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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회 보장 위한 노동시간 정책과 일자리 나누기

기사승인 2019.07.30  18: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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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를 위한 기독교 경제윤리 (12)

기독교 경제윤리는 작은 사람들을 편드는 정의의 원칙과 인간 존엄성 보장의 원칙에 따라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기회를 보장할 것을 옹호한다.

시장경제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기회를 보장한다는 것은 노동할 기회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보장받는 것을 뜻한다. 삶의 기회는 의식주, 병 치료, 사회적 교제, 문화적 향유 등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기독교 경제윤리가 이러한 삶의 기회를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할 때 참여의 원칙만 고려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여의 원칙 아래서도 작은 사람들의 권력을 강화시켜 기업소득과 국민소득을 적정하게 배분하여 삶의 기회를 확대하는 방식을 논의할 수 있지만, 그 논의는 기업의 의사결정 기구, 산별 노사교섭 기구, 사회적 협의 기구 등에 자격과 권한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전제하고 있다.

오늘의 시장경제에서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노동생산성이 고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일자리가 크게 감소하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소득을 얻지 못하고 삶의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경제윤리는 작은 사람들을 편드는 정의의 원칙과 인간 존엄성 보장의 원칙에 따라 아래의 두 가지를 제안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서 일자리를 나누자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조건적인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기회를 보장하기 위하여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누는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본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노동세계를 위협하는가?

디지털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디지털 기술이 가져올 세계의 모습에 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엇갈리고 있다. 리하르트 다비드 프레히트(Richard David Precht) 같은 낙관론자들은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빠른 속도로 대체할 것이기 때문에 인류가 노동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고 본다. 각 사람이 수행해야 할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주당 몇 시간 정도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시대의 노동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Getty Image

이러한 유토피아적 전망과는 달리 칼 베네딕트 프라이(Karl Benedikt Frey) 같은 국민경제학자들이나 마이클 오스본(Michael Osborne) 같은 정보학자들은 디지털 기술이 대량실업과 불안정 노동을 확산시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기회를 상실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그들은 노동시장에서 얻는 소득에 바탕을 두고 사회보장 제도를 설계하고 그 비용을 충당해온 전통적인 사회국가가 붕괴할 것이라고 어둡게 전망한다.

디지털 기술이 과연 노동세계를 위협하는가 하는 질문은 역사적으로 공업혁명이 진전될 때 나타난 기계파괴운동에서 제기되었던 물음과 그 맥이 닿아 있다. 컴퓨터가 상용화되면서 제조업, 사무직, 관리·행정직 분야에서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을 때에도 비슷한 질문이 제기된 바 있다. 위에서 언급한 프라이와 오스본도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여 인공지능과 로봇이 광범위하게 보급되면서 일자리가 대규모로 파괴되어 노동세계가 붕괴될 것이라고 내다본다는 점에서 러다이트 운동가들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을 하고 있는 셈이다.

비관론이 경험과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최근의 실증적인 연구들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이 많은 일자리를 파괴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디지털 기술로 인하여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MIT에서 국민경제학을 가르치는 데이비드 어서(David Autor)와 데이런 에이스모글루(Daron Acemoglu)는 자동화가 쉽게 관철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일자리 감소폭이 클 수 있지만, 디지털 기술이 다양한 경로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도 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 생산, 도입 등에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생산성 향상에 따른 비용 절감, 기존 공업단지의 현대화, 더 많은 자본 형성과 조달의 필요성 등으로 인해 노동력 수요가 늘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 유럽의 <노동의 미래 연구소>도 비슷한 분석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1999년부터 2010년까지 노동력을 절약하는 기계들을 투입함으로써 유럽에서 16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고, 그러한 일자리 잠식은 생산 부문에서 두드러졌으나, 자동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일자리는 150만 개 정도 더 늘어났다고 한다. 기술진보로 인해 만들어진 일자리는 주로 서비스업에 집중되었다. 그 가운데는 인터넷을 활용한 판매나 물류 같은 단순한 직업들이 많았지만, 소프트웨어 개발, 마케팅, 미디어 등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직업들도 적지 않았다.

문제는 노동의 질과 안정성이다. 비정규직의 급증과 낮은 급여는 심각한 문제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노동의 미래 연구소>도 디지털 기술이 확산되면서 사람들이 기계와 경쟁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고, 고용주들이 자동화를 핑계로 내세워 임금상승을 강력하게 억제한다는 점을 크게 우려한다. 이로 인하여 국민소득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율(노동소득분배율)이 끊임없이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게으른 자들의 천국을 가져올 리도 만무하지만, 노동세계를 파괴하고 사회국가를 붕괴시키는 극히 어두운 미래를 불러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미래의 노동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리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고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곳에서는 노동력을 대체하는 자동화가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자동화될 수 없는 일자리들, 예컨대 사람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일자리는 계속해서 남겠지만, 자동화가 가능한 생산 공정이나 서비스 공정은 남김없이 자동화되리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일 것이다.

일자리가 대규모적으로 파괴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마누엘 카스텔(Manuel Castells),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등이 주목한 바 있는 ‘비물질적인’ 노동이 확산되면 온라인을 통하여 국경을 가로지르는 노동시장이 광범위하게 창설될 것이고, 일자리를 둘러싼 사람들의 국제적 경쟁이 더욱더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최근의 실증적인 연구들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최고급 지식과 정보를 필요로 하는 고소득 일자리들이 새롭게 창출되고, 디지털 기술의 효과로 인하여 서비스업 분야에서 많은 단순직 일자리들이 창출될 것이지만, 단순 서비스업 분야에서 일자리의 질은 악화되고 소득은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할 능력이 있고 일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는 미래의 노동세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근대의 산물인 노동강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노동사회는 한 마디로 임노동을 본위로 하는 사회이다. 임노동은 한편으로는 가계소득의 원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잉여가치 생산의 원천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고, 잉여가치를 가계저축과 기업저축의 형태로 축적하면서, 그러한 저축을 위해 수행하는 과잉노동을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이와 같이 과잉노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멘탈리티가 사람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것을 가리켜 노동강박이라고 한다.

노동강박과 과잉노동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한번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은 가계와 기업, 그리고 공동체 유지를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축적된 자본을 투입하여 기술을 발전시키면, 노동생산성이 상승하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은 줄어든다. 한 마디로, 노동생산성 상승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감소시킨다.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감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위하여 향유하는 활동 시간이 증가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노동을 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노동이 삶의 한 방편에 불과하다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삶을 향유하는 활동 시간이 늘어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긴다. 그들의 마음에 노동강박이 새겨져 있고 과잉노동에 익숙하도록 하는 노동규율이 그들의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이 열어젖히는 노동생산성의 급격한 향상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다. 그것은 노동시장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양이 급격하게 줄어든다는 뜻이고, 노동시장이 제공하는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고용 없는 성장’을 겪고 있기에 노동생산성 향상이 어떤 사회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해 어느 정도 학습이 되어 있다. 자본가들과 경영자들이 ‘고용 없는 성장’의 불가피성을 옹호하고 임금상승 억제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시민사회와 노동계는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국과 독일에서 최근에 이루어진 실증적인 연구들은 ‘고용 없는 성장’이 주로 제조업 분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서비스업 분야에서는 임금 억제의 빌미로 활용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노동생산성 향상에 따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데 대해서는 근본적인 대책들을 수립하여야 한다. 그 근본적인 대책들은 크게 보아 세 가지이다.

첫째,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일할 능력이 있고 일할 의지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급적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서 사람들이 삶의 기회를 갖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가져야 하고 노동소득을 얻어야하기 때문에 일자리를 요구하는 것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이다. 기술 발전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오늘의 시장경제에서 이러한 요구는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일자리를 나누는 방식으로 관철될 수 있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일자리들은 정규적인 일자리의 위상을 갖는 것이 당연하지만, 노동자의 사정에 따라 비정규직 일자리나 심지어 파트타임 일자리가 선호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노동자가 언제 노동할 것인가는 노동자의 사정과 필요에 따라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의 시간 주권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비정규직 일자리와 정규직 일자리에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차별 없이 적용되어야 하고, 노동조건과 보험 지원 등 복지 제공 측면에서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둘째, 디지털 경제의 발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육과 직업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개발, 생산, 도입, 활용 등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확보하지 않고서는 디지털 기술이 창출하는 새로운 일자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므로 교육 인프라와 직업재교육 인프라를 구축하고, 모든 사람들이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혹은 국가와 기업의 지원을 받아 무상으로 디지털 경제에서 직업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요즈음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소장 국민경제학자 옌스 쉬데쿰(Jens Südekum)이 독일 노동조합과 경영계, 그리고 연방정부에 강력하게 추천하는 방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구절벽에 직면하여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대학교들의 시설을 평생교육과 직업재교육을 위한 시설로 활용하고 소요 재원을 중앙정부 차원에서 마련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디지털 기술에 의해 자동화되기 어려운 분야, 곧 사람을 돌보고 보살피는 서비스업 분야나 도시와 자연의 경관을 가꾸고 생태계를 보전하는 서비스업 분야는 국가가 나서서 육성해야 할 분야이다. 생애주기별로 사람을 돌보는 데 필요한 서비스는 다양하게 제공되어야 하고,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불편 없이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받아야 한다. 깨끗하고 건강한 경관을 가꾸고 생태계의 건강과 안정을 도모하는 분야에서도 많은 일자리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인간과 생태계를 가꾸는 분야에서 일자리들을 창출하고 운영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하는 까닭은 시장이 그 서비스들을 제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시장이 그 분야에서 일자리들을 제공한다 할지라도, 그 일자리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열악한 노동조건 아래서 낮은 급여에 시달리고, 퇴직 이후에도 적은 연금을 받아 가난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과 생태계를 돌보는 서비스직을 창출하고 그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높은 수준의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다.

강원돈 교수(한신대학교 신학부/사회윤리와 민중신학) wdkang55@h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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