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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 합류하다

기사승인 2019.07.13  18:4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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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운동에 전심을 다하던 시기

감옥에서 출소하자마자 나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로 김동완 목사를 찾아갔다. YWCA사건으로 교도소에 들어가서도 YH여성노동자들의 집회에서 받은 충격은 사라지지 않고 나를 노동운동에 투신하도록 이끌고 있었다. 마침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소속 부평의 광야교회 담임자리가 비어 우선은 광야교회 목회를 하면서 노동운동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인천에 요가를 보급하다

광야교회에 가보니 노동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황영환 선생, 동일방직출신 김명자, 노동운동가 김지선 등이 그나마 전두환의 혹독한 도시산업선교회 탄압 속에서도 다른 노동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도산(도시산업선교회 약칭)이 들어가면 회사가 도산한다고 퍼뜨려 공장들은 도산하면 치를 떨었다. 나는 황영환 선생 등과 협의하여 새벽에는 감옥생활이나 공장생활에서 몸이 나빠진 사람들을  위해 요가를 하기로 했다.

무슨 홍보한 것도 아닌데 한두사람 모이더니 교회가 그득차게 되었다. 나는 감옥에서 요가로 몸을 단련하면서 요가만 잘해도 병걱정없고 강인한 체력을 유지할 수 있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다. 광야교회에서 새벽에 요가를 지도한 것이 인천에서는 처음 요가가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모습 ⓒ인천산선 제공

노동운동학습은 81년 여름부터 권호경 목사가 맡고있는 사회선교협의회의 훈련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71년 숙식이 걱정되어 김동완 선배가 1달 숙식하면서 알랜스키 훈련을 받자고 했을 때 아무런 생각없이 예하고 참여한지 딱 10년만에 합숙훈련을 하게 되었다. 다만 그때는 빈민과 노동파트만 있었는데 이번에는 농민 파트까지  들어가 있었다.

이때 강진출신의 김정순을 사귀었다. 합숙하면서 내가 요가를 지도하게 되었는데 권호경 목사는 감옥에서 김용상에게 요가를 배운 기억이 있어선지 내가 가르치는 것이 용상이보다 더 훌륭하다고 칭찬한다.

우리는 숨어다니면서 학습을 하고 있었는데 9월쯤인가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바로 한번 들었는데 내가 잊혀진 계절을 그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후로는 노는 시간만 되면 나에게 잊혀진 계절을 불러달라고 야단이다. 이렇게해서 잊혀진 계절은 나의 18번이 되었다. 노래가사에 나와 있는 것처럼 10월의 미지막 날이 되면 전화까지 온다. 형님 어디서 잊혀진계절을 부르고 계십니까? 우리 봐야하는 것 아닙니까? 하고 말이다.

김근태 선배를 만나다

▲ 고 김근태 선생 ⓒGetty Image

사선훈련이 끝나고서는 광야교회는 신철호 전도사가 맡게 되었고 나는 동구 화수동에 있는 도시산업선교회로 활동거점을 옮겨갔다. 화수동 센터에 가서는 조화순 목사님을 자주 뵙게 되었다. 조 목사님은 내가 공장생활을 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노동간사인 김근태 선배의 지도를 받으라고한다.

이때 처음 김근태 선배를 만났다. 김 선배는 말이 적고 조용조용 이야기한다. 노동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의 진실됨이고 노동자에 대한 애정임을 강조한다.

나도 공장에 들어가서 최소한 6개월은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공장을 찾아다녔다. 신분은 고졸로 속여야 했다. 이때만 하더래도 대학출신은  관리자로만 취직했고 노동자로는 대학출신은 없던 때였다. 대학 출신이냐 아니냐가 신분적 구분으로 작용하던 시절이었다.

노동운동과정에서도  노출, 학출이라는 구분이 생겼다. 고졸로 속이더라도 서류심사나 면접이 까다로운 안정된 공장은 들어갈 수 없었다. 노동이 힘들고 사고날 위험도 많아서 노동자들이 뻔질나게 바뀌는 데가 아니면 안 되었다.

인천에서 그런 곳이 경동산업이다. 나도 결국은 경동산업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경동산업은 스덴이나 금속 등으로 주방제품을 만드는 회사인데 나는 프레스 공정에 배치되었다. 출근해서 퇴근시까지 그냥 금속만 짜르는 것이 일이었다. 아차 정신줄을 놓으면  손가락을 짜르게 된다.

요가한 실력으로 집중에 집중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월세방에 와서는 요가로 지친 몸을 풀었다. 6개월 공장생활을 마치자 그때서야 김 선배는 자신이 지도하던 노동자들과의 만남에 나를 끼워 주었다.

이때 만난 선배가 코리아스파이스 해고노동자 박남수다. 82년에 코리아스파이스 노조부위원장이었던 박 선배는 특별한 이유없이 해고되었다. 허기야  박남수만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튼실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현장에서 축출하는 해고가 시작되었다. 원풍모방 지도자들도 그렇고  황영환 선생도 이때 시간차는 있었지만 해고되었다.

박 선배는 김근태와 협의하여 민사소송 재판으로 들어갔다. 박 선배는 변호사 도움없이 혼자 재판을 이어나갔다. 전두환 치하에서 뻔한 재판 뭐하러 시간 낭비하느냐고 원풍지도자들은 재판할 생각을 아예 저버렸고 박 선배에 이어 황영환 선생은 황인철 변호사 등의 도움을 얻어가면서 소송을 했다. 9년후 90년에 박선배는 재판에서 이겨 복직하게 되었고 노조위원장까지 되었다. 황영환 선생은 패소했다.

김근태, 인천을 떠나 민청련 의장으로

83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김근태와 박남수 또 한사람의 해고자 김명종 그리고 나 4명이 어느 조용한 술집에서 만났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근태형이 나지막하게, 그러면서도 약간은 긴장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내가 노동판을 떠나게 된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로 대학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제적되고 있고 공장에서는 유능한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있다. 민주투사 청년들이 뭉쳐 폭압정치에 틈을 내는 공개정치투쟁을 하기로 했다. 그 이름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인데 의장을 맡기로 했다.”

침묵이 흘렀다. 그렇지만 그 침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떻게보면 장난끼도 있기도한 박 선배가 별반 어렵지도 않게 툭 말을 던진다. 그건  노동자를  배신하는 건데 한다. 음! 배신 으스스한 단어다. 박 선배는 별 무게를 싣지않고 툭 던졌는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무겁게 닥아왔다

근태 형의 조리가 있으면서도 차분한 설명에 허기야 나도 잘 설득되지 않았다. YH여성노동자 집회에서의 충격으로 노동자의 단합된 힘이라야 그래도 군사독재를 끝장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인천에 왔기에 다시 민청협 같은 청년조직인 민청련의 의장을 근태 형이 맡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자꾸 의문이 드는 것이다.

2018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YWCA위장결혼식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하여 Y사건 주동자 모두의 구술을 받았는데 조성우의 구술에는 의외로 근태형이 의장직을 맡는과정이 소상하게 언급되어 있다.

민청협 재건작업을 83년 1월부터 시작했는데 주력들은 이범영, 서동만, 백계문, 이우재, 백삼철 등이었어요. 이제 대장을 찾아야 하는데 김근태 형을 세우기로 하고 그 역할은 제가 맡았어요. 당시에 현장투쟁론 하고 정치투쟁론 하고 이게 갈립니다. 근태 형이 맡으면 현장투쟁, 정치투쟁이 분리가 안 되지요. 그때가 해외추방이 가시권에 들어왔을 때예요. 이신범이 미국에 보내고, 심재권씨 호주로 보내고. 장기표는 마산에 가서 서울 절대 안 온다 하고. 나는 안 나가는 걸 조건으로 상임위원장 맡기로 하고 그래서 근태 형이 수락하고.

근태 형은 인천을 떠나면서 가지고 있던 사회과학·노동관련 자료들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한다. 내가 지식이 부족해서 좀 열등의식이 있는 걸 눈치 챘는지 “정택아! 지식이 좀 부족하더래도 정직함이 너의 무기니까, 너는 노동자와 잘 할 거야” 한다. 근태 형은 떠났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총무는 김동완 목사가 맡았다.

안산을 거쳐 다시 인천으로

책임을 내려놓은 조화순 목사는 이때 아니면 다시는 노동현장에 들어갈 수 없다고 안산에 같이 가자고 한다. 나는 조 목사를 모시고 안산에 집을 얻어 같이 지내게 되었다. 조 목사님 나이가 49세였고 내나이는 34세였다. 조 목사님은 여성사업장을 찾아 다녔지만 쉽지가 않았고 나는 제련소에 금새 취업을 하였다.

안산에서 6개월 정도 생활하다 다시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조목사님 이 도시산업선교회를 떠나 전에 목회하시던 달월교회로 가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도시산업선교회 건물에는 괜히
찍히지 않나 해서 노동자들이 찾아오지 않고 정말 존경하던 근태 형도 떠나자 조 목사님은 안산 가시기 전부터 여러 생각이 많았었던 것같다. 김동완 총무는 후배 박일성을 동암에 노동자료실을 마련하여 일하게 했다. 화수동 도시산업선교회 건물이 항시 감시받아 노동운동에의 접근이 어려워진 상황을 타개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근태 형의 역할은 전태일의 친구이면서 청계피복 노동조합장까지 했었던 양승조에게 맡겼다. 그리고는 김동완 목사도 얼마 되지 않아 NCC로 근무처를 옮겼다. 내가 의존하던 선배 3사람을 다 떠나보내고 대학을 졸업도 못한 내가 졸지에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총무 자리에 앉게 되었다.

▲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세운 노동자교회 ⓒ인천산선 제공

김정택 목사 kjt94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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