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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당연을 뒤집다”

기사승인 2019.07.18  12:5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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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묵상하며

46 예수께서 아직도 무리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와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었다. 47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을 하겠다고 바깥에 서 있습니다.”] 48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49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12:46~50/새번역)

공무원시험, 임용고시, 각종 취업시험, 우리 시대 수많은 부모와 자식들에게 애끓는 기도제목입니다. 제 자식 붙으면 너무나 감사하고, 남의 자식만 붙으면 그렇게도 서운합니다. 나와 남, 제 자식과 남 자식 너무나 분명한 선이 그어집니다. 부조리한 경쟁의 구조 자체를 의심할 여력은 없습니다. 그저 제 자식이 성공하면 자랑스럽고, 하나님께 영광이며 감사합니다. 그것으로 가슴 쓸어내리며 안심합니다.

물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안다고 얼마나 달라질까, 싶을 수 있습니다. 설득력 있어 보이는, 가슴 아픈 말입니다. 현실적으로 우선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겹습니다, 그러나 정말 현실적인가요? 냉정하게 생각해 봅니다. 이 부조리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을 확률이 정말 더 현실적인 확률입니까? 부조리한 구조에 깨어 감시하고 비판하여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확률보다 더?

▲ Diego Rivera, “Calla Lilly Vendor”

둘 다 로또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어떻게든 이뤄야할 확률로 보고 달려듭니다. 실패하더라도 젊음을 불태워 도전해봅니다. 다른 하나는 쉽게 포기해야할 비현실적인 확률로만 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 부조리함을 견고하게 유지합니다. 덧없는 상상을 해봅니다. 각종 시험을 통과하려고 애쓰는 만큼의 열정으로 세상을 바꾸려 애쓴다면 어떨까? 아니 그 열정의 일부라도 모아본다면 어떨까?

주님께서는 일상의 단순한 대화를 통해서 사회적 통념을 흔드십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그 말에 정말 누가 어머니며 형제인지 다시 생각하게 하십니다. 당연시 하지 않으십니다. 내 자식, 네 자식의 구분, 내 어미와 네 어미의 구분을 당연시하는 세상을 흔드십니다. 당연시하는 그런 구분이 차별과 구조악을 합리화합니다. 출발선부터 불공평한 그 모든 경쟁을 정당화합니다. 일단 내 자식부터, 내 가족부터 살고보자는 두려움이 의심의 여지없이 견고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차별과 구조악의 내면화를 흔들어 버리십니다.

어머니와 형제만 언급했는데, 결론에는 자매까지 포함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면 남녀 할 것 없이, 참된 제자입니다. 그들을 가족으로 이름 하십니다. 당대에 여자를 제자로 받지 않던 흐름을 거슬러 여제자를 받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매로 이름 하십니다. 어머니와 형제라는 평범한 언어 속에 숨은 차별과 억압과 폭력의 뿌리를 뽑아 버리십니다. 뒤집어엎고 시원스레 열린 환대를 보여주십니다.

말씀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일상의 평범한 단어 하나에까지 스며든 폭력과 기만까지. 그러나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망막합니다. 자기 피붙이조차 마음껏 사랑하기가 쉽지 않은데, 때론 가족이 친구보다 못한 원수가 되기도 하는데, 너무 난해하고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보면 너무나 단순합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강박적으로 다 의심하며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회학이나 비판철학에 정통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좁지만 단순한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길,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 나라의 씨알이 됩니다. 그 길을 걸으면, 세파를 거슬러 십자가를 지는 벗들이 형제와 자매로, 아버지와 어머니로 느껴집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랑이 자기 혈육을 더욱 사랑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지레 겁먹고 너무 멀리 걱정하지 않아야겠습니다. 포도 줄기에 접 붙으면 자연스레 열매가 맺힙니다. 물론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을 원한다면, 주님의 멍에만이 쉼을 줍니다. 주님의 멍에만이 이 길을 쉬엄쉬엄 나아가게 합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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