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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들어가는 천국

기사승인 2019.05.30  1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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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묵상하며

얼마 후에 요한을 따르는 이들이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으로 몸과 영혼을 엄격히 훈련하는데, 선생님을 따르는 이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즐거운 결혼식 중에는 빵과 포도주를 아끼지 않고 실컷 먹는다. 나중에 허리띠를 졸라맬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겨운 축하의 모닥불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예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멀쩡한 스카프를 잘라서 낡은 작업복에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서로 어울리는 천을 찾게 마련이다. 그리고 금이 간 병에는 포도주를 담지 않는 법이다.”(마태복음 9:14~17/메시지성경)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이니,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댄 조각이 그 옷을 당겨서, 더욱더 크게 찢어진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복음 9:14~17/새번역)

세리들, 죄인들과 식사하는 그 자리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묻고 있습니다. 바로 직전에 바리새인들이 왜 죄인과 어울리느냐고 물었다면, 요한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고, 요한의 제자들은 더욱 철저한 금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기적인 금식을 통해 민족의 슬픈 역사를 기억했습니다. 겸손히 회개하려는 뜻이었겠지만,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적인 금식으로 의심받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다가올 심판 앞에 금욕적 삶을 살려는 금식이었겠지만, 이 역시 공로주의적 금식으로 의심받습니다(김영봉, 『21세기 설교 가이드 마태복음』, 260-261).

▲ Vladimir Kush, “Shell”. 껍질뿐이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를 꼭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텅 빈 속까지 따스한 천국

율법주의의 위선만 아니라면 슬픈 역사를 기억하며 회개하는 금식이 왜 문제겠습니까? 공로주의만 아니라면 욕망을 절제하려는 삶도 왜 문제겠습니까?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물론 의도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핵심은 때입니다. 바리새인도, 요한의 제자도 때를 몰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도, 죄인들도 한 식탁에서 하나님 나라 잔치를 마음껏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욕망을 절제해서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릴 때가 아닙니다. 더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닙니다. 톰 라이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세례 요한의 운동을 포함한 다른 운동들은 새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해가 떠올랐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마태복음』, 155)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지상에서 살던 그대로 기도와 사랑에 흠뻑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부터 그들 마음과 삶속에서 천국이 시작된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여기서와 다른 일을 할 것이라 착각합니다. 여기에서 누리던 사랑의 잔치가 이어질 뿐입니다. 천국의 문은 죽은 후가 아니라 살아서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 여기가 하나님 나라라면,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면, 이라고 상상해봅니다. 그렇다면 행했을 작은 일들을 그려봅니다. 그 작은 일들이 하나님 나라의 씨알들입니다. 믿음은 다만 씨알을 뿌리는 삶입니다. 그 씨알로 숲과 열매를 이루시는 분이 계실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아직은 부족해. 필요한 것들이 충분히 갖춰진 후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그 긴장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아직”인 것으로 미루지 않습니까? 물질이 더 갖춰지고 더 여유가 있을 미래로, 성령이 더 충만지고 원수를 용서할 수 있을 만한 미래로 미루지 않습니까? 다이어트는 늘 내일 시작이어서 몸무게는 늘어만 가고, 하나님 나라 역시 늘 “아직”이어서 기도 속에만 존재합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지금 있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 잔치는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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