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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활동적 삶’(vita activa)과 양명의 ‘심즉리’(心卽理)

기사승인 2019.07.11  17: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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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natality)의 교육학과 왕양명의 치량지(致良知) (2)

20세기 서구 전체주의

삶의 거의 말년까지도 자신이 ‘철학자’(philosopher)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대신 ‘정치이론가’(political theorist)로 불리기를 선호했던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totalitarianism) 비판은 그녀가 한 유대인 지성인으로서 20세기 인류가 겪었던 끔직한 삶의 정황들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것은 제국주의와 반유대주의, 스탈린주의 등의 체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철저히 “무용지물화”(superfluous)되고 무기력해지는 것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다.

꽉 짜여진 “기획”(project)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된 목표가 달성되도록 하는 기도(企圖) 속에서, 그 목표에 합당하지 않고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또는 그 기도의 실현가능성이나 독재성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모두 제거해 버리는 체재를 그녀는 전체주의 체제로 규정한다. 그 체제 속에서 어떻게 거기에서 세워진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 없다”(everything is possible)는 신념 아래 극단까지 인간성이 파괴되어 갔으며,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비인간성의 일이 자행되었는지를 밝혀주었다.

거기서 대중들은 “무감각해졌고”(no-sense, senselessness), 오직 그들의 사고를 기능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조그마한 이익과 힘에라도 매달리는 자기 보존의 본능 이 난무할 뿐이다. 철학자를 포함하여 소위 지성인, 교양인이라고 하던 사람들도 쉽게 무감각한 대중이 되어서 아주 작은 이익을 위해서도 인간성의 존엄들을 간단히 내던지고 자신의 안위와 보존에만 매달리는 속물들이 되어가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전체주의 테러는 마지막에는 이러한 상식적 실리추구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목적에 대한 ‘초의식’(ideological supersense)에 사로잡혀서 모든 현실성과 현실 속의 다양함과 변화를 무시하고 결국에는 자신과 자기편까지도 모두 삶의 정지와 철저한 無(the nihilistic banality of homo homini lupus)로 몰고 간다.(1) 한나 아렌트는 어떻게 이러한 인간의 범죄(crime)가 가능할 수 있었는지를 묻고 또 묻는다.

그 범죄란 결코 우리가 지금까지 인간사에서 경험했던 대로 일반적인 인간적 악행들-이기심이나 욕심, 탐욕, 복수, 권력욕 또는 비겁함 등-의 동기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벌을 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최신종의 범죄로서, 그녀에 의하면, 서구 철학사나 심지어는 기독교 신학에서조차 뚜렷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칸트만이 유일하게 그 존재를 감지한- ‘근본악’(radical evil)이 아닌가 생각한다.(2)

실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오로지 자신의 목표에만 몰두하여 현실의 뜻밖의 것과 다양함, 활동들을 경멸하는 전체주의의 악을 아렌트는 나중에 자신의 『정신의 삶』(The Life of the Mind)에서 다각도로 탐구한다. 그녀는 서구 정신사에서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오류들”(metaphysical fallacies)을 지적하는데, 항상 현실보다 이념을, 몸과 감정과 의지보다 이성과 사고를, 활동보다는 존재를 우위에 놓아온 것과 20세기의 전체주의적 관념주의는 무관하지 않다.

비록 헤겔이 인간 정신의 본질을 ‘활동’(action)으로 전환시켜 놓기는 했지만, 그 정신의 활동과 역사를 마치 과학의 체계처럼 만들어놓고서 그 체계로써 미래의 모든 것을 규정해 놓으려고 했다는 것은 바로 20세기 전체주의를 불러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본다.(3) 아렌트에 따르면, 헤겔 이후 철학의 신은 이제 더 이상 ‘불멸성’(immortality)이 아니라 ‘필연성’(necessity)이 되었고, 그래서 헤겔은 “철학적 사고의 목표는 우연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언표 하였음을 지적한다.(4)

15세기 중국 명나라의 주희 주지주의

15세기 후반부터 중국 명나라(1368-1644) 후기의 유학자 양명이 고통 받고 있던 것도 바로 전 시대의 거대한 철학적 체계가 불러온 삶과 사고의 고사(枯死)였다. 11세기 중국 신유교의 집대성자로 평가되는 주희의 철학은 그동안 300여년을 지내오면서 시험과목이나 사상의 표현 방식까지도 엄격하게 규제하는 국가 과거제도를 통해서 거의 관학화 되었고,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송나라(960-1279) 신유교의 종합자인 주희의 철학은 이 세상의 만물을 궁극의 합리성인 ‘태극’(太極 또는 無極, The Great Ultimate) 또는 ‘천리’(天理, The heavenly Principle)의 현현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性)도 그 합리성(理)의 표현인데(性卽理),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본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만물 속에 같은 합리성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합리성의 현현들을 탐구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공부법이 지극히 지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이 되는 것임을 말한다. 

어린 시절 일찍이 생모를 여의고 무정한 계모 밑에서 자라났지만, 아주 일찍부터 삶에서 제일가는 일은 과거에 급제하는 일이 아니라 ‘성인’(聖人)이 되는 길을 배우는 것이라고 선언한 양명은 많은 탐색을 거쳐서 주희 철학과 만나게 된다. 주희 철학의 가르침대로 인간 만사와 만물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책을 읽고, 경전을 공부하고, 지식을 쌓아 갔지만 그러나 그는 인간은 이러한 주지주의적이고, 지식의 량을 축적해 가는 방법을 통해서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가운데서 당시 명나라 후기의 지적,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면, 15세기 초까지의 번영을 뒤로 하고 쾌락에 빠진 왕들을 대신해서 ‘비밀경찰조직’을 운영하는 몇몇 환관들의 전제 권력남용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지식인들은 전제권력의 화를 피해서 아예 숨어버리거나 과거시험 과목의 암기나 화려한 글쓰기에 몰두하였고, 지식인들의 정치적 저항은 한갓 꿈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젊은 유학자 관리 양명은 당시 조정의 막후 실력자인 환관 유근의 부당한 처리로 투옥된 어떤 관리들을 구하려고 용감하게 나섰다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는 투옥되어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매 맞고 극도의 오지인 용장으로 유배되어 가는데, 그러나 거기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보통 양명의 ‘용장대오’(龍場大悟)라고 일컬어지는 이 경험 속에서 양명은 인간의 삶은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한 지식을 모두 습득할 만큼 그렇게 한계가 없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이론적 지식의 습득만으로는 결코 행위에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아렌트의 ‘탄생성’과 양명의 ‘심즉리’의 발견

양명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만의 존재가 아니라 몸의 존재이고, 감정과 의지의 존재이기도 한데, 그리하여 차가운 이성적 본성(性)만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 즉 ‘심’(心) 자체가 ‘하늘’(理)과 맞닿아 있으므로(心卽理), 성학의 길을 단순히 지적 현학주의로 만들어버린 주희의 사고에 동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희의 ‘성즉리’(性卽理)에 대해서 양명의 ‘심즉리’(心卽理)로 말하여지는 이 명제는 양명이 “비로소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으로 스스로 충족하니, 지난날 대상 사물에서 이치를 구한 것은 잘못 이었다”는 깨달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과 연결하여 보면, 바깥에 세워진 목표를 위해서 불가능할 것이 없는 것처럼 인간을 내몰면서 삶의 다른 모든 현실적인 측면들, 즉 몸과 마음과 감정의 측면들을 정지시키는 지적 전체주의를 지양하고, 인간의 활동(心)에는 많은 현실적인 제약들과 조건들이 있지만, 그래도 그 현실(心) 안에서 궁극의 도가 실현되는 것임을 알고, 매순간의 활동 속에서 도의 현현을 보라는 요구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매순간과 과정의 활동(行)이 중요하므로 양명은 줄기차게 行을 강조했고, 그 行의 본래적 모습인 ‘지행합일’의 구조를 드러내려고 하였다. 이것은 아렌트가 자신을 철학자가 아닌 ‘정치이론가’로, 그리고 철학자 그룹들을 종종 “학교사람들”(school-men)이라고 조롱하는 듯한 표현을 하면서 활동과 행위를 강조한 것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아렌트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의 악 앞에서 인간의 현실적 삶은 결코 그렇지 않은 ‘조건들’(conditions)을 찾기를 원했고, 인간의 정신적 삶이 아닌 활동적 삶이 어떠한 조건 하에서, 어떠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지를 보기 원했다. 여기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그러나 놀랍게도 인간의 활동이 그 지구적 제약과 ‘사멸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탄생성’과 전혀 새로운 것을 불러올 수 있는 ‘행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5)

이것은 양명이 심즉리에 대한 확신과 믿음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서 그 치유를 위해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아렌트도 자신의 『인간의 조건』을 ‘세계사랑’(Amour Mundi)으로 불러주기를 원했던 데서도 나타나듯이 그렇게 인간 활동의 한계와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그 활동들을 통해서 다시 좋은 것, 새로운 것, 궁극적인 것이 실현될 수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action)는 인간이 홀로 살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살아있다는 조건에서 나오는 인간의 활동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그 행위를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energeia)의 개념을 들어서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어떤 생산물도 남기지는 않으나 실행자체에서 완전한 의미를 가지는 활동”으로 밝힌다.(6) 즉 인간의 말과 행위란 본래적으로 ‘자기목적성’을 갖는 것이며, 여기서 ‘목적’(telos)은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동 그 자체 안에 놓여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해서 ‘행위’는 항상 필연성이나 유용성 때문에 나와서 언제나 어떤 생산물을 지향하는 ‘노동’이나 ‘작업’의 활동과는 달리 바로 이 자기목적성 때문에 인간 고유의 인격성과 위대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공론영역이란 바로 이러한 인간의 행위가 실현되는 곳이라고 한다. 즉 이 영역에서는 인간이 어떤 공리주의나 유용성의 원리에 의해서 세워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지 않고 오직 그 현실태로서 받아들여지고, 자기 자신의 현실화가 실현되는 곳이다. 이와 반대로 소수에 의해서 공동체의 다수가 이러한 행위에의 가능성을 빼앗기고 수단으로 전락되어 오직 생산하는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받는 사회가 전체주의사회이고, 전체주의 악의 사회인 것이다.

아렌트의 ‘자유’(의지, will)와 양명의 ‘의’(意)의 발견

이렇게 본래적으로 순수 현실태와 자기목적성의 활동으로 이해되는 인간 행위의 문제는 다름 아닌 우리 삶과 활동에서의 ‘자유’(freedom)의 문제와 연결된다. 아렌트는 그녀의 비슷한 시기의 논문 “자유란 무엇인가?”(What is freedom?)에서 자기목적성으로서의 인간행위의 이해와 유사하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그 자유란 결코 개인의 ‘의지’(will)나 ‘사유’(thought)의 문제가 아니고, 또는 개인적인 자유(liberty)나 ‘주권’(sovereignty)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다양성이라는 인간의 조건 속에서 “전에는 전혀 없었던 것을 현재에로 부르는 행위”, 그래서 자신의 개인적인 동기나 목적을 뛰어넘어서 순간에서 행위 하는 것, 오직 ‘시작’(archein)에 몰두하는 것이지, ‘결과’(prattein)에 까지 염두에 두고서 주저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닌 활동을 말한다.(7)

이런 의미에서 그녀에 의하면 정치적 행위의 활동은 항상 불멸성(immortality)을 추구하면서 작품으로 무엇인가를 남기기를 원하는 예술의 행위와는 가장 극에 있고, 반대로 ‘퍼포먼스’(performing arts)로서의 예술은 정치와 인간의 행위와 가장 유사성을 보인다.(8)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는 왕양명이 자신의 심즉리의 터득에 따라, 즉 아렌트의 언어로 다시 이야기하면 인간의 ‘활동’(마음) 안에 ‘전혀 새로운 것’(하늘의 도)을 불러오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확신인데, 그가 이 확신에 근거해서 줄기차게 ‘지행합일’을 주장한 것이 생각난다. 그에 따르면 참된 知, 진정한 知(眞知)에서는 자연스럽게 행위가 따라 나온다. 그래서 知와 行은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知에서 行으로 옮겨지는 사이에 사적 욕망과 동기가 개입되어서 따지게 되고, 목적을 재게 되며, 다시 말하면 知가 생산물에 집착하면서 공리주의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양명에 따르면, “행(위)은 지식의 완성이고”(行是知之成), “知는 行을 지향한다.”(知是行的主意) 그러므로 “행위를 포함하지 않는 지식은 知라고 부를 수 없다”(不行不足謂之知)라는 것이다. 이것을 아렌트의 언어로 다시 해석해보면, 인간 활동의 가장 고유한 형태는 ‘행위’이고, 이것은 바로 자기목적성의 현실태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건강한 권력에 의해서 공론의 영역이 살아있는 사회란 모두가 각자 나름대로 행위 하면서, 즉 자신만의 고유성을 드러내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가장 악한 사회란 플라톤이 예시했던 대로 일인독재의 사회 속에서 “알지만 행하지 않는 자”와 “행하기는 하나 알지 못하는 자”가 철저히 구분되어서,(9) 모두가 참된 삶에서 소외된 경우를 말한다. 양명의 말대로 하면 모든 구성원에게서 知와 行이 완전히 나뉘어져서, 사적 욕망만이 들끓는 사회를 말한다.

양명은 이와 같은 인간 삶에서의 知와 行의 분리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行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그것이 우리 마음의 ‘의지’(意, will 또는 intention)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다시 말하면 心의 핵심을 ‘意’로 보고, 이 의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공부(格物)의 핵심이 된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의지란 마음의 ‘지향성’(intentionality)으로서 知라고도 할 수 있고 行이라고도 할 수 있고, 行의 시작으로서 세계만물을 존재에로 불러오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몸의 주재자는 마음(心)이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뜻(意)이다. 뜻의 본체는 앎(知)이며, 뜻이 가 있는 곳이 바로 사물(物)인 것이다. 만약 뜻이 어버이를 섬기는데 가 있다면,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 곧 하나의 (사)물이 되고, 뜻이 임금을 섬기는데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의 물이 된다. ... 그래서 마음 밖에 이치(理)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밖에 사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10)

양명은 여기서 선언된 ‘심즉리’(心卽理)-우리 마음 안에 만물의 이치가 있다-와 그 心의 핵심으로서의 의지(意)에 대한 이해-그것은 우리 마음의 의지야말로 만물을 시작하고 불러내는 기원자(originator)로 보는 것인데-에 근거해서 주희와 더불어 유명한 ‘격물’(格物, the investigation of things) 논쟁을 벌인다. 양명은 『大學』이 가르쳐주는 성학(聖學)의 길인 ‘8조목’(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에서 격물을 주희가 가르쳐준 대로 수많은 바깥 사물(외물)에 대한 탐구를 통한 지식의 확충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한다. 오히려 외물들이란 바로 나의 뜻(意)이 다가가서 불려지는 존재들이므로, 먼저 그 사물을 촉발하는 나의 뜻(意)을 고치는 공부, 나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내 뜻을 사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성실히 하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주희가 송대 이전의 『大學』 고본을 새롭게 편하면서 ‘성의’(誠意) 장 앞에 ‘격물’(格物) 장을 앞서서 배열해 놓는 것에 반대하고, 원래의 고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8조목의 모든 가르침이란 모두 한 가지로 ‘뜻을 성실히 추구하는데’(誠意) 있으며, 이것이 바로 격물의 진정한 의미라고 결론짓는다.(11) 부모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그 부모님 섬기는 일에 관해 기록해 놓은 수많은 책들을 읽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 섬기는 일에 마음이 닿자마자(知 또는 意) 거기에 어떤 사심도 끼어들지 않게 해서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일(行)을 통해서 참된 孝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렌트의 이야기대로 하면, 행위의 자기목적성과 창발성에 대한 강조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에서 아렌트는 인간 행위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유(freedom)의 문제가 한 개인의 의지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에 대해서 비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인간 의지의 문제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정신의 삶』에서 ‘사고’(thinking) 다음으로 ‘의지’(willing)의 문제를 다루면서, 어떻게 서구 정신사에서 의지의 문제가 점점 더 가장 중요한 테마가 되어왔는지를 밝힌다.

그녀에 따르면 영원 회귀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이 의지의 문제는 낯설다. 서구인들이 의지의 문제를 발견한 것은 인간 “내면”(inwardness)의 차원에 대한 “발견”(discovered)과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기독교와의 만남에서 바울의 고민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중세의 어거스틴과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등을 거쳐, 특별히 근대에 들어와서 가장 첨예화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근대에 ‘계획’(project)할 수 있는 자아에 대한 자각과 함께 ‘진보’(progress)의 개념이 등장하였고, 그리하여 이제 과거와 현재가 아닌 ‘미래’가 가장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면서 의지가 정신의 “가장 내적인 자아”(inmost self)로서 중요하게 된 것을 말한다.(12)

아렌트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중세까지만 해도 의지(자유의지, free-will)의 문제는 악의 존재 문제와 쉽게 연결되므로 그렇게 선호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약간 젊은 세대인 둔스 스코투스에 의해서 지성이라는 것은 의지에 대상을 제공해주는 보조자의 역할을 할 뿐이고, 그 대상에로 ‘향하는’ 의지의 “확인”(conformed)이 없이는 정확히 기능하지 못하며,(13) 따라서 지성(intellect)이 아닌 의지(will)야말로 유한한 존재인 인간존재가 그의 유한성을 넘을 수 있는 정신적 기제가 된다고 주장되었다. 둔스 스코투스는 ‘자유’(freedom)와 ‘필연성’(necessity)이란 모두 우리 정신의 두 가지 명암으로, 그것의 화해를 위해서 인위적으로 신적 은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로써 행위를 시작하여 그 필연성을 극복해 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행위의 원천”(the spring of action)으로서의 의지에 대한 경험은, 이후 근대의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서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화려하게 꽃피었고(the Now cannot resist), 니체의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에서 극점을 맞이했고, 마침내는 하이데거의 “의지하지 않는 의지”(will-not-to-will)에로까지 전개되었다고 한나 아렌트는 추적한다.

아렌트의 탐구에 따르면, 의지가 행위의 원천이라는 이해는 서구정신사에서 어거스틴에게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우리 감각을 한 곳으로 집중하게 되면, 기억에 모여진 인상들을 주재하여 이해에 재료들을 제공하여 행위가 일어날 수 있도록 기반을 준비한다.(14) 그런데 의지는 이 일에서 항상 두 갈래로 갈라진다. 즉 ‘원하는 것’(velle)과 ‘원치 않는 것’(nolle) 것 사이의 갈등인데, 그러나 그 갈등은 행위를 시작하는 순간 사라지고-이미 선택해서 시작한 것은 되돌릴 수 없으므로(행위의 환원불가능성)-의지는 행위를 시작함으로써 해방된다고 한다.(15)

이 의지의 해방이란 그러나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을 원함’(the will-not-to-will)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데, 그 ‘원하지 않을 것을 원함’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원함이고,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어거스틴도 둔스 스코투스에게서도, 아렌트에 따르면, 이 의지가 바로 ‘사랑’(love)으로 변할 때, 즉 행위로 변할 때, 드디어 의지는 휴식하고 만족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의지(또는 知)와 행위가 가장 온전히 결합된 이상적인 지행합일의 경우라고 한다.(16)

아렌트가 소개하는 어거스틴에 의하면,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란 “시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a beginning must exist)이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피조물의 종들과는 달리 ‘인격’(person)과 ‘개인’(individuality)으로 창조되었는데, 이 인격과 개인의 고유성이란 바로 그의 의지 속에서 표현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시작’(창조)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의지란 “창조자 하느님의 형상”(the image of a creator God)이라는 것이다.(17)

“의지는 한 편으로는 욕망,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성에 대해서 일종의 ‘쿠데타’(a kind of coup d'etat)처럼, 그렇게 행위 한다. 이것은 ‘자유로운 행위란 예외적인 것’이고, … ‘우리가 의지한다는 것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른 이야기로 하면, ‘의지하는 행위’(the willing activity)를 다룰 때 ‘자유의 문제’(the problem of freedom)를 다루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18)

 

미주

(미주 1) 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New York and London: A Harvest/HBJ Book, 1983), 458.
(미주 2) Ibid., 459.
(미주 3) Hannah Arendt, The Life of the Mind, One-Volume Edition (San Diego, New York and London: HBJ Book,  1978), One/Thinking, 91.
(미주 4) Ibid., 139.
(미주 5)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태정호 역 (서울: 한길사, 2001), 312.
(미주 6) 같은 책, 269.
(미주 7) Hannah Arendt, ‘What is freedom?’, Between Past and Future (New York: Penguin book, 1993), 151ff.
(미주 8) Ibid., 153-154.
(미주 9)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287.
(미주 10) 『傳習錄』 上 6조 “先生曰:然。身之主宰便是心。心之所發便是意。意之本體便是知。意之所在便是物。如意在於事親,卽事親便是一物。意在於事君,卽事君便是一物。... 所以某說無心外之理,無心外之物。”
(미주 11) 쥴리아 칭, 『지혜를 찾아서-왕양명의 길』, 이은선 옮김(왜관: 분도출판사, 1998), 110ff.
(미주 12) Hannah Arendt, The Life of the Mind, One-Volume Edition, One/Thinking, 214; Two/Willing, 44.
(미주 13) Ibid., Two/Willing, p. 140ff.
(미주 14) Ibid., Two/Willing, p. 140ff.
(미주 15) Ibid., 101.
(미주 16) Ibid., 102.
(미주 17) Ibid., 109.
(미주 18) Ibid. One/Thinking, 213-214.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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