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을들의 희망 판타지

기사승인 2019.06.01  18:55:48

공유
default_news_ad1

- 의미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1. 봉테일: 의미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개봉 첫날 조조라, 관람객이 얼마 없을 줄 알았는데, 예약하지 않고 가서, 앞에서 3번째 줄에 앉아 영화를 올려다보았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계단 시네마’라고 하더니, 올려다 본 영화는 역시나 ‘높이’에 대한 고민이었다. <설국열차>(2013)가 수평적인 차별이라면, <기생충>(2019)은 수직적인 차별이었다. 거기에 ‘냄새라는 아비투스’를 사용하여, 전작들보다 좀 더 상징이 풍성해졌음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랐기에, 전작들에 나타나는,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따뜻함 대신, 차가운 현실주의자의 냉소적인 시선이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갈수록 양극화 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로 읽게 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아무튼 올려다 본, 봉준호의 영화는, 주제는 단순하지만 여전히 현실을 꼬집는 디테일이 살아 있음에 감탄했고, 한국의 관객들도 ‘봉테일’이라 불리는 이 디테일(혹은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4년 3개월 17일째’와 ‘세월호 폭식투쟁’)을 찾기 쉽지 않을 텐데, 72회를 맞이하는 칸 국제영화제가 그것을 찾아서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을 주었다면, 심사위원들의 안목이 대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최근 현대사를 알고 있었단 뜻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장르 혼합(코미디-스릴러-애로-공포-판타지)’이라는 형식과 자본주의의 이면을 풍자한 완성도 높은 블랙코미디로만 만족했다면, 칸의 안목은 이제 한물 간 것이리라. 물론 작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2018)의 연장선상에서, 올해도 가족의 의미를 물었다면, 시대의 흐름이라 변명할 수 는 있을 것이다. 다만 히로카즈 감독의 진가는 가족을 뛰어넘어 ‘유대’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면, 봉준호는 을들의 ‘유대’를 묻고 있다.

이 글은 스포일러가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수직적, 수평적 상징에 대한 약간의 생각할 거리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를 봐도 봉준호식 디테일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아니, 봉 감독의 말대로, “영화가 사회적 도구가 되는 건 싫다. 영화는 영화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보면 좋겠다.”라는 말로 봉테일을 부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봉 감독의 그 말에도 봉테일이 숨겨져 있다. 아무튼 이 영화를 본 이후에도 ‘자유로운 한국의 황 전도사님’을 믿는다면, 봉준호 감독이 이제 다음 영화로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절망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영화는 시퀀스(sequence)가 변할 때 마다, ‘시의적절한’ 상징을 넣어주고, 공간의 변화(반지하와 높은 곳 박사장 댁, 1층, 2층, 지하, 거실, 산, 다시 반지하)를 통해 친절하게 희화화된 대한민국의 현실을 꼬집는데, 각 씬(scene)마다 봉준호의 디테일은 기막히게 살아 있다. 악마가 아니라, 의미가 디테일에 숨어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본 봉테일을 나열해 보면, ‘청년실업-빈부격차-갑질-한반도 비핵화와 세계 평화-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을들끼리의 싸움-노숙인-묻지마 흉기 난동, 그리고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다송이의 생일잔치(이것은 폭우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잔치를 벌이는 박 사장네를 통해,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폭식투쟁을 벌였던 이들을 떠올릴 수 있다)’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영화는 4년 3개월간 ‘박’사장이 지배했던 한국 사회를 축약해서 보여준 것이다.

2. 비와 굴, 그리고 ‘냄새’의 아비투스

봉준호 감독의 로즈버드(rosebud, 영화의 핵심 사물)는 단순하다. ‘비’와 ‘(동)굴’이 꼭 나온다. <살인의 추억>(2003)에서 <괴물>(2006), <마더>(2009)에 이르기까지! 비와 굴, 곧 ‘비굴한 한국인의 초상’을 봉준호 감독만큼 잘 드러내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설국열차>와 <옥자>(2017)를 통해서는 한국인의 비굴함이 ‘세계인의 비굴함’으로 확장되었고, 이제 ‘보편적 비굴함’의 한계에서, 다시 <기생충>(2019)으로 새로운 로즈버드를 추가한다. 그것은 곧, ‘냄새의 아비투스’이다.

퇴근길 만원 버스 안이나, 심야의 지하철 안에서는 온갖 냄새가 다 난다. 견디기 힘든 우리네 아버지들의 노동에 찌든 땀 냄새와 하루하루 버텨나가는 사람들의 술 취한 입 냄새, 경쟁에 짓눌린 학생들의 욕구불만의 냄새 등. 수도권에서만 매일, 수도권 전체의 1/4이 넘는 평균 719만 명이 지하철을 포함,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냄새를 맡을 기회가 없다. 동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행기만 해도 퍼스트와 이코노미로 나뉜다. 가정교사(운전기사, 가사도우미-필자 첨가) 등 이 영화에 나오는 상황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이다.”

<기생충>은 냄새의 아비투스를 보여준다. 박 사장(이선균 분)과 그의 부인 연교(조여정 분)는 기사인 기택(송강호 분)과 기택의 가족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는다. 박 사장의 말대로, “노인 냄새도 아니고, 오래된 무말랭이?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말이야.” 그런데 이 냄새가 선을 넘는다. “김 기사가 선을 넘을 듯 말듯하며 선을 안 넘어. 그런데 냄새가 선을 넘어!”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곧 대다수 한국인들의 냄새인 그 냄새에 박 사장 부부는 불쾌감을 느끼고, 멸시한다. 박 사장처럼 기사 딸린 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극소수이다. 따라서 텁텁한 막걸리 냄새가 좋고, 다른 사람들의 이빨에 낀 고춧가루가 보기 좋은 세상은 매너 좋고, 이성을 통해 합리적 의심을 하는 사람이자, 총수인 박 사장의 영역으로 선을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향체계, 곧 아비투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 기우(최우식 분)로 부터 딸 기정(박소담 분), 아버지 기택과 어머니 충숙(장혜진 분)까지 갑인 박 사장 댁에 계획적으로 기생한다.

아비투스(Habitus)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만든 개념이다. ‘일정하게 구조화된 개인의 성향체계’를 뜻한다. 곧, 개인 안에 내면화된 사회구조라고 할 수 있다.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새물결, 2005)에서 부르디외는 자본을 네 가지로 소개한다.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사회관계 자본)이 바로 그것이다.

<부르디외와 그의 책 『구별짓기』>

여기서 문화자본은 가정환경이나 가정교육을 통해 개인에게 내면화된 고급스런 취향 및 언어능력, 인지능력이다. 학위나 학벌이 여기에 해당이 된다. 곧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한다. 또한 사회자본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을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과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상징자본, 곧 사회관계자본은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을 말한다. 곧, 서울대 출신이나 판사, 검사, 의사처럼 실제 가치보다 높이 평가되고 과도하게 명예, 위신을 누리게 해 주는 상징적인 힘(정당화 메커니즘)을 뜻한다.

아무튼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과 유사하게 부르디외는 사회적 관계를 단순히 경제적 자본논리로만 설명하지 않고(물론, 경제자본이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힘이 있긴 하지만),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이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가 경제자본으로인 돈만으로 위 세 가지 자본을 저절로 확보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위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이 된다).

비록 경제적 자본은 상류사회와 비교해볼 때 결코 뒤지지 않지만, 신흥부자들은 상류사회가 가지는 아비투스, 특히 미적 취향을 공유할 수 없었다(물론, 그들은 겉으로는 상류계급의 미적취향을 끊임없이 흉내 내려고 노력했지만). 따라서 부르디외는 미적 취향이 그에 ‘걸맞은 실천이나 상품으로 인도한다’고 본다. 곧,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운동이나 행동 그리고 상품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영화에서는 빛이 잘 들어오는 거실을 소유한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 고가의 외제 승용차를 타면서, 혹은 비싼 명품 핸드백을 구입하며 상류계급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류계급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분명히 입증하려는 것이다. 박 사장이 끊임없이 ‘선을 넘지 마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아비투스의 강화이다. 그러나 냄새는 선을 넘는다. 그것이 수평적 차별이든, 수직적 불평등이든!

3. 『수직사회』와 영화 <하이-라이즈>

▲ 스티븐 그레이엄의 『수직사회』와 영화 <하이-라이즈>

수평적 불평등을 <설국열차>에서 잘 구현한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에서는 반지하와 지하가 있는 2층 단독주택을 통해 수직적 불평등을 묘사하고 있다. 영국 뉴캐슬 대학 도시와 사회 전공 교수이자, 도시설계자인 스티븐 그레이엄은 『수직사회』 (책세상, 2019)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업 마천루들은 대기업의 ‘수직’ 위계구조를 물리적으로 구현하게끔 용의주도하게 설계되었다.”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마르코 데라모도 “빌딩의 높이는 회사 매출액의 구체적인 은유”라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대한민국 땅에 고층 아파트와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반지하로, 지하로 내려간다. 빛이 비출 때 바퀴벌레가 어둠 속으로 도망가듯이, 폭우가 내릴 때, 계단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물에 잠긴 반지하로 가는 기택의 가족처럼!

언어학적으로 ‘낮음’은 부정직함, 무력함, 저속함, 부도덕을 암시한다. 따라서 상층과 하층으로 계급을 지칭한다. 『수직사회』 1부는 ‘위’를 논하며, 인공위성, 폭격기(위에서 떨어지는 죽음), 드론(로봇의 제국), 헬리콥터(직통 도달의 꿈), 파벨라(Favela, 빈민가), 엘리베이터(수직상승), 마천루(허영과 폭력), 고층주택(호화로운 하늘), 스카이워크·스카이트레인·스카이데크(다층도시), 공기(죽음의 돔)을 다룬다.

2부는 ‘아래’를 말하기 위해 땅(지질을 형성하는 도시), 지하실(도시의 땅 밑), 하수도(사회학과 똥), 벙커와 땅굴(지하의 피신처), 광산(지하 변경의 채굴 제국주의) 등을 다룬다. 높고 낮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사회의 다른 부분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수직성을 중심으로 현대 도시를 고찰하며, 도시의 지리적 특성이 어떻게 새로운 격차를 만들고, 사회를 극단적으로 양분하며 마침내 21세기형 계급화를 완수하는지를 신랄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레이엄은 현대 도시의 실제 모습을 삼차원적 시각으로 재현하며, 입체적 구조에서 완수되는 위계의 실태를 전달하고, 수직적 계층화를 조장하는 초부유층과 거대기업의 횡포를 고발한 것이다. 이러한 『수직사회』의 상징은 <기생충>의 반지하와 박 사장네 1,2층과 지하로 펼쳐진다.

놀라지 말라. 테러리스트로 불리는 오사마 빈 라덴의 전공은 토목공학이다. 2001년 911테러로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질 때, 그는 갈채를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테러가 겨냥한 건축물이 수직으로 솟아오른 것은, 전능한 이슬람의 신이 지상의 인류를 천상에서 지배한다는 그의 근본주의적 우주지리 개념을 모독하는 예이다.” 하늘로 치솟은 바벨탑이 야훼의 테러 목표가 되었듯이, 고층건물이 갖는 상징성이 테러의 목표물이 되었던 것이다.

<기생충>의 상징과도 비슷하게 벤 휘틀리 감독의 영화 <하이-라이즈>(2015)는 초고층 아파트의 이야기이다. ‘하이-라이즈’는 1975년 런던에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 로열이 설계한 40층 타워이다. 슈퍼마켓부터 은행, 수영장, 초등학교까지 편의시설이 다 완비된 하나의 도시와 같은 공간이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사는 층수에 따라 입주자의 계급이 나누어진다. 상층부의 ‘내려다보는 자’와 하층부의 ‘올라가고자 하는 자’ 사이의 계층 대립을 수직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출구 없는 욕망이 폭발하고, 마침내 영화는 이 두 계급의 대결로 종말로 치닷는다. 이성이 사라진 이 아파트에 정상인은 없고, 모두가 미쳤던 것이다.

4. 수평 폭력

영화에 나타나는 기택네와 가정부(이정은 분)부부의 싸움은 수직 폭력과 달리 수평적 폭력을 고민하게 한다. 왜 을들은 서로 싸울까?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정신과 의사 프란츠 파농은 가난하고 힘없는 군중들이 왜 동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지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연구하고 이렇게 말한다.

“굶주림, 집값을 못내 집 주인에게 내 쫓김, 어머니의 말라붙은 젖가슴, 해골이 앙상한 아이들, 폐쇄된 작업장, 심장 곁을 까마귀 떼처럼 따라다니는 실업자들, 이 속에서 원주민은 매일 살인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몇 파운드의 밀가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파농과 그의 책, 『검은피부 하얀가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랑스 국적이지만 알제리에 정착한 파농은 알제리에서 일어난 수많은 폭력 사건을 분석한다. 가령, 하루 14시간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천막에 돌아온 사람이 옆 천막에서 아기가 시끄럽게 운다는 이유로 그 천막에 들어가 아기를 흉기로 찔러 죽였다. 외상을 주기를 거부하는 상점 주인을 야밤에 찾아가 찔러 죽인 사람도 있다. 당시 알제리를 지배했던 프랑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선천적으로 저열하고 폭력적이며, 이유 없이 살인하고 범죄 성향이 강하다. 깜둥이들은 원래 폭력적이야.”

그러나 의사였던 파농은 1954~1956년 자신이 치료한 환자들의 진료기록을 바탕으로 이렇게 분석한다. “알제리 국민들이 폭력적인(수평폭력) 이유는 바로 프랑스인들이 가하는 수직폭력 때문이다.” 따라서 파농은 폭력을 수평폭력과 수직폭력, 두 가지로 구분한다. 같은 위치, 곧 을들끼리 행하는 폭력이 수평폭력이고, 갑이 을에게 행사하는 폭력이 수직폭력이다. 지배계급이 피지배 계급에게 행하는 폭력이다. 따라서 파농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수직폭력으로부터 피해를 크게 입을수록, 수평폭력의 유혹에 빠진다. 자신을 곤궁한 처지로 몰아넣은 것은 지배계급이지만, 정작 그 일을 당한 민중들은 자기보다 못하거나 약한 사람을 죽이고 두들겨 패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한과 고통을 푸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파농은 유럽의 백인들을 향해 ‘폭력 항쟁’의 기치를 드높인다. 수평폭력의 원인인 제국주의의 수직폭력을 제거해야 수평폭력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기택이, 냄새 때문에 가정부의 남편 시신에서 고개를 돌린 박 사장을 칼로 찔러 죽였듯이, 이제 을들은 을들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수직폭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인가? 갑을 향하여 일어나야한다는 것일까?

5. 을들의 희망 판타지

<기택의 가족, 을들의 판타지>

부르디외는 “계급에 따라 특징적 성향체계인 아비투스가 결정된다.”고 말한다. 곧, 개인의 취향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후천적으로 습득된다는 것이다. 삶의 궤적 전체를 결정하는 취향이 개인이 처한 배경(영화에서는 ‘위’와 ‘아래’)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고, 그 배경을 결정하는 배후는 천민자본이 있다는 것이다. 곧, 자본이 인간을 계급화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삶이 각박한데도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발생하지 않는 것인가? 부르디외는 그 이유를 하루하루 살기도 힘들다면, 폭동은 가능해도 혁명은 일어날 수 없다고 분석한다. 현재의 생존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말인가! 기택의 ‘무계획이 계획’인 것이다. 폭동은 주어진 삶의 조건에 대한 단발마적 감정 폭발에 지나지 않지만, 혁명은 주어진 삶의 조건에 대한 냉정한 진단과 그것을 바꾸겠다는 청사진이 없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아들 기우의 판타지로 ‘비’ 대신 ‘눈’을 보여주며 희망을 말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영화의 시작과 똑같은 반지하에 잠시 들어오는 ‘햇빛에 말려놓은 양말들’이다. 그래서 반지하 앞에서 오줌을 누는 술주정뱅이에게 기우의 친구인 민혁(박서준 분)은 이렇게 말한다. “정신차렷!”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흔히 말하는 대로 미래가 없는 사람에게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가능성, 나아가 집단적으로도 새로운 미래의 출현을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알제리의 하층 프롤레타리아와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적으로 구별하는 원리, 그리고 ‘토지를 상실하고 절망에 빠진 대중들이 가진 반란의 성향’과 다른 한편 ‘미래의 주인이 되기 위해 자기의 현재를 충분히 통제하는 조직된 노동자들이 가진 혁명의 성향’ 사이를 구별하는 원리는, 물질적 존재 조건 속에 객관적으로 새겨진 미래와의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따라서 기우의 희망은 판타지에 불과한 것이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지하에 갇혀 판타지만 꿈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950년대 알제리의 수평폭력이 2019년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봉준호 영화의 디테일은 이렇게 말한다. 갑이 갑질 하지 않도록, 을들이 제대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날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날 때 가능할 것이다.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실 메시야가 임하실 때 가능할 것이다. 그때 봉준호 감독은 이제 더 이상 디테일이 아닌, 영상 이미지로 승부하는 감독이 될 것이다. 성서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 판타지를 이렇게 기록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이사야 11:1-10)

 

<봉준호 감독과 배우 송강호>

* 덧붙이는 말

언젠가 “영화감독에게 상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격려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영화를 만들면서, 같은 동네에 살면서 서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2018)으로 작년에, 올해에는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칸의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시대적 고민이 칸에서 묻어난다. 가족을 통해 한국영화의 비굴한 자화상을 그려낸 봉준호 감독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이제 칸에서 인정받았다. 봉테일이 틀리지 않았음을 이제 한국 정치와 국민이 답해야 할 차례이다. 그때 을들의 희망 판타지는 현실이 될 것이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