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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있는 곳에 신(神)이 있다

기사승인 2019.07.30  18: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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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강의』 5강 풀이

본장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염재신재‘(念在神在), 즉 생각이 있기에 하느님이 계시다란 제목 하에 서술되었다. 1959년 10월 27, 29일 양일간 썼던 순수 우리말 일기 각 두 편씩, 네 편의 시조를 다룬 것이다. 나중 쓰여 진 글 두 편을 앞에 놓고 앞선 글을 뒤에 놓은 것은 다석 선생이 나름 논리를 펼 목적에서 그리 한 것이겠다.

다석이 바라본 유교

본격적인 글 풀이에 앞서 다석은 상당한 분량으로 유교의 제사문제를 언급하였다. 유/무신론의 틀을 빌어 유교의 하느님을 풀어 보기도 했으나 이 개념들이 궁극적 ‘하나’인 그 분을 적시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이치(理)로 신을 대신한 후기 성리학도 옳지 않다고 했다. 기독교가 조상을 소홀하게 여긴 것도 잘못이지만 유교가 천(天) 혹은 신(神)을 잊은 것도 옳지 않다고 본 까닭이다.

다석이 선진 유학의 제사론을 갖고 이야기를 시작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겠다. 결국 다석은 ‘念在神在’란 말로써 주/객관을 초월하는 자신만의 하느님 이해를 전하고자 했다. 물론 이 때의 ‘생각’도 데카르트 이래로 서구 사상가들의 독아론(獨我論)적 ‘사유’와도 크게 다를 것이기에 우리들 관심을 증폭시킨다.

본 글에서 다석은 하느님을 주객구조 속에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역설하였다. 그분은 객관적 대상일 수도 없고 순수 주관의 결과물도 아니란 것이다.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인간의 성실함(誠 혹은 至誠)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길을 삼수분화적인 한글, 곧 ㅁ(물), ㅂ(불), ㅍ(풀), 즉 므른, 부른, 푸른의 과정이라 하였다. 神에 대한 물음이 아주 어렵고 딱딱한 주제이기에 이를 거듭 묻고, 물음을 불려서 풀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 『다석강의』 제5강

한 때 다석은 기독교 성서를 유신론의 책으로, 유교 경전을 유신/유물론의 애매한 상태로 여긴 적이 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유교 역시 본디 유신론을 말한 종교였음을 강변하며 『중용(中庸)』과 『주역(周易)』 등에서 제사(祭祀)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귀신(鬼神)의 덕을 숭상하기 위해 목욕재개하고 정성을 다해 제사하라는 말들이다.

하지만 이 때 귀(鬼)는 공자도 말했듯이 기(氣)를 말하는 것이었다. 기운이 나돌아 다니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부모 제사를 위해 귀신의 존재여부를 묻거나 그의 강림에 집착하는 것은 삼갈 일이다. 이점에서 다석은 증자(曾子)의 말에 주목하였다. 귀신의 존재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정성으로 추념(追念)하면 기도하는사람 마음속에서 살아 현존 하는 것이라 한 것이다. 지극한 성의로 제사를 모시면 고인이 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서구 범주인 유/무신론의 틀로도 성리학의 유리론(唯理論)을 갖고서도 풀기 어렵다. 주지하듯 氣(기운)는 모든 사물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 기운이 그로부터 나오면 죽는 것이고 나와 떠돌아다니는 것을 일컬어 귀신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유물론이라 해도 아니되며 이치만으로 풀어 낼 수 없다. 유교는 자체로 이 점에 대해 명확한 언급이 없다.

여기서 다석은 공자가 말한 제여재(祭如在)란 말에 주목했다. 조상이 옆에 존재하는 듯이 예와 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라는 뜻이다. 제사란 그 대상이 존재하는 듯이 지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계신 것 같다’란 말을 다석은 ‘계신 곳에 갔다’는 뜻으로 풀었다. 우리말에 있어 ‘같다’와 ‘갔다’를 같게 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唯物/唯神의 틀을 빗겨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성실함, 곧 묻고, 불려 푸는 지난한 행위라 하겠다. 과거 임금과 백성이 제사의 대상 폭을 달리 정했으나 오늘에 있어 그것 의미는 크지 않다. 핵심은 조상의 끝이 하느님(一者)인 것을 아는 일이다. 종국에는 모두가 예외 없이 한분인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유교와 기독교, 성령의 종교

이점에서 다석에게 유교와 기독교는 서로 다를 수 없었다. 이들 모두를 성령의 종교로 본 탓이다. 이 때 성령은 그것 없이는 생명 자체가 불가능한 氣(기운)을 일컫는 말이겠다. 따라서 제사는 성령으로 하는 것이다. 제사상을 차리는 일은 그 본질에 어긋날 뿐이다. 그렇다고 제사폐지를 주장하는 것도 어리석다. 본질에 있어 제사는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듯 우상숭배가 결코 아닌 까닭이다. 옆에 살아 게신 듯이 정성으로 우리들의 정(情)을 표하면 그 뿐이다.

여기서 다석은 ’念在神在‘란 말을 재차 언급하였다. 신의 존재를 주/객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정성 성(誠)의 유무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존재물음은 오직 誠으로만 답할 수 있다. 이 경우 誠은 묻고 불려 푸는 지난한 행위를 동반한다. 한마디로 생각이다.

다석은 자신의 생각을 하늘이 주신 것이라 믿었고 자신을 ‘생각하러 온 자’로 여겼다. 생각을 神과의 교제이자 사귐의 표현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염재신재’, 생각이 있기에 하느님이 있고 하느님이 있기에 생각이 있다는 말이 가능할 수 있었다.

< 1 >

이런 전제 하에서 다석은 4편의 시조를 차례로 풀어갔다. 첫 번째 시조 제목이 ‘보아요’인바, 이를 ‘염재신재’와 같은 뜻으로 여긴듯하다.

한월계셔 생각들히 사람보계 말슴나지

한월은 큰 정신, 곧 성령을 일컫는다. 성령이 있기에 우리에게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염재신재란 말이다. 하늘 하느님께서 내게 생각을 주기에 정신이 번쩍 드는데 이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다.

그 생각이 자신의 말로 나오게 된다.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떤 말이 나오는 지에 따라 그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지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에게서 말씀이 나오지 않으면 하느님 역시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보고 하느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옳게 믿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에게서 하늘 꼭대기에서 흘러넘치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하늘의 말씀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목궁에 얼술김이 끊져바라 이승즘승

내 목구멍을 출입하는 성령, 큰 정신인 월숨이 끊어지면 우리는 짐승과 다름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유일하게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사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 우연치 않다. 하지만 인간정신 세계가 하느님과 연락 두절된 지 오래되었다. 사람이지만 짐승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이승에서 질척질적 그리 깨끗지 못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앞서 말한 대로 온갖 젖물, 즉 눈물 콧물(정액)을 흘리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도 어린적 노릇(버릇) 즘승갓갛 이승버릇

사람의 어릴 적 삶은 짐승과 많이 다르지 않다. 먹으려는 식욕이 삶을 지배하는 탓이다. 좀 더 장성하면 색욕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른이 되어서도 짐승처럼 사는 인생이 적지 않으니 걱정이다.

과거보다 오늘 이 시대가 훨씬 더한 듯싶다. 체육, 예술계를 비롯하여 종교, 사법 그리고 교육영역에서도 온갖 성범죄가 난무하고 TV마다 ‘먹방’이라 하여 오로지 먹기 위한 인생들 모습이 여과 없이 방영되고 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미성년들은 생존권만 갖고 있을 뿐 시민권을 소유했다고 보기 어렵다.

실상 성인되어서도 이 버릇에서 자유하지 못하면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라 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생각 있는 곳에 하느님 있다. 반면에 생각 없이 지내는 이런 삶을 짐승의 생활이라 해도 좋겠다.

< 2 >

두 번째 시조 ‘또보오’를 풀을 차례이다. 말이란 것이 볼수록 신기하고 뜻이 깊어 자꾸 본다고 했다.

한늘 글월 읽히기는 이승버릇 잃게 ᄒᆞ임

무한 공간인 하늘 내에 있는 천지자연 모든 것이 하느님의 글월, 편지라는 것이다. 이런 하늘 편지를 읽는 것은 짐승처럼 사는 우리들 습성과 버릇을 잃게 할 목적에서이다. 온갖 삼라만상이  하늘 뜻 담긴 편지(글월)이기에 이를 보고 또 봄으로써 우리는 못된 버릇을 떠날 수 있다.

이승버릇은 강제로, 폭력으로는 그쳐질 수 없다. 하느님 편지인 천지자연을 통해서만 철없는 짓을 멈출 수 있을 뿐이다. 들의 백합화를 보고 공중 나는 새를 보라 하신 예수의 말씀이 거듭 생각난다.

즘승노릇 놓게스리 한월생각 이룩힘을

짐승버릇 버리겠으니 하늘 생각 이뤄 펼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말뜻이다. 여기서 ‘이룩’은 전진(前進), 앞으로 나간다는 의미겠다. 하느님 나라, 그의 뜻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의지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드리고 바쳐야 할 기도이다.

회보아 달(리) 돌림이라 제절로로 제ᄀᆞᆫ데

여기서 회는 해(태양)을 말한다. 지동설이 말하듯 태양계 내에 존재하는 일체는 해를 바라보며 각기 돌고 있다. 돌아가면서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달리 변화시켜낸다. 사계절이 생겨나는 것도 이런 이치일 것이다. 일년 12달도 이런 달라짐의 표현들이다.

이렇듯 자연이 변하듯이 사람도 달라져야 옳다. 짐승 노릇 그치고 새 사람이 될 일이다. 자연이 태양을 통해 달리 되듯이 사람도 의당 생각 속에서 얼마든지 달리 될 수 있다. 생각 속에서 인간은 저절로 제 중심, 가운데로 돌아 올 수 있는 법이다.

가는 세월, 오는 세월 속에서 중심(가온찍기)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겠다. 생각하며 살면서 자신의 못된 것을 버리고자 힘쓰면 절로 중심에 이를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한 순간도 하느님을 잃고 잊으면 누구든 쉽게 이전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음을 명심하면 좋겠다.

< 3 >

다석은 이제 ‘하나 그저’와 ‘그저 하나’의 두 시조를 한꺼번에 풀어냈다. 일종의 다석 式의 말장난, 언어유희라 할 것이다, 말 순서를 바꿨으나 그 본 뜻은 다르지 않다.

먼저 ‘하나 그저’의 시조 두 연을 함께 적어 풀었다.

너너너와 않이되며 나나나가 밖이더냐 한덴밖에 않밖달리 않이아닌 너뉠난가

복잡한듯하나 반복하여 강조했기에 뜻은 명확 단순하다. 즉 상대방인 너는 안이고 나는 밖에 있는 것인가? 이 둘이 결코 다를 수 없다고 했다. 오히려 안팎이 달리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를 둘 째 연에서 달리 표현한다.

여기서 ‘한데밖에’란 모든 것이 ‘한테’, 함께, 한 무더기란 뜻이겠다. 안팎이 결코 다를 수 없음을 재차 부언한 것이다. 너/나, 둘은 결코 나뉠 수 없는 것으로 모두가 ‘한테’, 곧 하나임을 강조했다.

하나다 하나란나라 하나둘셈 너희다

사람이 자신 밖의 존재들을 하나 둘 셋 넷(너희)…라고 무수히 숫자로 세어본들 이들은 결국 ‘하나’일 뿐이다. 안팎, 주객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 그저’의 핵심 뜻이다.

< 4 >

이어지는 ‘그저 하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들 드러가 좁잔코 나 외로히 와 넓잔타

전체이자 하나 곧 ‘한테’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다 들어간다 해도 좁지 않다. 하늘나라는 거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들 각자는 예수가 그랬듯이 홀로 이 땅에 왔으나 이곳은 참으로 좁다. 하늘나라처럼 넓지 않다는 것이다. 한 사람 거하기도 편치 않은 세상이다.

너들 드려 드름 드름 나외 올라 오름 오름

그럴수록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거듭 반복해서 들으라 한다. 멈추지 말고 지속하여 들으란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자꾸만 하늘로 오를 수 있다.

므른 블은 그리고 풀은의 과정(誠)을 다시 언급하는 듯싶다. 듣고 오르는 것이 이 땅에서 우리들 할 일이다. 모든 것을 품는 하느님과 하나 되기 위함이다. 빈탕한데- 없이 계신 그분께 – 맞혀 노는 것이 우리들 인생의 목적이어야 한다.

잇다가 없다란다 없다 잇다 온단다

있는 듯하면 없고, 없는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있다/없다를 앞서 말한 ‘한테’로 다시 묶어 언표 한 것이겠다. 묻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불연 듯 풀어져서 그 ‘하나’가 내 것 되어 나와 하나 되는 시점이 반드시 찾아온다. 하나 밖에 없는 나라는 이와 같은 것이다. 이 하나를 찾는 것이 우리들의 존재이유이다. 하나로 계신 하느님이 반드시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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