번역을 참고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때 차 선생님의 번역을 보고 새로 번역하길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죠.

차 선생님의 번역이 미흡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번역의 어투가 이미 8,90년대의 것이었습니다. 아, 지금의 말투로 다시 번역을 했었어야 했구나,라는 생각이 확실해졌죠.

그리고 소설적 요소와 독일어적 요소 이외에 신약학과 관련된 부분이라면 독문학을 전공하신 차 선생님에 비해 성서신학을 전공한 제가 일정 정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더불어 들었습니다. 편집진의 생각이 그렇기도 했고요.

실제로 그런 면에서 개선된 부분들도 몇 군데 있었습니다. 그런 점이 차 선생님의 앞선 업적에 그래도 뭔가 조금 더 보탬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역사적 예수 연구에 그간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 번역 작업을 통해 오히려 역사적 예수 연구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하는 이진경 교수 ⓒ이정훈

▲ 앞선 질문에서 언급했지만 이 책의 장르는 소설입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 소설에 가깝습니다. 역사 소설이라는 것이 깊은 역사적 이해가 없으면, 그야말로 소설이 되기 쉽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 분야에서 워낙 대가인 저자인지라 이 책에서 역사적 예수의 역사성이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옮긴이의 말에서도 적었지만 역사소설의 대가 움베르토 에코는 역사소설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역사소설은 실제 사건을 허구화한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허구’

진정한 역사소설은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적 실재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만들지요.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는 독자들이 예수에 대한 역사적 실재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기획된 소설입니다. 니코스차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이 예수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라면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둘은 해석과 설명이라는 점에서 거의 대척점에 서 있는 예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타이센의 소설은 예수의 역사성을 성취한다기보다, 즉,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한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성과물들을 집약해서 이야기 형태로 소개하고 있는 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왜 타이센 교수는 주인공을 안드레아로 설정했을까요? 이건 제가 늘 궁금했던 점이기도 합니다. (웃음)

시몬이 아니고 안드레아인 이유는 어쩌면 그 이름에 힌트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시몬이 히브리식 이름인 반면 안드레아는 그리스식 이름이죠. 즉, 그 이름은 부모가 그를 당시의 세계 문화인 그리스식 문화로 키웠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두 제자, 빌립과 안드레아가 있지요. 요한복음에서 그리스인들이 예수를 찾아왔을 때 바로 이 두 사람이 그리스인들을 예수께 데려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드레아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그리스식 교육을 받은, 세계시민의 소양을 갖춘 합리적인 사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안드레아와 관련된 또 한 가지 결정적이고 중요한 점은 이 안드레아는 지금의 우리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요한복음에서 도마가 12 제자의 일원이기도 하면서 예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그 둘을 이어주는 것처럼, 안드레아 역시 소설 내내 예수를 직접 만나지 못 합니다.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 이외에 그는 우리와 처지가 같습니다. 그도 들은 소문으로, 조사한 내용으로 예수를 더듬어 알아갈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서를 통하여, 또 1세기의 문서들을 통하여 예수를 더듬어 알아가는 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안드레아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책 내용 중에 언뜻 생각하기에 생뚱맞다는 느낌을 받았던 곳이 6장의 <처형에 대한 분석>이었습니다. 저의 질문이 생뚱맞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세례 요한의 처형은 요한의 후계자로 나타난 예수의 처형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쩌면 생뚱맞을 수도 있을 정치적 상황과 권력자들에 대한 자세한 묘사들은 이후에 벌어질 예수의 처형을 설명하는 데에, 더 나아가 우리가 예수의 죽음에 얽힌 정치공학적 변수들을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줍니다.

이혼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처음으로 소설에 등장한 예수와 헤로디아와 헤롯 안티파스의 진정한 사랑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는 덤이겠고요.(웃음) 어쩌면 이런 이유로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 이 소설 속에는 이른바 집단내 갈등과 집단외 갈등이 선명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안드레아의 내적 갈등이 집단외 갈등이라면 반민족행위자를 드러내서면 집단내 갈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양한 메시아 운동까지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좀 우스운 질문이지만 이러한 갈등이 실재했을까요?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절한 비유일까 싶긴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일본과의 갈등문제와 이 문제와 관련된 그리스도교 내의 극단적인 입장들을 생각해봐도 그런 갈등은 실재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이진경 교수는 ‘게르트 타이센’ 교수가 의도적으로 예수를 둘러싼 기층 민중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기층 민중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민중신학과의 접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정훈

▲ 이 책은 예수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보다 그를 둘러싼 기층 민중들의 이야기가 더욱 눈에 띄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교수님께서 타이센 교수의 입장이라면 왜 이렇게 예수의 주변 인물들을 부각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타이센 교수가 기층 민중들의 이야기를 특별한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부각시켰다기보다는 기층 민중들의 이야기 없이는 예수 사건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장이라기보다는 논리적 귀결이겠죠.

예수는 동시대 민중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희망을 선포했던 분입니다. 그 동시대 민중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가, 그들이 겪은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가는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소설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를 읽고 난 그 당시 제 느낌은 예수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그림자’라고 했을 수도 있지만, ‘예수라는 인물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림자’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실 저도 제목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덕분에 깊이 생각해보게 되네요. 감사드립니다.(웃음)

어쩌면 우리를 대표하는 안드레아와 우리 모두는 예수의 그림자 속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안드레아가 그랬듯이 우리 모두는 실제로 예수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그 실체의 영향력, 즉 그 그림자 아래에 있지요. 우리는 그 그림자로 예수를 짐작하고 사유하고 이해합니다.

이 그림자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 나오는 그림자와는 다릅니다. 이 그림자는 실체에 대한 허상이 아니라 실체를 보증하고 실체를 느끼게 해주는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림자’의 의미가 크다는 생각이 드네요. 질문 고맙습니다.

▲ 안드레아의 회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안드레아가 내적 변화를 체험합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 문학의 기능 중 하나인 구원의 문학이 이 책에서도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제가 책을 처음 읽고 가장 의아했던 부분은 마지막 장의 안드레아의 심정변화였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타이센은 마지막 안드레아의 내적 변화를 사도 바울이 겪었던 다메섹 도상의 계시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내 눈에서는 비늘이 벗겨지는 듯했다.”라는 안드레아의 언급은 정확하게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으로 눈이 멀었던 바울이 아나니아에 의해 다시 보게 되었을 때의 묘사와 일치하지요.

그런 의미로 본다면 갑작스런 변화도 꽤 적절하다고 봅니다. 바울처럼 유대교 내부에 박식했던 안드레아의 내적 변화를 일으킨 것은 합리적 추론이 아니라 메시아적 계시였습니다. 이 내적 변화를 충분히 구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국에서 80년 중후반에 타이센 교수의 저작들은 특히 진보적인 신학, 더 좁혀 보면 민중신학자들에게 각광을 받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당시 기층 민중들의 모습을 적나라 하게 보여주는 타이센 교수의 기법이 민중신학이 주장하는 “예수와 민중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민중신학자들에게 타이센 교수가 인기가 있었던 것을 아닐까 싶었습니다.

네, 민중신학과 타이센 모두 예수 당시의 기층 민중들의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단지 민중신학이 민중을 중심에 두고 출발하여 예수 시대의 기층 민중에 가 닿았다면, 타이센은 역사적 예수 이해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소로서 그곳에 닿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68세대를 거친 학자로서 80년대 한국의 진보신학과도 당연히 상통하는 바가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런 점이 소설 속에 녹아있기도 하고요.

▲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이 소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한 점은 무엇일까요? 책 자랑이 될 것 같습니다. (웃음)

타이센은 분명히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번역을 하면서 들었습니다. 그 자신 설교를 무척 감동스럽게 잘했다는 인터뷰어님의 말을 들으니 그의 설교를 듣고 싶어지기도 합니다.(웃음)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성과물들이 학자들의 전유물로 남는 것을 원치 않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이야기의 형태를 빌어 소개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요. 재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성과와 복음서 이해에 필수적인 신약성서 배경사를 딱딱한 학문적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알기 쉬운 소설의 방식으로 쉽게 체득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유익일 것입니다. 아, 그리고...이런 점도 있겠네요.

▲ ‘게르트 타이센’의 『갈릴래아 사람의 그림자』를 읽는 유익이 무엇일까? ⓒ이정훈

(그는 웃으면서 다음과 같은 옮긴이의 말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이 책을 읽을 때 얻게 되는 유익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예수의 말과 행적을 담은 복음서, 이를 포함한 성서 전체를 이제까지와는 달리 더 풍부한 전망 속에서 읽게 될 것이다. 또 역사적 예수의 참모습이 어떠했을지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질 게 분명하다. 예수가 구체적인 역사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은 우리 역시 역사적 존재임을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 사실을 은연중에, 그리고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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