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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가벼이 여기게 된 세상”

기사승인 2019.06.11  0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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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75

“백성의 굶주림은 위에서 받아먹은 세금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의 굶주림은 착취하여 받아먹은 세금이 많기 때문이다.> 이럼으로써 굶는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위에서 인위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럼으로써 다스리기 어렵다. 백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위에서 목숨을 부지하려고 결탁했기(두터이 했기) 때문이다. 이럼으로써 목숨을 가벼이 여긴다. 대저 오로지 삶으로써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려는 자는 이로써 삶을 어질고 귀하게 여긴다.”
- 노자, 『도덕경』, 75장
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人之饑, 以其取食稅之多)  是以饑, 民(百姓)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民之輕死, 以其<上>求生之厚, 是以輕死,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

위에서 세금을 많이 걷으니 백성이 가난하게 되고, 백성이 더 이상 세금을 낼 수 없으니 위정자도 굶게 된다. 위에서 가혹한 법을 만드니 백성이 법을 따르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전통적인 세법은 농민의 노력을 빌어 公田을 경작하는 데에 그쳤던 것인데, 노나라 선공 때, 농민의 私田에까지 세금을 부과하게 되었다. 왕과 자신의 사직을 위해 백성에게 그 부담을 지운 것이다. 노자는 인위적으로 다스리지 않는 것이 삶을 소중히 여기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 고대 중국의 세금을 징수하는 장면 ⓒGetty Image

“전국시대에 특히 말기에는 백성의 생활이 전체적으로 매우 궁핍했다. 소농민으로서 일정한 곡물을 생산하지 못하면 ‘게을러 가난한 자’라고 하여 그 일가를 관노비로 삼거나, 그 사람의 얼굴에 먹을 쳐서 관노비로 삼았다. 그들이 소농민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대가는 과중하였다. 농민이 잉여생산의 거의 모두를 수탈당하는 궁박한 처지를 벗어나는 길은 전쟁을 통해 작은 벼슬이라도 얻는 것이었다. 농민에 대해 부역과 세금을 걷는 수준은 비단 지배층이 보다 많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짜낸 방책에 그치기보다, 강병을 양성하기 위한 의도된 계산이기도 했다.”
- 이성규, “전국시대 국가와 소농민 생활”

백구가 제나라에 이르러 시장 네거리에서 사형을 당한 사람을 보았다.
백구는 그 사형수를 밀어서 눕혀놓고
자기가 입은 예복을 벗어 덮어 주고는 하늘을 향해 통곡을 했다.
“그대여, 그대여, 천하게 큰 재앙이 있으니
그대 홀로 먼저 이 재앙을 만났구려.
도둑질을 하지 않았는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가?
정치를 하는 사람이 영화로움과 욕됨을 세우고 나니,
백성들이 병들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재물을 쌓아놓고 나니,
백성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게 된다.
지금, 영화로움과 욕됨을 세우고, 또 재물을 모아놓고는,
사람의 몸을 가난하고 고달프게 만들어 쉴 때가 없도록 하는구나.
이렇게 사형당한 사람과 같이 목숨을 잃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고자 해도, 되기나 할 것인가!
옛 임금은 얻는 것(得)은 백성에게 두었으며,
잃는 것(失)은 자기에게 두었다.
바른 것(正)은 백성에게 두었으며,
잘못된 것(枉)은 자기에게 두었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형벌을 받아 모습을 잃으면,
물러서 스스로 자신에게 책임을 물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물건을 감추어놓고는 찾지 못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고,
크게 어려운 일을 시키고는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을 죄를 준다.
무거운 책임을 맡기고는 그 일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을 벌을 주고,
길이 먼데도 이르지 못하면 죽인다.
백성들이 자신의 지혜와 힘이 다하면 거짓으로 명령을 따르게 되니,
날이 갈수록 거짓이 많아진다.
선비와 백성이 어찌 거짓을 취하지 않을 수 있으랴!
무릇 힘이 부족하면 거짓을 하게 되고,
지혜가 부족하면 남을 속이게 되고,
재물이 부족하면 훔치게 된다.
도둑질을 한 행위에 대해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옳겠는가?”
- 장자, 『잡편』, “즉양편”

소위 통치자들이나 위정자들의 모든 언행은 자기 자신이나 정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행동하든지 인민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 노자는 인민을 위하지 않는 정치는 자기를 위한 것이고, 그것은 자연의 길을 따르지 않는 인위적인 것이다.

현실적인 역사와 정치에서 인민은 통치자의 선동에 미혹되어 전혀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한다. 현혹된 인민이나 자기만을 위한 통치자는 모두 삶을 귀하고 어질게 여기지 않고, 목숨을 가볍게 여기게 된다. 빌라도와 대제사장들, 그리고 그들에게 선동된 인민이 그렇다.

빌라도의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은 대제사장들에 의해서 선동된 무리들이 외치는 소리이다.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무리의 함성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봉기로 정치적 능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빌라도에게 또다시 위협적인 것이 되었다. 빌라도의 재판은 선동에 의한 여론재판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무리들은 대제사장들에게 선동되어 예수님의 죽임 당함에 일조하였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에게 선동된 무리의 요구에 따라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였습니다. 대의 지배계급인 산헤드린(대제사장들, 장로들, 율법학자들)은 사사건건 자신들의 권위와 신분을 위협하는 예수님을 죽여야만 했고, 빌라도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도록 했습니다. 바라바 예수나 그리스도 예수에서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해방자(구세주)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러한 바라바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했습니다. 식민지 상황에서 이중 삼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죽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에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환호하던 사람들이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라왔던 무리이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공감하기 시작했던 무리든, 예수님을 따르다가도 현실적 위기에 몰려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바로 그것이 당시 민중의 모습이고, 오늘날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바라바 예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피조물’처럼 해방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해방자가 되신 예수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는 거룩한 하느님의 영’처럼 우리와 함께 해방의 길을 열고자 애쓰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하는 마음과 섬기는 몸이 이 세상의 어떠한 유혹이나 선동에도 변하지 않기를 빕니다.
예수님을 환호하는 소리이든 처형하라는 소리이든, 그 소리는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의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예수님의 뜻이라면 끝까지 따르겠다는 믿음 위에 서기를 빕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분별하여 깨닫고, 그 뜻을 위해서 함께 하는 무리 공동체가 되기를 빕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선동당한 무리들이 외치는 소리”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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