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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정신의 삶’(vita contemplativa)과 양명의 ‘치량지’(致良知)

기사승인 2019.07.17  18:2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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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natality)의 교육학과 왕양명의 치량지(致良知) (3)

아렌트에게서의 인간 정신의 ‘판단력’과 악의 평범성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a)에 대한 조건을 이야기할 때의 인간 행위와 자유(의지)에 대한 아렌트의 깊은 신뢰는 그러나 그녀의 사고가 깊어짐에 따라 더욱 검토를 받는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근본악’에 대한 생각을 『인간의 조건』에서도 여전히 표명했고,(1) 그 근본악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행위의 창발성을 믿었다.

이러한 입장은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인간의 ‘사고’와 ‘철학’과 ‘정신’보다는 ‘행위’와 ‘정치’와 ‘활동적 삶’을 더 우위에 두는 아렌트의 정치철학이 비록 서구 전통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역전한 모습이긴 하지만 여전히 세계관적 이원론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그녀는 그러나 이 시기의 이원론이 무너지는 경험을 특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재판을 겪으면서 하게 된다. 즉 그녀는 인간의 악한 행위가 어떤 확고한 악한 ‘의도’(volition)나 ‘신념’(will)이 없이도 가능해지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악을 의지의 문제와 연결해서 형이상학적 ‘근본악’으로 보거나 또 하나의 존재론적 ‘실체’(nature, destiny, original sinnfulness)로 보는 것의 문제점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녀가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발견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발견이 있기까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아렌트는 이미 『인간의 조건』 시대에 자유의 문제, 특히 정치와 관련된 자유의 문제를 개인의 의지의 문제로만 보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루소 이후 근대사회에서 ‘자유’(freedom)와 ‘주권’(sovereignty)을 일치시키는 것은 ‘자유’를 ‘자유의지’(free will)로 환원시키고 일치시킨 서구 철학적 시도의 “가장 유해하고 위험한 결과”이다.(2) 이 대신에 그녀는 이미 이 시절에 자유한 인간의 행위를 불러오는 것은 단지 주관의 사고(intellect)나 의지(will)의 문제가 아니라 이보다 더 객관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에서 형성된 “원리들”(principles)로 인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 원리들이란 결코 어느 한 개인이나 그룹의 ‘동기’(motives)나 ‘목표’(goal)가 아니고, 몽테스키외에 의해서 ‘덕(목)’(virtue)이라고 불려진, 결코 이 세상의 한 개인이나 시대에 의해서 소진될 수 없고, 항상 다시 인간의 기적 같은 행위 가운데서 현현되는 것이라고 했다.(3) 이러한 설명에서 우리는 이미 이때에 아렌트가 인간의 행위를 더욱 더 객관과 세계와 관계시키려고 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개인의 주관과 의지에 휘둘려진 근대 이후의 세계와 역사를 치유하고,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의지보다도 더 근원으로 내려가서, 그 의지를 촉발시키고, 의지가 의도하는 목표의 내용을 파악하는 인간의 근원적 성찰의 힘인 ‘사고’를 다시 탐구하며, 그래서 그 사고가 항상 관계하는 ‘사실’(fact)과 실제의 그러함(realness)의 세계성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미완성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전향의 산물인 『정신의 삶』 서문에 아렌트는 왜 항상 “행위의 감독자”(an action watcher)였던 자신이 다시 인간의 ‘정신적 삶’에 관심하게 되었고, 그 정신적 삶과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살피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거기서 아렌트는 서구 데카르트에게서 한 최고점을 보여준 주관의 “유아독존주의”(solipsism)야말로 철학의 가장 파괴적인 오류이고,(4) 근대에 올수록 사고의 대리인으로서의 의지를 가지고, 특히 마르크시즘이나 실존주의에서처럼 인간의 의지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야말로 “(서구)형이상학적 오류의 마지막”(the last of the metaphysical fallacies)모습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다.(5)

아렌트는 그녀의 『인간의 조건』에서는 인간의 탄생성을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행위 할 수 있는 기적 같은 근거로 밝혀주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정신의 삶』에 대한 심도 깊은 탐구 중에 ‘판단(Judging)’을 남겨놓고 있는 ‘의지(Willing)’부분을 마무리하면서는 그 탄생성이라는 것을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생산자이고 창조자가 아니라는 조건으로서의 인간 의지(행위)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가장 뚜렷한 표시로 보고 있다. 즉 탄생성이란 우리의 존재가 그 탄생으로 인한 창발성과 더불어 나 이외의 ‘누군가에 의한’ 탄생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인간 정신의 의지의 차원을 넘어서, 좀 더 ‘객관’과 ‘사실’과 ‘세계’, 그리고 ‘원리’와 관계되는 “판단력” 검토에로 들어간다.

“시작할 수 있는 힘이란 탄생성에 근거하는 것이지 결코 창조성(creativity)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한 선물(gift)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새로운 인간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탄생하는 덕분으로 이 세상에 다시 출현한다는 ‘사실’(the fact)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가 탄생 덕분으로 자유에로 불려 졌다는 것은, 우리가 그 자유를 좋아하든 또는 그 임의성에 질색을 하든, 그것과 더불어 “기뻐하든”(pleased), 또는 일종의 운명주의를 내세우면서 그 끔찍한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선택하든 관계가 없다. 이 짐은, 그 자체로서, 인간 정신력의 또 다른 힘, (행위 또는 의지의) 시작할 수 있는 능력보다 결코 덜 신비적이지 않은 ‘판단의 능력’을 검토함으로써만 풀 수 있는 문제이다. 그 검토는 적어도 우리에게 우리의 기쁨과 불쾌 속에 무엇이 관계되는지를 알려줄 것이다.”(6)

아렌트에 대한 깊이 있는 전기를 쓴 영-브릴(E. Young-Bruehl)에 의하면 1972년경부터 아렌트는 자신을 ‘철학자’(a philosopher)로 부르는 것에 대한 주저를 내려놓게 되었으며, 『정신의 삶』을 쓸 무렵에는 그녀는 다시 자신의 “첫사랑”(first amour) 인 철학에로 돌아왔다고 말했다고 한다.(7)

양명의 ‘양지’(良知)의 발견을 위한 고통

일반적인 전통의 유학자와는 달리 학자이면서 동시에 문필가, 정치가, 군인 등의 매우 활동적인 삶을 살고 있던 양명에게서도 지금까지 살펴본 아렌트에게서의 전환을 유사하게 발견할 수 있다. 양명은 자신의 심즉리(心卽理)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깨달음에 따라 이미 우리 마음 안에 만물에 대한 지식이 있고, 행한다는 것은 이미 아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오직 행함에 힘쓰는 일이 남아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앞에서 본 대로, 양명은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유교전통의 공부방법인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를 의(지)(意, intention)의 문제로 보았고, 그래서 책을 많이 읽고 바깥사물에 대한 지식을 확충하는 방법 대신에 ‘뜻을 성실히 함’(誠意)과 ‘마음을 바르게 함’(正心)의 공부 방법으로 가르쳤다.

이 무렵 양명은 제자들에게 책을 통한 공부 방법 대신에 자기 마음속의  心의 활동을 살피는 ‘명상의 방법’, 즉 ‘정좌’(靜坐)를 아주 효과적인 공부 방법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이는 심즉리의 원리에 따라 “오경의 모든 말씀이 오직 내 마음의 각주인 것 같다”(乃以黙記五經之言證之)는 체험을 바탕으로 뜻을 성실히 하고, 行을 독실하게 하는 방법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성현을 향한 보편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8)

그러나 이렇게 지행합일을 강조하고, 정좌의 방법을 추천하면서 한없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지만, 양명은 한 편으로 제자들로부터 계속해서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고, 예를 들어 왜 어떤 사람은 그 부모를 마땅히 섬겨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지식을 행하지 않고, 형에게 아우 노릇을 다해야 함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또한 그는 자신이 추천한 정좌의 방법이 잘못하면 남용이 되어서 “신체를 ‘마른 장작’으로, 또는 정신을 ‘불 꺼진 재’로 돌아가게 하는” 위험이 있는 것을 보았다.(9)

이러한 부정하기 어려운 ‘지행분리’의 현실 앞에서 양명은 자신의 심즉리와 지행합일의 가르침을 다시 ‘존천리 거인욕’(存天理 去人慾, 마음의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라, to preserve the heavenly Principle and get rid of selfish human desires)의 방법으로 재정리하여 제시한다. 즉 그는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간의 마음은 그 ‘본체’(心之本體)가 ‘천리’(天理)인바, 이 천리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 마음의 핵심을 ‘의’(意)로 보았던 관점과는 또 다른 것인데, 앞에서 아렌트가 인간 자유의 문제를 단지 개인의 의지의 문제가 아닌 밖에서 요청되는 ‘원리들’(principles)에 따르는 문제로 보면서 객관과 세계와 의지가 아닌 ‘사고’(理)의 영역에로 더욱 다가간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해결 앞에서 그러나 양명은 그렇게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가 여기서 지행분리(惡)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욕’(人慾, human selfish desires)이라는 전통의 언어를 다시 가져왔고, 그렇지만 그 인욕의 현실에 그렇게 몰두하지 말고 우리의 주된 관심을 마음의 본체인 ‘천리’에 두라고 강조했지만, 그러나 만약 이렇게 인간의 심을 다시 ‘천리’와 ‘인욕’으로 나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심즉리와 지행합일의 깨달음으로 그렇게 반대했던 주희의 우주론적 이원론인 ‘인간의 이성적 본성만이 선하다’는 성즉리(性卽理)에 스스로가 다시 빠지는 모습이 되기 때문이다.

양명은 현실에서 인욕의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지만, 인간 심이 행위 할 수 있는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줄기차게 ‘존천리 거인욕’을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의 천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는 잘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인간의 악의 문제를 인심(人心)에 두고서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것을 주희가 했던 것처럼 ‘氣’(the material force)라고 하는 또 하나의 우주적 실체를 끌어들여서 관념론적으로 이원론적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았던 양명은 그래서 줄기차게 심체로서 천리에 집중하라고 했지만, 그 천리를 명시적으로 기술할 수가 없었고, 단지 질문자들에게 그들 자신들이 직접 발견해야 한다고 권고했을 뿐이었다.(10)

그렇게 거의 6여년을 지내면서 그 사이에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그가 겪었던 어려운 정치적 딜레마와 더불어 여러 변경 지방에서 근무하면서 양명은 민중들의 고통과 비참 앞에서  깊은 무력감을 느낀다. 이 비관적 무력감을 그러나 양명은 1521년 경 또 한 번의 인간 心의 깊은 경험으로 극복한다. 즉 인간 정신의 ‘양지’(良知, the innate knowledge of the good)의 발견을 말하는데, 다시 말하면 인간 心의 본체로서 그가 좀 더 분명하게 지시하기를 원했던 ‘천리’가 바로 우리가 선천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선한 판단력’(良知)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양명은 자신의 이 발견을 “백 번의 죽음과 천 번의 고난”(百死千難)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고 고백하였고, 이 이후부터는 그의 모든 노력을 바로 이 인간 마음의 본체인 선한 판단력, 양지를 신장시키고 그것에 대한 가르침(致良知)을 펼치는데 주력한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아렌트가 예루살렘에서의 아이히만의 재판을 겪으면서 근본악의 문제를 ‘악의 평범성’으로 새롭게 볼 수 있었고, 인간의 행위와 의지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정신의 힘으로서의 ‘생각하는 힘’(thinking)과 거기서의 ‘판단력’(judging)에 좌우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과 유비된다. 당시 아렌트는 자신의 이러한 발견을 솔직하게 밝히면서 내외의 비난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었고, 또 그즈음에 교통사고로 거의 죽음을 경험하기도 하였으며, 남편의 병도 발병했지만, 그녀의 친구 M. McCarthy에 의하면, 아렌트는 고백하기를 자신은 이 보고서를 “설명할 수 없는 기쁨”(a curious euphoria) 속에서 저술했다고 한다.(11)

아렌트는 인간 ‘정신적 삶’에 대한 통찰에서 비록 완성을 하진 못했지만 칸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서 ‘판단력’(judging)에 집중했고, 양명은 맹자로부터 인간의 선천적인 선한 감수성인 ‘양지’(良知)를 재발견하고서 거기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다음 편에서부터 이 인간 정신의 근원적인 힘인 판단력과 양지가 과연 무엇일까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미주

(미주 1)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태정호 역 (서울: 한길사, 2001), 306.
(미주 2) Hannah Arendt, ‘What is freedom?’, Between Past and Future (New York: Penguin book, 1993), 164.
(미주 3) Ibid., 152.
(미주 4) Hannah Arendt, The Life of the Mind, One-Volume Edition (San Diego, New York and London: HBJ Book,  1978), One/Thinking, 46.
(미주 5) Ibid., 215.
(미주 6) Ibid., Two/Wiling, 217.
(미주 7) Elisabeth Young-Bruehl, Hannah Arendt for Love of the World,(New He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82), 327.
(미주 8) 쥴리아 칭, 『지혜를 찾아서-왕양명의 길』, 이은선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1998), 92.
(미주 9) Ibid., 103.
(미주 10) Ibid., 144.
(미주 11) E. Bruel-Young, op. cit., 337.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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