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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받는 삶, 복이 되는 삶”

기사승인 2019.07.19  18: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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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목 김환경의 「12자 수복장」(느티나무, 옻칠)

갤러리 제일 안쪽 구석에는 나뭇결 고운 장롱이 전시되어있다. 이 장롱에 관심을 보이는 관람객은 그리 많지 않다. 환상적인 초현실주의 작품을 보다가 장롱을 보면 의아해하기도 한다. 웬 원목 장롱이 여기에 있나 싶은가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 관람객이 그 장롱 앞을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흔치 않은 일이어서 다가가보니 조용히 감탄하는 혼잣말이 들렸다. 대화를 나눠보니 이런 장롱은 정말 흔하지 않다고, 대단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분은 수공예 기타를 십 수 년 만든 작가였다. 최근에 근처 마을에 귀농해서 농사도 짓고 기타도 만드는 분이었다. 가격을 알려주면 그제야 놀라서 다시 보는 장롱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그 장롱이 그분 눈에는 다르게 보인 것이다. 얼마나 섬세한 손길로 만든 작품인지 알아본 것이다. 보통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면 흥이 나서 설명하게 된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물어보며 배웠다. 설명으로만 알던 그 작품의 가치를 몸으로 아는 분에게 배우고 싶었다.

청목 김환경 作 「12자 수복장」(느티나무, 옻칠/ 우측)

사실 이 장롱은 무형문화재 제1호 칠화장(漆畵匠) 보유자인 청목(靑木) 김환경(金煥京) 작가의 작품이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원목 장롱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알아볼 눈이 있는 분은 감탄한다. 손으로 하나하나 새겨 넣은 글씨와 무늬는 요즘처럼 기계로 깎아내는 시대에 보기 드물다. 문을 열어 내부를 보면 검은 광택의 옻칠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겉 표면의 옻칠을 알아보는 이는 별로 없다. 그저 평범한 원목 가구처럼 보이지만, 실은 표면도 엄청난 정성을 들인 옻칠이다. 옻칠을 하고 닦아내고 다시 옻칠을 하고 닦아내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렇게 나뭇결에만 옻칠이 스며들게 했다. 나무 고유의 무늬를 더욱 깊게 물들인 옻칠작품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 작품을 소개할 때는 간단한 놀이를 한다. 수많은 글자 중에 두 글자를 먼저 알려준다. 목숨 수(壽)자와 복 복(福)자다. 그리고 이어서 수자와 복자 외에 알아보고 읽을 수 있는 글자를 맞추면 한 글자 당 상품을 드린다고 한다. 그러면 눈이 커지면서 장롱 앞으로 바싹 다가와 찾는다. 그러나 2년이 넘도록 단 한 명도 상품을 받은 사람이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복자와 수자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글자가 가득하지만, 모두 다 복자와 수자의 변형일 뿐이다.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가 앞면에 새겨진 것이다.

청목 김환경 作 「12자 수복장」(느티나무, 옻칠)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는 목숨 수(壽)자와 복 복(福)자의 수많은 변형으로 이뤄진 그림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궁중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유행했던 도안으로, 병풍, 족자, 장롱 등에 넣었다. 수복이라는 글자는 장신구, 노리개, 식기, 의류 등에서도 발견된다. 그만큼 많이 사랑받은 글자다. 글자가 형형색색의 그림으로 변형되기 때문에 서예와 회화가 만난 문자도라 불릴 만하다. 백(百)은 100개라는 의미보다는 ‘많다, 충분하다, 완성하다’는 의미다. 장수와 복을 충분히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겼다.

좀 더 깊은 의미는 단순히 오래 살고 많은 복을 받는 차원을 넘어선다. 백수(百壽)는 오래 사는 양의 차원 보다는 참으로 사는 질적 차원의 삶을 의미한다. 즉, 짧게 산다 해도 참된 삶을 충분히 누린다, 완성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백복(百福) 역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다. 음복(飮福)이 제사 음식을 나눈다는 의미인 데서 드러나듯, 복자는 술병과 제단 모양을 본 뜬 글자다. 그래서 신명께 드리는 제사를 의미한다. 신명께 올려드리는 제의 자체를 복으로 본 것이다. 백복은 그러므로 신께 드리는 제의의 복을 충분히 누리라, 완성하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심규섭의 「수복에 깃든 사상」 참고).

주형숙 作 「백수백복도」

백수백복을 빌어주는 마음은 종교의 유무나 신앙의 차이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기독교 신앙에도, 수많은 기도에서도 복을 빌어주는 내용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상대가 간절히 바라는 소원, 절박한 필요를 어찌 외면하겠는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복을 기꺼이 빌어준다. 그런데 무엇을 복으로 여기고 빌어주느냐다. 백수백복이 그저 긴 수명과 많은 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참된 삶과 신앙을 의미하기도 하듯이 복은 의미폭이 넓다. 바라는 대로, 필요한 대로 다 이뤄지는 삶이면 최고의 복일까?

사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열매 맺는 복은 말씀의 열매에 대한 가르침이다. 좋은 밭으로 표현된 마음 밭에 주님 말씀이 떨어지면 삼십, 육십, 백 배의 열매가 맺힌다는 비유다(마태13장, 마가 3장). 주님 말씀이 듣는 사람의 마음 밭에 뿌리 내리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비유다. 이 비유가 복을 바라는 욕망과 뒤엉키면서 종종 투자처럼 쓰이곤 한다. 하나님을 위해 헌금을 드리면, 삼십, 육십, 백 배의 열매로 돌아온다는 식이다. ‘하나님을 위해’ 또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방식은 보통 교회 건축이나 교회 관련 행사 등으로 구체화되곤 한다. 주님의 가르침에 더욱 더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길이 특정 방향으로만 구체화되는 게 아닌가.

말씀이 마음 밭에서 맺는 열매는 신앙의 삶이 생명력 있게 자라난다는 비유다. 그런데 이 비유가 하나님께 뿌리는 재정적인 씨앗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열매를 맺어 돌려주시는 구도로 바뀐다. 신앙 안에서 자라나는 말씀의 씨앗이 하나님 안에서 배가되는 재정의 씨앗이 된다. 하나님 뜻 이루는 선한 사업도 잘 되고, 그 덕분에 개인들도 풍요로워지는 자체야 뭐가 문제일까.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다. 주님 말씀이 자기 삶에서 일으킬 거듭남의 열매를 표현한 비유가 다른 맥락에 쓰이기 때문이다. 삼십, 육십, 백 배로 되돌아오는 이율의 투자라면 대박 종목이 아닌가. 그러나 헌신과 사랑이 자칫 투자와 거래로 오해되는 게 아닌지 노파심이 든다.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복은 무엇이었던가? 성경에서 특정 개인을 향해 복이라는 단어가 쓰인 첫 번째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인도할 땅으로 가라고 부르시면서 복을 약속하신다.

“…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1b~3, 개역개정)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무엇인가? 삼십, 육십, 백 배의 투자종목은 보이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복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게 되는 축복이다. 아브라함 자신이 복을 받기보다 아브라함으로 인해 타자가 복을 받는 축복이다. 아브라함은 복을 받기보다 복이 된다. 복이 된 아브라함을 통해 수많은 타자가 복을 받는다. ‘너는 복이 될지라.’ 새번역으로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삶이 누군가에게 복이 되는 축복이다

사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간구가 거의 없다.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들이 자신 때문에 태의 문이 막혔을 때, 임신할 수 있게 구한 기도(창20:17) 외에는 없다. 소돔의 멸망을 막으려는 듯 주님께 드린 반문도 기도라면 간구로 포함시킬 수 있겠다. 조카 롯을 구하러 갈 때, 이기게 해달라고 구하는 모습이 없다. 아들 이삭을 바치러 갈 때도 그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는 간구가 없다. 하나님과 어떤 거래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동행한 삶이다. 그런 삶이 복이 된다. 아브라함을 만나는 사람, 아브라함을 아는 사람에게 그 신앙이, 그 삶이 복이 된다.

수복장 앞에서 백수백복도를 보며, 알아보지 못한 복에 대해 묵상한다. 쉽게 알아보는 복자가 있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수자가 한 글자씩 있다. 삶도 그렇지 않은지. 쉽게 알아보는 복이 있다. 그저 건강하게 오래 살고, 명예와 부를 누리면 복이라 여긴다. 그러나 백수백복도에는 한자 좀 안다는 어르신도 좀처럼 읽지 못하는 수많은 복자가 있다. 도대체 무슨 글자인지 읽을 수 없는 그 이상한 글자들이 다 복 자다. 복이 아닌 줄 알고 피하고 무시하고 지나친 수많은 복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간절히 바라던 복에만 시선이 고정돼 알아보지 못한 수많은 복을 보여주는 듯하다.

제랄드 메이는 『영혼의 어두운 밤』(p.6)에서 암투병을 겪은 후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구분을 포기했다고 한다. 투병과정에서 좋은 일이라 감사한 일이 후에 나쁜 일을 초래하고, 나쁜 일로 절망한 일에도 좋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좋은 일, 나쁜 일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워졌던 것이다. 제랄드 메이의 고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 역시 사랑하는 이의 암투병과 함께 한 이십여 개월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내게도 좋고 나쁘고의 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며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경험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양한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새삼 깨달았다. 사랑하는 이의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도 알게 되었다. 밤하늘의 별을 더 많이 보게 되었고, 맑은 가을 하늘도, 해가 뜨고 지는 붉은 빛깔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지인들의 아픔 앞에 더 많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낯선 이의 그늘진 얼굴과 굽은 등에도 더 많이 마음이 가게 되었다. 삶은 무척이나 단순해졌고, 무엇이 헛되고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분명해졌다. 함께 아파해주고 함께 기도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통해 주님의 임재와 사랑이 분명해졌다. 걱정꺼리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대로도 소망일 수 있는 신비도 맛보게 되었다.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이 목록들은 암투병의 삶과 동행하면서 받은 선물이다.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불행한 일은 피하고 행복한 일만 맞이하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었다. 하지만 그 차별이 더 불안하게 한 게 아닌지. 모호한 경계 그대로, 모르는 그대로를 맞이할 때, 생각지 못한 감사를 발견한다. 통제할 수 없는 그대로 통제하지 않을 때, 불안이 아닌 신비를 만나기도 한다. 그저 축복과 저주의 구분이 희미해진 그 들판을 소중한 이들과 함께 걷게 한다. 지금 이 순간 한걸음씩만 신비를 밟으며…

물론 암투병의 고통스러운 과정이, 암이 축복이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그 축복을 받자고 두 번 다시 경험하고픈 마음도 결코 없다. 그러나 죽음의 골짜기 속에도 알아보지 못했던 복이 분명 충만했다. 백수백복도에 알아보기 어려운 수많은 복 자가 있는 것처럼 복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사람이라는 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절절히 맛보았다. 함께 숨 쉬고, 함께 웃고 울며, 기도한 한 영혼은 존재만으로 최고의 복이었다. 더 이상 함께 일 수 없다 해도 그런 한 사람과 동행했다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최고의 복이다.

복을 받고 싶다. 비루하게 살지 않아도 될 만큼의 복을 간절히 원한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만큼의 복을 원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구하는 복은 존재만으로도 복이 되어주는 삶이다. 누군가에게 복이고 싶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버지 집에서 떠나라고 하셨다. 그 부르심은 복이 되라는 초대다. 복의 근원이 되라는 부르심이다. 아브라함이 수많은 이들에게 복이 되게 하신 것처럼, 한 영혼이 숨결만으로도 누군가에게 복이 될 수 있다. 그때 알아보지 못한 수많은 복이 누군가의 얼굴로 드러난다. 복 받는 삶보다 복이 되는 삶의 신비에 매혹 당한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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