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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감각과 지행합일의 인간교육을 위해서

기사승인 2019.06.26  17: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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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natality)의 교육학과 왕양명의 치량지(致良知) (1)

시작하며

지난주까지 왕양명과 함석헌의 비교연구를 살펴보았다. 이번 주부터는 다시 그 양명을 한나 아렌트(1906-1975)와 비교하면서 오늘 우리 시대를 위한 함의를 들어보고자 한다. 사실 이 연구는 꽤 오래된 작업이다. 2006년 한국에서 한나 아렌트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아렌트학회를 창립하면서 마련한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이고, 이후 그때  발표된 글들이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인간사랑 2009)이라는 책으로 엮이면서 들어갔고, 2013년에 다시 본인의 책 『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서』(모시는사람들)에서 선보인 것이다.

지난주에도 아렌트 말년의 핵심 저서 『정신의 삶-사유와 의지』가 한국의 대표적 아렌트 연구가 홍원표 교수님에 의해서 번역 출판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2천 년대에 들어와서 아렌트는 한국 사회에서도 특히 많이 회자되고 찾아지는 사상가이다. 그녀의 서구 20세기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해서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심도 깊은 성찰과 인간의 정치적 행위도 포함해서 모든 인간 행위와 삶의 정신적 기원을 탐색하는 연구는 오늘 인간 공동체 삶의 기초와 토대가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우리 문명이 다시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로 일ㅋㄴ널어지는 독일의 한나 아렌트 ⓒGetty Image

나의 아렌트 사랑은 1980년대 그녀의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칼 야스퍼스가 가르치던 스위스 바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귀국해서 그녀의 유대인 친구 한스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 Das Prinzip der Verantwortung』에 대한 연구를 거쳐서 2006년 한국 아렌트학회를 결성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공부하며 진척되었다. 아렌트 연구 동료들이 주로 정치학자나 철학자가 많았다면 나는 그와는 조금 다른 길을 갔는데, 즉 동아시아의 유교 전통과 대화하는 한국 여성신학자와 교육철학자의 시각에서 아렌트 사상이 내가 그 고루한 외양을 걷어내고 ‘다른 유교’로 새롭게 보고자 하는 동아시아 신유교적 사상과 많이 연결되는 것을 보고서 그 둘 사이의 관계 맺음을 여러 차원에서 시도해 온 것이다.

나는 참으로 적게 종교적이지만 그러나 풍성히 우리 존재와 공동체적 삶의 영적 기원을 밝혀주는 나름의 고유한 영성이 아렌트의 삶과 사고를 이끌어왔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것을 탈근대적 포스트모던 영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후 중국 명나라의 양명보다 조선의 퇴계가 아렌트와 더욱 잘 연결되는 것을 보고서 그 비교연구로 진척시키기도 했지만, 이번에 소개하는 논문을 기초로 시작했지만 여전히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는 양명과 아렌트의 비교 연구에 대한 단행본 저술이 나의 과제로 남아있다.

이번부터 연재하는 글은 그 개설적 서론으로서 양명과 아렌트 사상의 전체를 아주 집약적이고 원리적으로 정리하여서 그들 삶과 사고의 전체 구조를 서로 연결하여 보여주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이들 사고의 교육적 함의에는 오늘 한국 사회가 심각하게 몸살을 앓고 있는 교육적 전체주의를 넘을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들어있다고 본다.

아렌트와 양명 비교연구의 의의

이상처럼 본 글은 20세기 서구 최고의 정치철학자로 알려져 있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와 중국 명나라의 혁신적 유교사상가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의 사상을 비교연구하면서 거기서 얻어지는 지혜를 가지고 오늘 우리 시대를 조명해 보려는 것이다.

왕양명은 주지하다시피 11세기 송나라 주희(朱熹, 1130-1200)의 신유학을 그보다 300여년 후인 자신의 시대를 위해서 다시 한 번 크게 개혁한 사상가이다. 그는 당시 주희식 공부방법(聖人之道, To become a sage)이 심각한 주지주의적 관념론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개혁하여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고, ‘행위’할 수 있는 인간을 키워낼 수 있는 공부법으로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가 배움(學)을 통해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유교 본래의 가르침에 따라 다시 그 참된 공부법을 찾아 고통 하던 중 우리 모두의 본래 성품은 이미 성현을 이루는데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을 그는 ‘우리 마음이 곧 하늘’(心卽理)이고, ‘知와 行은 하나이다.’(知行合一)라는 말로 표현해 주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삶에 대한 탐구도 인간 본래성과 고유성에 대한 유사한 믿음을 전해준다. 20세기를 서구 관념론의 비극적 결과인 ‘전체주의 시대’로 보고, 인간 공통의 삶의 기반에 대한 관심을 모두 잃어버리고 저마다 사적 영역의 이익추구에만 몰두하는 시대를 규탄하면서도 아렌트는 인간이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으며, 약속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기적과 같이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인간 가능성을 말했고,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탄생성’(natality)으로 표현하였다.

이들의 사고와 탐색은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양명은 자신의 인간가능성에 대한 처음의 깨달음이 자칫 다시 심약한 주관주의와 관념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백번의 죽음과 천 번의 고난”(白死千難)을 겪으면서 고민하며 그 인간 心의 더욱 더 근본적인 기초인 ‘양지’(良知, the innate knowledge of the good)를 발견하게 된다.

양지는 인간 심의 기초적인 직관력으로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이고, 우리 인식의 대상인 세상을 사적 욕망이나 의도에 좌우됨이 없이 그 자체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한나 아렌트에게서의 유사한 전개는 그녀가 인간학적 주저인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인간 ‘활동적 삶’(vita activa)에 관심하고, 거기서 특히 ‘행위’에 집중적으로 관심했지만,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 행위를 가능케 하는 더욱 더 근원적인 정신의 힘인 ‘판단’(judging)에 주목하게 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 활동적 삶의 꽃인 ‘행위’가 주로 인간 정신의 주관적 측면인 ‘의지’(will)와 관계한다면, ‘정신적 삶’(vita contemplativa)의 ‘판단’이란 세계의 객관과 더욱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지적 감수성으로서 인간 의지와 행위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주지하는 대로 아렌트는 특히 칸트의 『판단력비판』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으면서 이 판단력의 정치적 속성을 부각시키는데, 왜냐하면 판단력이야말로 그것의 ‘확장’(enlargement)을 통해서 ‘사심 없음’의 마음이 되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소통과 공감의 능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 본유적인 소통의 정신적 힘을 발견한 양명과 아렌트는 그것을 확충하고 바르게 키워내기 위해서(致良知/ the enlargement of the mind) 많은 교육적 사고를 발전시키고, 이 본유의 능력을 진정으로 인간적인 자유와 문화, 교양의 힘으로 자라게 하여 자아와 인간뿐 아니라 세계를 배려하고 관심하는 행위의 능력으로 키우기를 원했다. ‘공적 감각’과 ‘지행합일’의 인간 육성을 말한다.

이렇게 본 글은 동서의 두 사상가를 그들 사고의 전개과정을 문제사적으로 따라가며 살펴보려고 한다. 비록 동서와 400여년의 시공의 차이가 있지만 두 사상가의 생애 전개와 맞물려서 진행되는 사상의 전개를 따라가 보면, 거기에는 쓰인 개념이나 용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깊은 유사성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그 유사성이란 인간과 세계의 의미와 가능성에 대한 매번의 세찬 반박과 해체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것을 재건하려는 시도이며, 그 시도에 있어서 궁극까지, 아니면 근저에까지 다가가서 온전히 이루어보려는 ‘성실성’(誠)이었고, 그래서 거기서 그 성실성의 한 표현으로서 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세대의 교육은 참으로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 되고 ‘세계사랑’(Amour Mundi)의 표현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유사하게 얻어진 두 사상가의 세계의미실현 방안들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의미 있고 타당한 것을 본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양명과 아렌트가 고민했듯이 세계를 따뜻한 마음으로 끌어안는 사람은 드물고, 오직 사적 욕망과 오도된 무제한의 신념만이 난무하여 우리 삶의 공적 기반이 한 없이 위협받고 있으며, ‘생각 없음’과 ‘사고하지 않음’이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심지어는 배움의 현장에까지 만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는 행위 할 수 있는 인간의 출현은 기대하기 힘들고, 교육은 단지 사적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며 세계는 다시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 위협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시대야말로 더욱 절실하게 인간가능성과 그 정신적인 힘에 대한 심도 깊은 탐구가 요청된다고 하겠는데, 양명과 아렌트의 사상은 이 일을 위해서 좋은 길잡이가 된다.

이것과 더불어 본 글의 또 하나의 의도는 어떻게 우리 고유의 전통언어들이 오늘날의 현대 언어로 재해석되고 다시 번역될 수 있겠는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양명의 언어였던 유교언어는 우리 민족의 언어와 사고 형성에 가장 두드러진 영향을 끼친 것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언어가 매우 생소하게 되어서, 예를 들어 조선시대 내내 우리 선인들의 최대의 학문적 관심거리였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이 오늘날은 종종 그들만의 지적 놀음이었던 것으로 치부되어 외면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아렌트의 인간 정신적 삶에 대한 탐구와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준 칸트의 이성비판들을 살펴보면 이들이 인간 행위와 판단의 합당한 근거를 찾기 위해 인간의 ‘감각’(sense)과 ‘감정’(feelings), ‘오성’(intellect)과 ‘이성’(reason) 등의 관계를 탐구했고, 어떻게 인간의 정신적 삶이 활동적 삶과 관계되는지를 탐구한 노력들과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 도덕적 능력(性 또는 理)의 시작(四端, four beginnings)을 ‘이성’(理)으로 봐야 할런지, 아니면 그 이성적 판단력도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 마음의 ‘감정’(七情, 氣)이나 ‘감각’(taste도 그 중의 하나)에서 싹트는 것으로 보아야 할는지 등을 놓고 씨름한 것이다.

동서의 이 모든 노력들은 모두가 어떻게 하면 세계를 이해할 줄 알고, 사랑하며, 한 몸을 이룰 줄 아는 인간 정신을 키울 수 있는가 하는 노력이었다. 그 일에 있어서 우리 선인들이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서 세계의 어느 그룹들보다도 치열하였다는 것을 본 논문은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싶다.

양명과 아렌트 모두 그들 사상 전개에서 네 단계의 문제 사적 전개과정을 보이고, 그 때마다 대표되는 저서 또는 공리가 있었지만, 본 글에서는 크게 두 단계, 즉 ‘활동적 삶’(行/의지)과 ‘정신적 삶’(知/판단력)의 탐구 단계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교육적 귀결과 거기서의 그들의 여러 대안적 제안들과 한계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는 바로 교육에서의 전체주의 위협이다. 아렌트도 지적했듯이, 교육은 특히 인간의 ‘자연’(nature)과 관계하는 일이므로, 이 인간의 자연을 조작하려는 교육에서의 전체주의는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결과의 재앙이 될 수 있다.

이은선 명예교수(한국 信연구소, 세종대)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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