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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인간의 존엄한 삶을 보장한다

기사승인 2019.08.05  18: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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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 (13)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 보장의 원칙에 따라 국가가 나서서 모든 시민들에게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을 옹호한다. 오늘의 시장경제에서 일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존엄한 인간으로서 생활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원칙은 없다. 존엄한 삶을 산다는 것은 최소한 인간의 기본욕망을 충족하면서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을 형성하는 기회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의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되려면, 돈벌이노동을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노동할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기본욕망을 충족하는 데 필요한 소득을 얻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들이 노동 업적이 있어야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존엄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소득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조건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무조건적 기본소득’의 기본 발상이다.

‘무조건적 기본소득’이란?

기본소득은 논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규정되고 있으나, 기본소득 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한 반 빠레이스(Philippe Van Parijs)의 규정이 표준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자산조사나 근로조건의 부과 없이 모든 구성원들이 개인 단위로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소득이다.” 이 규정에는 기본소득이 충족시켜야 할 다섯 가지 규준들이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1) 기본소득은 정치공동체에 의해, 2) 그 구성원들에게 개인적으로, 3) 곤궁함에 대한 심사 없이, 4) 그 어떤 반대급부도 요구하지 않은 채, 5) 원칙적으로 현금으로 지급되는 소득이다.

이러한 규준들을 충족시키는 기본소득은 문자 그대로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기본소득은 남녀노소, 직업유무, 재산유무, 소득유무 등을 따지지 않고 국가가 모든 시민들에게 똑같이 지급하는 소득이다.

지난 15년 동안에 기본소득 구상은 위기에 직면한 사회국가를 개혁하기 위한 급진적인 대안으로서 큰 주목을 받아 왔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설계하고 운영하는 노동연계복지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연계복지는 복지 수급의 전제조건으로 노동 의무를 설정하기에 복지 수급자의 의지에 거슬러 노동을 강제할 수 있고,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노동연계복지는 노동의 탈상품화라는 복지제도의 근본 취지에 부합하지 않으며, 복지 수급자들을 가난의 함정에 빠뜨린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노동연계복지 제도인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신자유주의적인 복지제도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그 이전에 널리 시행되었던 케인즈주의적인 복지제도로 되돌아가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서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시행한 케인즈주의적인 복지제도는 복지 수급 자격 심사와 복잡한 복지 전달 체계로 인하여 비대한 복지 관료체제를 구축하였고, 이로 인하여 천문학적인 복지행정 비용을 지출하도록 만들었다. 1970년 초 이래로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이 축적 위기에서 비롯된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으며 대량실업 사태에 직면하자 케인즈주의적인 복지 모델은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 인간 삶의 존엄을 위해 필요한 보편적 기본 소득 ⓒ에큐메니안

무조건적 기본소득 구상은 케인즈주의적인 복지제도와 신자유주의적인 복지 제도의 단점들을 극복하고 스마트한 복지제도를 향한 문을 열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제도는 사회적 안전망을 기본소득의 현금 지급이라는 전달체계로 단순화한다. 그렇게 되면, 사회부조, 실업급여, 주택수당, 보험보조, 교육비 보조 등 갖가지 복지 수급 자격을 심사하고 복지 전달 체계를 관리하기 위해 구축된 복잡한 복지 행정체제를 해체하고, 복지 행정 비용을 최소화하고, 남는 비용을 기본소득 재원으로 환류시킬 수 있다.

기본소득을 지급받는 사람들은 노동시장에 참여하거나 자영업을 창설하거나 기업을 경영하거나 자본소득을 획득하는 등 다양한 소득 기회를 활용하여 추가적인 소득을 올릴 수 있기에 가난의 함정에 빠질 염려가 크게 줄어든다. 만일 의식주, 교육, 문화활동, 사회적 교제 등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정도로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형성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향유할 것이며, 노동시장의 강제로부터 훨씬 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의 확산으로 인하여 일자리가 점점 더 적어지는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본소득 개념이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2019년 1월에 실시한 한국리서치의 웹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가 기본소득을 잘 알고 있다고 했고, 29%는 기본소득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68%의 응답자는 기본소득 개념을 몰랐다고 대답했다. 다만, 기본소득이 4차 혁명 시대에 일자리가 감소되는 데 대한 대응책이라는 설명을 읽게 한 뒤에 그 도입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조사했더니, 그 비율은 63%에 달했다.

독일의 경우,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적인 복지개혁이 본격화되었던 2004년부터 사회적, 정치적 논쟁에서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2018년에 독일경제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독일 시민들의 절반 정도가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의 도입에 찬성하고 있다. 기본소득 도입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기본소득의 재원이 과세를 통하여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기본소득이 기본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답변하고 있다. 기본소득 도입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젊고,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고, 좌파 지향적이라고 한다.

기본소득의 재원 확보

기본소득 개념을 접하는 사람들은 그 재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기 마련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답변들이 준비되어 있다.

첫째는 소득세를 점차 폐지하고 부가가치세율을 차차 100%에 이르게 해서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을 확보하는 방안이다. 부가가치세는 기본적으로 소비세이고, 자본 측의 자본재 소비나 노동 측의 소비재 소비에 모두 부과된다. 국민소득 가운데 20% 정도를 미래를 위한 투자 자원으로 저축한다고 가정하면, 국민소득의 80%가 상품을 소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니 부가가치세의 규모는 국민소득의 40%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펼친 독일의 괴츠 베르너는 부가가치세로 확보한 재원과 복지행정 비용을 절약한 재원을 합해서 모든 독일 시민들에게 월 1,800 유로(한화로 약 24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다고 계산한다.

둘째는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에 의해 확보되는 플랫폼 경제에 과세를 해서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의 상당 부분을 확보하는 방안이다. 플랫폼 경제는 한편으로는 일자리를 대규모로 파괴하여 노동소득을 감소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플랫폼 경제 운영자들에게는 천문학적인 이익을 가져다준다. 이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플랫폼 경제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서 그 재원을 갖고서 노동소득의 고갈을 보전해야 한다.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플랫폼이 데이터베이스에 근거하고, 데이터베이스는 공유재에 해당하기 때문에, 플랫폼 경제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입법은 시민들의 지지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재산세, 상속세, 증여세, 이자, 배당, 임대료 등 자본소득세와 같은 부유세를 더 많이 걷고, 근로소득과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를 늘리고, 각종 거래세를 강화해서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이다. 이 구상은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저항을 최소화하는 현실적인 방안일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본소득의 수준을 높이려고 할 때에는 더 큰 제원을 확보하는 방안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방안은, 필자가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국민경제의 거시균형과 확대재생산을 도모하면서 자본의 이해관계와 노동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국민경제 수준에서 소득분배를 시도하는 방안이다. 이 방안의 골자는 노동과 자본이 합의해서 미래의 투자를 위한 국민저축을 공제하고, 그 나머지를 크게 자본의 몫과 노동의 몫으로 나누고 나서, 그 다음에 노동의 몫을 임금소득과 기본소득으로 나누는 것이다. 만일 국민경제의 발전 방향과 성장속도를 충분히 감안해서, 노동측과 자본측이 노동소득분배율을 65% 정도로 합의하고, 노동자들이 임금소득과 기본소득의 비율을 1:1로 정한다면,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은 국민소득의 32.5%에 달하게 될 것이다. 국민소득의 분배에서 국가부문이 차지하는 몫을 따로 설정하는 경우에도, 국가의 지출을 투자를 위한 지출과 소비를 위한 지출로 구분하면, 큰 틀에서 바뀌는 것은 거의 없다. “거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기구입을 위한 국가 지출의 특수성을 감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생태계 보전을 위해 국민소득의 일정한 몫을 따로 떼어낸다는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그 몫을 가장 먼저 공제한 뒤에 국민저축, 자본비용, 임금소득, 기본소득 등을 적절하게 나누면 될 것이다.

위에서 말한 기본소득의 재원 확보 방안들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는 합리적인 방안들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설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합의에 바탕을 둔 정치적 결정일 수밖에 없고, 그러한 결정은 기본소득의 재원 확보 방안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전제하여야 할 것이다.

‘노동과 소득의 분리’의 정당성

기본소득 구상은 개신교인들에게서 가장 거부감이 큰 것 같다. 기본소득이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소득을 보장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반대급부가 없다는 것은 일하지 않아도 소득을 보장한다는 뜻이다. 전문적으로 표현한다면, ‘노동과 소득의 분리’와 ‘권리와 의무의 비대칭성’이 기본소득 구상의 전제라는 뜻이다.

‘노동과 소득의 분리’는 개신교인들에게 거의 금기에 가깝다. 그것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창세기 3장 19절의 가르침이나 “일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의 가르침이 개신교인들에게 엄중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종교개혁 이래로 직업윤리와 노동윤리가 역사적 개신교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이나 개신교 직업윤리와 노동윤리에 기대어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거부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판단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노동과 소득의 결합’을 기본원리로 해서 하나의 경제체제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2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노동과 소득의 결합’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는 사회를 노동사회라고 한다면, 노동사회는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도록 국가가 강제하고, 노동이 토지나 화폐처럼 상품으로 팔릴 수 있다는 ‘허구’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근대 세계에서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노동사회는 근대의 발명이다.

노동사회가 확립되면서 어떤 노동은 시장에서 그 업적을 인정받아 임금을 그 대가로 받지만, 집에서 수행하는 돌봄 노동이나 살림 노동은 전혀 그렇지 않다. 돈벌이노동을 위시하여 모든 노동은 인간의 삶을 위해 인간이 수행하는 노동이지만, ‘노동과 소득의 결합’은 오직 돈벌이노동에만 해당된다. 돈벌이노동을 일단 제외한다면, 삶을 위한 다양한 노동은 삶을 위한 활동으로 범주화될 수 있는데, 이 삶을 위한 활동은 근대 사회에서 애초부터 소득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이었던 것이다.

돈벌이노동과 삶을 위한 활동을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는 근대 사회의 원리는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예를 들면, 마르틴 루터는 욥기 5장 7절을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하여 태어났고 새들은 높이 떠서 날아간다.”고 옮겨서 인간이 천부적으로 노동의 위임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지만, 그가 생각한 노동은 근대 사회가 발명한 돈벌이노동이 아니었다. 루터에 따르면,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이다. 이를 위해 인간은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수행하는 노동은, 그 직무가 높건 낮건, 그 직무 수행이 돈벌이노동이든, 대가 없이 수행하는 가사노동이든, 공동체를 위한 명예직 활동이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긴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이 존귀하다. 루터는 사람의 노동을 “생산성이나 수확이나 소득이나 노동업적에 따라 평가”하지 않았고, 도리어 하느님과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노동의 봉사적 성격’을 강조했다. 루터가 강조한 직업이 돈벌이노동으로 굳어진 것은 근대 사회가 들어선 뒤의 일이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창세기 3장 19절의 말씀은 인간의 노동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의해 허락되었음을 뜻하며, 따라서 인간의 노동이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음을 강조한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 노동은 삶을 위한 활동으로 넓게 해석되어야지 근대적 의미의 돈벌이노동으로 해석될 수 없다.

“일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의 말씀은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종말론적 열정에 휩싸여 일상적인 생활 활동이나 생업을 멀리하는 것을 경계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 말씀을 옛 소련의 스탈린 헌법에서처럼 노동의 의무를 뒷받침하는 구호로 사용하거나 노동연계복지 모델에서처럼 돈벌이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성서 메시지의 견강부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개신교인들이 성서의 가르침이나 직업윤리와 노동윤리를 내세워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 1장 28절의 가르침에 따라 노동이 삶을 위한 활동으로서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개신교인들은 도리어 ‘노동과 소득의 분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과 소득의 분리’는 삶을 위한 활동을 돈벌이노동으로 축소시키는 근대적 관점을 깨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권리와 의무의 비대칭성에 대한 인의론적 정당화

‘권리와 의무의 비대칭성’은 개신교인들에게 조금 더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인의론의 이치가 개신교인들에게 나름대로 익숙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의론(認義論)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 된다는 주장은 개신교인들에게는 조금 낯설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업적이 있든 없든, 그것과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존귀한 존재라는 점만큼은 개신교인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인의의 사건을 통하여 드러나고, 그 사건은 인간의 존엄성을 확립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그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해방된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삶에 대한 권리를 의식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인의의 핵심적 메시지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업적 이전에, 업적과 무관하게 확립된다는 인의론은 업적을 발휘하는 사람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복지를 향유할 권리를 갖는다는 업적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업적사회를 넘어설 수 있는 안목을 열어준다. 물론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공동체를 위해 업적을 이루어야 하고 그럴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업적이 인간의 존엄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노동의 의무를 다하고 업적을 낸 만큼 복지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못을 박는 사회는 노동할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노동능력이 없어서 업적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비인간적인 사회이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는 업적을 내지 못하는 사람도 업적을 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사회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들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권리와 의무가 대칭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인간의 권리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복지를 향유할 권리가 노동 의무나 업적의 의무에 결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의론의 지평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삶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는 신학적·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기본소득 구상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와 기본소득 보장

기독교 경제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기본소득 구상은 작은 사람들을 편드는 하나님의 정의의 관점에서도 정당화된다. 출애굽 전통을 이어가는 성서는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정의를 작은 사람들의 배려와 보호에 직결시키고, 작은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소득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 대표적인 예들은 만나 이야기(출애 16:1-36), 주기도문(마태 6:11; 누가 11:3 병행),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 1-16), 최후심판의 비유(마태 25:31-46) 등이다.

무엇보다도 만나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출애굽 공동체가 이집트의 축적 경제에 대항하여 추구하는 대안적인 삶의 상징이다. 출애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자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아무런 전제 없이 제공하는 ‘일용할 양식’을 받았다. 그들은 ‘일용할 양식’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배분되어야 하고,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은 것을 챙겨서 축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임을 인식하였다.

만나 모티프는 주기도문 제2항목 첫째 기원(“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에 다시 등장한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일용할 양식’은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옷,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현금, 순수하고 선한 배우자, 순박한 아이들, 착한 고용인, 순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자, 선한 정부, 좋은 날씨, 평화, 건강, 교육, 명예, 좋은 친구, 신용 있는 이웃 등”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다. 이 ‘일용할 양식’은 나 혼자 차지해서는 안 되고,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어야 한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업적에 따른 정확한 분배’를 뒤집어엎는 ‘하나님의 기이한 의’를 묘사한다. 하나님의 정의는 노동의 업적과 무관하게 삶의 필요에 따라 재화를 나누어 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업적과 보상을 서로 분리하고, 보상과 삶의 필요를 직결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이다. 그것이 기이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업적과 보상을 서로 결합시키는 일이 마치 하늘이 정한 법인 양 생각하는 통념이 그만큼 강력하게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노동할 기회가 전혀 없거나 노동 업적이 형편없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 갖는 일이 어처구니없을 것이고, 분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다 그들의 눈에는 궁핍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최후심판의 비유는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최후의 심판자가 의로운 사람들에게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고 말한다.(마태 25: 35-36) 의로운 사람들이 의아한 마음으로 최후의 심판자에게 그들이 언제 그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그는 “네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고 대답한다. 의로운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사람들에게 ‘양식, 주거, 의복, 건강, 자유(존엄성)’ 등과 같이 ‘인간의 경제적·정치적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서가 일관성 있게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전제 없이 그것을 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이다. 루터가 해석한 ‘일용할 양식’의 내용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기본소득과 맥이 통한다. 수고한 사람이나 수고하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주어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고 해방하는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다.

맺음말

기본소득 구상은 실현가능하다. 문제는 기본소득 구상의 도입을 가로막는 업적주의나 노동연계복지 같은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극복하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가 기본소득 구상을 실현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노동과 소득의 연계를 완강하게 주장하는 업적주의 멘탈리티를 해소하여야 한다. 교회는 죄인이 아무런 공로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인정받았다는 신앙의 이치를 되새기면서 노동사회의 업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하고,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여야 한다. 그러한 교회는 기본소득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시민·사회세력과 연대하고,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합의를 촉진할 것이다.

강원돈(한신대학교 신학부 교수/사회윤리와 민중신학) wdkang55@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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