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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세 가지로 제 몸을 살피다(日三省)

기사승인 2019.06.18  18: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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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석 강의』 2강 풀이

본문 중 <ㆍ> 표시는 옛한글의 아래아 표기임을 알려드립니다. 현재 인터넷 상에서 아래아 표기를 할 수 없는 관계로 이렇게 표기되었음을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본 글은 多夕일지 1956년 10월 26일자에 실린 논어의 세 글귀, 日三省(일삼성), 須三知(수삼지), 亦三果(역삼과)에 대한 다석 식(式)의 풀이이다. 자신을 날마다 세 번 살피고, 사람 노릇하기 위해 알아야 하며,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편안함이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증자(曾子) 어록의 기독교적 해석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라 함은 제도적 종교를 넘어 귀일(歸一)의 종교를 일컫는 것이겠다.

먼저 하루 세 번 살필 일을 일컬어 증자는 충(忠), 신(信), 습(習)이라 하였다. 이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말씀으로서 많은 이들이 이를 토대로 자신을 성찰하며 삶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다석은 日三省에 대한 종래의 해석을 비판하며 좀 더 깊게 본뜻을 헤아렸다.

< 1 >

종종 충(忠)이 상급자에 대한 헌신의 표현이라 여겨졌고 한자어로 가운데 마음(中과 心의 합성어)으로 풀어졌으나 다석은 이를 순수 우리말로 ‘마음 곧이’라 하였다. 우리들 마음속의 곧고 곧은 것을 일컫는 말이 바로 충이다. 마음에 불순함이 섞이면 그것을 충이라 할 수 없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비교될 수 있겠다. 신유학에서 말하는 주일무적(主一無適)역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신(信) 역시 그것이 하느님과 관계하는 말일 경우 더 깊은 뜻을 담았다.

▲ ‘맨발의 성자’ 로 알려진 이현필 선생이 활동한 광주 동광원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다석 유영모 선생 ⓒ다석학회

인간사에서 요구되는 신용과 信간에는 질적 차이가 있다. 다석은 信을 밀다(推)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위에 계신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밀어 올린다는 뜻을 지녔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을 밀고 밀어서 그것이 툭 터질 때 비로소 믿(信)이 생길 수 있다.

습(習)이란 반복하여 익히는 것을 뜻한다. 지속적으로 이어져 종국에 승리하는 지경이라 한다. 날개 우(羽)밑에 스스로 자(自)를 더한 것이 습(習)인바, 두 날개로 나는 법을 끊기 있게 배우는 새의 모습을 상상하면 좋을 것이다.

충, 곧 ‘마음 곧이’와 생각을 밀어 터지게 하려면 중단은 금물이다. 그렇기에 증자가 말한 ‘일삼성오신’(日三省吾身)은 단지 자기 몸(신체)만을 살피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몸 속 정신을 살피는 일이겠다. 거죽만 성하고 사람속이는 일이 잦은 오늘 현실에서 ‘자기 몸을 하루 세 번 살핀다’는 말의 의미가 참으로 중(重)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사람은 꾀를 내고 술수를 부리며 하루를 산다.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 일상에서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럴수록 사람들과 대면하며 부닥끼는 일상 현실에서 곧고 곧은 믿음이 지속적으로 유지, 존속할 수 있을까를 물어야 옳다.

일상 속의 생각이 충(忠)되기 위하여 자기 지식(생각)을 밀어 올리는 일을 지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삼성은 자신의 외관을 살피는 일이 아니라 순간 변하는 자기 마음을 살피는 일이란 것이 다석의 생각이다. 매사를 곧은 마음으로 행했는지, 사람과 관계맺음에 있어 자기 편견을 떨쳐버렸는지, 예부터 전해온 학문을 배우고 익혀 삶으로 살고 있는 지를 지속적으로 살피란 것이다. 다석에게 기도란 바로 ‘충신습’의 상태에서 비롯하는 말이어야만 했다. 구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살피는 일을 바로 기도의 본뜻이라 여긴 것이다.

< 2 >

이어서 『논어』 끝 부분에 나오는 ‘수삼지’(須三知)에 대한 풀이가 지속된다. 인간이라면 꼭 배울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자기 목숨(생명)이 어디서 비롯했는가를 알고 자신의 명(命)이 무엇인지를 알며 마지막으로 하느님을 알라고 했다.

이것을 모른다는 것을 숨쉴 자격조차 없는 삶으로 여겼다. 목구멍으로 숨 술지 아는 자라면 하늘의 명령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하는데, 이를 모르면 군자(君子), 다석의 말로 ‘그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독생자가 바로 ‘그이’이다. ‘그이’가 되는 것이 우리들 존재이유이고 사는 목적이다. ‘그이’가 되기 위해 인생을 산다 해도 틀리지 않다. 공자와 증자도 바로 ‘그이’가 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본인이 ‘그이’가 되려면 남도 ‘그이’가 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뿐 아니라 유교, 불교에서도 ‘그이’는 있는 법이다. 천명(天命), 곧 자기 종교 나름의 도를 깨쳐 사는 이를 ‘그이’라 하는 탓이다. 모름지기 ‘천명’을 지녀야 ‘그이’가 될 수 있다. 다석은 이 말을 묵시록의 언어보다 무섭고 두렵다고 했다. 명(命)도 모르고 하늘, 하느님도 모르는 인간이 욕망을 좆아 숨을 쉰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 지를 각성시켰다.

다음으로 예(禮)를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없이는 사람이 도무지 설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제도가 바로 예에 해당될 것이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인류를 이어온 끈이라 해도 좋겠다.

하지만 목하 세계는 예를 잃었다. 제도가 있어도 그를 지키려 들지 않는다. 삶에는 순서가 있고 그 차례를 옳게 지키게 하는 것이 제도의 역할이다. 다석은 제도의 제(制)를 물가 수(洙)의 변형이라 보았다. ‘制’란 나무(木)가 흩어지지 않도록 가로질러 묵어 놓은 형상이다. 그 옆에 두 개의 큰 칼이 버티고 서있다. 물 흐르는 곳에서 나무 묶인 것을 지켜낼 목적에서이다. 이 법(제도)을 지켜야 옳게 설 수 있다.

하지만 제도가 법이 되어 예수 당시 율법처럼 사람을 억압할 시, 오늘 우리가 경험하듯 법 자체가 타락하여 기득권자를 편들 경우, 옛사람들은 혁명을 이야기 했다. 예수가 성전을 허물은 것도 그리고 타락한 제도를 몰락시킨 촛불도 혁명이라 불릴 수 있겠다.

이처럼 명(命)을 알아야 ‘그이’가 되고 예를 알아야 설(立)수 있다. 이에 더해 마지막 하나는 사람을 알기 위해 배우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배워서 말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을 통해 사람을 알게 되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인간 삶이다. 하지만 인간은 하느님 말(씀)을 알아야 사람노릇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단지 전통적 神을 뜻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의 모든 자연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느님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세상과 분리될 수 없는 까닭이다. 예수, 부처, 공자의 말씀도 종단에서는 이런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하느님을 세상과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느님 말씀이다. 과거에는 알기위해 먼저 믿을 것을 요구했으나 근자에는 믿고자 하면 먼저 알라고 했으니 다석의 말이 이에 적합하다. 결국 ‘그이’가 되는 것은 말씀을 알자는 것이고 사람노릇 하겠다는 것인 바, 여기서의 지(知)는 앞선 忠. 信. 習과 뜻에 있어 조금도 다르지 않다.

< 3 >

이제 마지막으로 『논어』 학이(學而)편 첫머리에 나오는 亦三果, 세 개의 열매로 인해 기쁘다는 뜻을 논할 차례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悅乎)란 말을 접할 수 있다. 이는 첫 번째 기쁨을 일컫는다. 배움, 곧 학(學)이 주는 즐거움이다. ‘學’ 자는 캄캄한 곳에서 나와 양손을 놀려 무엇을 따라 배운다는 뜻을 지닌 상형문자이다.

기왕지사 세상에 나왔으니 배워 알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배움을 즐기는 이를 학생이라 한다. 자꾸 배워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 이는 배워 익히는(習)일과도 무관할 수 없다.

여기서 다석은 우리 같은 학자들, 더욱이 신학자들에게 뼈아픈 말을 던졌다. “신학자라면 배운 것을 거듭 익혀야 하거늘 버릇없이 감투를 좆아 산다”고 말이다. 자신의 삶이 곧 자기의 메시지가 될 수 있도록 살아야 함에도 말이다. 그렇기에 말 많고 유혹 많은 현실에서 배우고 익혀 제 본분을 찾는 일이 가장 기쁜 것이다. 영혼을 찾고 그것을 익히는 기쁨, 새롭게 배워 그것을 일상에 적용시키는 기쁨 그리고 앎을 삶 되게 하는 것의 기쁨을 만끽하며 살라했다.

다음으로 친구가 있어 먼 곳으로부터 자신을 찾는 일을 기쁘다 했다.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가 그 말이다. 여기서 다석은 친구를 이웃종교들로 이해했다. 기독교나 불교, 유교가 가는 길은 달라도 서로 만날 수밖에 없는 친구란 것이다. 결국 같은 진리를 말하기에 동이 서에서 멀 듯 멀었으나 함께 만나보니 한없이 기쁘다고 풀었다. 먼 곳에 머물면서도 서로를 알아주는 친구(종교)가 있으니 세상 살맛이 절로 나는 것이다.

마지막 기쁨은 설령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노하지 않고 묵묵하게 감내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적시한다.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君子乎)가 그 뜻이다. 범부들인 우리들이 쉽게 이를 수 없는 경지이다. 페북에 글 올리며 ‘좋아요’ 회수 많은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우리들 아니던가?

이런 정신을 키운 사람을 일컬어 군자 곧 앞서 말한 ‘그이’라 할 것이다. 세상 속에서 세상 밖을 사는 존재라 달리 칭할 수도 있겠다. 이것이 좁은 길인 바, 예수와 공자 등이 걸어갔던 길일 것이다.

다석은 이런 삶을 일컬어 안심(安心)이라 했다. ‘그이’ 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걱정 없이 떠날 수 있는 까닭이다. 이렇듯 다석은 亦三果를 悅과 樂과 安으로 풀면서 이들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역설하였다.

< 4 >

끝으로 다석은 상술한 내용과 일치되는 순 우리 말 시조 한수를 읊었다. “나남직ᄒᆞᆫ 이승”이란 시 풀이다. 일단 그의 시조를 그대로 옮겨본다.

“몸성히 남주기로 ᄆᆞᆷ히 챔말기로, 바탈조히 늘사리는 죽기너메 맑기까지, 늘사리 한늘사리란 한월살림 나남직”

본래 앞선 글보다 이틀 먼저 多夕일지(1956, 10. 24)에 쓰여 있다. 다석은 이 세상을 한 번 나옴직한 세상이라 긍정적으로 여겼다. 태어나도 좋을 세상이 이승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몸이 성하면 다른 것은 크게 탐하며 살지 않기를 바랐다. 성한 몸으로 남 도우며 사는 것을 이생의 과제로 여기라 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비울(맘히) 때만 가능할 수 있겠다.

마음이 비워질 때 비로소 앞서 말한 忠·信·習, 즉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다석은 ’챔말기로‘라 했다. 이를 위해서 우리들 인간은 자신의 바탈(받할)을 붙들고 살 수밖에 없다. 죽음 너머의 삶이 있는 바, 그것은 바탈에 의지하여 자기 것을 다 주고 떠날 때 그곳이 우리 몫일 수 있다.

다석에 따르면 ‘죽기’는 ‘주기’에서 왔다한다. 줄 것을 다 주고 죽어야 죽음 너머의 세계와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승을 넘어선 저승에서 더욱 맑아진다고도 했다. 비워진 마음(챔말기)에서부터 더 맑은 세계, 저승의 현존을 설(說)한 것이다.

결국 우리들 생명은 ‘한월 성령’이라 할 것이다. 하늘과 연결된 살림살이란 뜻이다. 한번 나서 살만한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여기고 남과 더불어, 마음 비워 남을 품고 도와주면서 사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를 다시한번 깨우쳐 주었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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