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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한 조선인 교육

기사승인 2019.05.23  19: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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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에도 교육주도권 다툼이 있었네 (3)

일제의 교육 목적은 식민지 백성들을 우매한 노예로 만들려는 황민화정책이었다. 일본인과 식민지 백성의 차별성과 동화를 목표하였다. 1911년에 발표된 ❰조선교육령❱은 식민지 교육의 본질이 일본어 중심의 실업교육과 보통교육으로서 통치와 침략을 위한 충직한 앞잡이, 친일주구의 양성임을 천명하였다.

일본의 조선인 교육의 목표

일제가 용정에 최초로 “간도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인 교육에 침투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한데는 정치적인 계산과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일본은 연변의 지리적 위치와 특수한 주민구성으로 볼 때 연변지역의 조선인을 회유하고 동화시켜야할 절대적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침략의 야욕으로 동북지역의 조선인이 일본의 “신민”임을 강조하여 중국경내의 조선인사무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였고 조선인에 대하여 교육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회유책을 세워 많은 혜택을 줌으로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켜서 중국 침략에 최대한 이용하고자 하였다.

둘째 일본은 중국경내에 있는 조선족의 민족교육을 억제하고 말살하고자 하였다. 나라가 망하자 많은 지사들이 동북경내로 이주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교회를 세우고 반일단체를 결성하며 민족교육과 근대교육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동북지역이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부상하였으며 그들의 눈에 “불령선인의 소굴”이 되었으므로 일제는 만주진출의 걸림돌이 되는 조선사립학교와 독립의지를 가진 투사들의 싹을 자르고자 하였다.

셋째 중국정부의 조선인교육을 억제하고 중국으로부터 조선인 교육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일제는 학교 설립과 조선인 사립학교에 대한 회유를 시작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조선인에 대한 중국의 동화정책을 미연에 차단하고 중국으로부터 조선인교육권을 빼앗아 자신들을 위한 충량한 식민지 백성을 양산하여 만주와 중국침략에서 최대한으로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간도공립보통학교, 일본이 세운 조선인 학교의 시작

1928년 5월 통계에 보면 공립보통학교가 5개, 만철회사가 세운 학교가 12개, 보조학교가 82개, 이민회사가 세운 학교가 4개로 총 103개 학교가 있었으며 교원 수는 365명, 학생 수는 11,493명이었다. 일본식민주의교육은 1908년 용정에 간도보통학교를 효시로 중국경내에 첫 발을 내디뎠다. “충량한 국민의 양성”에서 교육의 중점은 동화교육이었으며 동화교육의 핵심은 일본어교육이었다.

▲ 일제의 탄압에도 꿋꿋이 견디며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숭실학교”. 숭실학교에서 이루어졌던 천문학 수업 장면 ⓒGetty Image

조선학생의 민족의식을 근절시키고 친일감정을 일으켜 일본인화를 꾀하기 위하여 일본어 교육에 주력하였다. 1910년 후부터는 일본어를 국어로 조선어를 외국어로 취급하여 공개적인 동화교육을 추진하였다. 1909년 간도협약 체결 후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일제의 침략세력의 확대와 더불어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식민주의교육의 범위를 점차 일본영사관 및 영사 분관의 관할 범위인 연변 전체 지역으로 확장시켰다.

1915년 9월에 연길 국자가 상업지역에 간도보통학교 국자가분교를 설치하였다. 1916년에는 화룡현 두도구 상업지역에 두도구분교를 설치하였고 1917년에는 왕청현 배초구 상업지역에 배초구분교를, 1918년에는 훈춘 상업지역에 훈춘분교를 설립하였다. 이로써 연변지역의 일본의 식민주의교육은 그 범위와 체계, 시설과 설비 면에서 일정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일제의 일제의 공립보통학교의 설비와 교원의 조건은 조선인 학교 가운데서 가장 우월하였다. 일제는 훌륭한 건물과 시설로서 조선인 청소년들을 유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매달 용돈 지급, 교과서와 기숙사 무료 제공과 졸업 후에 취업을 알선하는 것을 입학조건으로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조선인 교육은 학생의 부족과 조선사회로부터 오는 반발심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변지역은 망명 지사들이 운집한 곳이었고 반일민족주의 교육이 제일 먼저 시작된 곳으로서 보편적으로 반일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어서 일본의 식민주의교육에 냉담하였다. 연변지역 내의 상술한 5개 보통학교는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경영을 맡고 학제, 과정설치, 교과서, 등 모든 교육과정과 활동은 모두 조선 국내의 교육제도를 기준으로 하였다. 학교운영비는 함경북도 지방경비로 충당하였고 교원은 조선국내에서 친일교원을 파견하였으나 반드시 일본인을 소학교에는 ‘교감’으로  중학교에는 ‘학감’으로 밀어 넣어 감시와 통제를 꾀하였다.

일제는 간도보통학교의 우월한 교육시설과 다양한 혜택으로 동북조선인에 대한 회유와 동화로 조선인들을 일본식민통치의 노예로 만들어 연변지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경비를 보조한 보조학교

간도협약에 따라 일본은 상업지역 외에 일반주민지역에서는 공립학교를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일반지역에 사는 조선인교육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비밀리에 동북 각 지역에 퍼져있는 조선인 서당과 사립학교를 포섭하여 교사를 파견하거나 보조금을 지불하여 간접적인 간섭과 통제를 시도하였다.

1908년에 이미 20여개소의 조선인서당에 보조금을 지불하였으며 보조금 수령사실이 드러나서 서당들이 폐교를 당하자 간도보통학교 졸업생들로 하여금 서당을 설립하여 운영하도록 사주하였다. 일제는 그들에게 무료 교과서 제공과 보조금지원을 통해서 조선인의 항일민족교육을 해제시키고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를 막음으로써 일반인거주지역에서의 식민주의 친일교육의 침투를 꾀하였다.

1913년 11월부터 1914년 11월까지 1년 사이에 연변지역에 신흥평서당, 배초구서당, 두도구서당, 하천평서당 등 보조를 받는 9개의 부속서당(학교)이 설립되었다. 1917년에는 부속서당이 21개로 증가하였으며 1928년에는 82개로 확장되었다. 1920년대 오지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생활형편이 어려워져 서당(서숙) 만들 수가 없었고 게다가 교원도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보조학교’에 자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오지의 사립학교도 존폐의 위기에서 일제의 보조를 받았다. 일제는 이를 미끼로 삼아서 조선 사립학교를 병탄하여 식민주의 친일교육의 장으로 만들었다.

조선인 사립학교에 대한 일본의 통제와 탄압

일본은 사립학교 대부분이 일본을 배척하는 항일민족주의교육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연변지구 조선인 사립학교에 대한 감독과 간섭을 강화하기 위하여 1909년 ❰간도사립학교에 대한 내부규칙❱을 만들어 조선인 사립학교에 적용하였다. 학교의 운영취지, 학교위치, 교원대오, 운영방법, 경비, 수업연수에 대하여 관할 파출소 소장에게 보고를 하고 비준을 받도록 엄격히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교과서를 써야한다고 규정하였다.

일본의 회유와 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사립학교들은 처음부터 항일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되었다. 또한 설립자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뜻을 둔 민족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각 사립학교는 신교육 전수와 동시에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1919년 3.13반일만세시위에 명동, 정동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300여명의 대오가 시위에 앞장을 서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친 일로 인하여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1919년 5월 27일에 간도총영사관에서 독립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18명의 무장경찰이 명동학교에 들이닥쳤다. 학교시설을 파괴하고 4명의 학생을 체포하여 회령으로 압송하였다.

1920년 ❰경신년대학살❱에서 조선인사립학교는 또 다시 일제의 토벌목표가 되었다. 일본토벌대는 훈춘현 회룡봉 현립 8소 교원 김홍석, 박현규 등 7명을 금당촌 숭실학교에 가두어 놓고 불태워 죽였다. 명동, 창동, 정동, 길동, 신동 등 쟁쟁한 사립학교들이 불에 탔으며 체포되거나 살해당한 사람들 중에는 사립학교의 진보적인 교원과 사생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1920년 10월 20일 오전, 명동촌에는 일본군소대장이 22명의 군인들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명동학교와 민가를 수색하였다. 수사에 응하지 않는 10명을 그 자리에서 참혹하게 살해하였다. 명동학교를 소각하였을 뿐 만 아니라 교원과 학생 및 마을 주민들을 마음대로 검거하고 학살하였다. 그 당시 체포를 당한 사람이 90명이 넘었다.

국자가에서는 길동학교와 창동학교를 소각하였으며 166명의 사생과 무고한 조선인들을 마음대로 학살하였다. 훈춘현의 신풍학교와 북일학교도 이 때 소각되었으며 교원과 교장 등이 사살 또는 체포당하였다. 경신대학살에 불에 탄 학교는 조선 측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59개이며 3664명이 피살되었고 155명이 감옥에 갇혔다. 일본의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과 통제, 회유와 보조에도 불구하고 동북지역에서의 일본의 식민주의 교육은 조선인사회에 광범위하게 침투하지 못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 일본의 조선인 교육기관은 숫자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식민주의교육도 가속화되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황민화에 목적을 둔 동화교육과 저급노동력 공급을 목표로 하는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학제와 과목설치에 있어서 “일본어”를 중심으로 한 적나라한 동화교육을 추진하였다.

또한 교육체계와 수준에 있어서도 의도적으로 조선인의 중등교육에 대한 욕구를 묵살하였으며 제한하였다. 식민지통치자들은 중등이상의 교육을 실시할 경우 조선인의 민족자각을 계몽하게 되며 결국 간접적인 반일인재의 양성을 부추겨서 스스로 식민 통치의 무덤을 파게 될 것임을 알고 조선인으로 하여금 농업, 상업, 공업 등 실업교육을 최선으로 간주하게끔 만들었다. 조선총독부와 만철이 조선인에게 실시한 교육은 기초교육보다 오히려 직업 교육에 편중되었다.

그들은 조선 학생들의 교육 정도를 초등단계에 국한시키고 중등학교나 고등학교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조선 학생들이 초보적인 노동기능을 가진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순응하는 “충량국민”으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연변의 조선이주민 역사에서 찾아본 해법

결국 중국 동북지역 조선인 교육사는 일본의 식민주의 교육권 장악을 막으려는 망국 백성인 조선인 민족주의자들과 중국정부의 동상이몽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동북지역의 이주조선인들의 교육권을 지키고자 하는 조선의 망명 지사 및 민족주의자들 몸부림과 희생, 절망과 희망이 눈에 보이고 가슴에 절절하게 느껴졌다. 자신들에게 유익한 대로 조선인들을 배려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칼을 들어 조선 사립학교를 탄압하는 중국이 일제와 대립, 갈등하면서 조선인을 자기편으로 동화시켜 동북지역을 파수하고자하는 치밀하고 신중한 노력과 집념이 예리하게 가슴을 찔렀다.

동북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빌미로 연변에 들어와서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의 본산인 조선인 사립학교를 강경과 회유의 방법으로 파괴하며, 학생과 교사들을 마구 살상하며 음모와 술수로 동북지역에 식민주의교육을 확장시켜가는 일본의 권모술수와 비열한 악랄함에 소름이 돋았다. 독재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바로 교육을 틀어쥐는 이유를 일본의 식민주의교육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깊이 깨달았다. 독재정권과 친일파들이 자기들의 독재와 친일 오명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과거 역사를 장악하고자 하는 근본 이유와 목적도 적나라하게 보았다. 독재정권이 역사왜곡과 날조에 많은 학자를 동원하고 언론이 거기에 가세하는지도 분명하게 보였다. 

평화로 가는 물꼬를 트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우리 앞에 그 당시처럼 중국과 일본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의 길을 방해하고 권모술수로 우리를 남북대립의 역사적인 올가미, 함정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세력들이 나라 안과 밖에 가득하다. 어떻게 위기와 난관을 극복하고 새 역사의 물꼬를 틀 것인가? 연변의 조선이주민 역사에서 그 해법을 본다.

참고서적

강영덕·남일성 외 5인, 『중국조선족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사, 1990년.
김춘선·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09년.
최석숭, 『훈춘조선족이민사』, 연변교육출판사, 2015년.
조룡호·박문일 외 다수, 『21세기로 매진하는 중국조선족 발전방략연구』, 료녕민족출판사 , 1997년.
김택·김인철 외 6인, 『길림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1995년.
심여추·심극추, 『20세기 중국조섬력사자료선집』, 연변인민출판사, 2002년.
김영만·리송영 외 다수, 『연변조선족사상』, 연변인민출판사, 2010년.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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