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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상숭배자인가(에스겔 6:1-4)

기사승인 2019.05.21  19: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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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천히 걷자

우상숭배 금지 명령은 신앙생활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성찰을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집중하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인 우상인가?’ 하는 질문에만 집중하게 되면 배타적인 신앙의 틀을 벗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천박한 행동입니다. 자기 교회의 내분과 갈등, 여러 가지 잘못된 점들을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단이나 타종교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것이 그 예가 되겠습니다.

에스겔 6장 1-14절은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의 최종 목적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7, 14절)고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에 관한 묵상은 이 말씀에 부합해야 합니다.

우선, 우상숭배는 인간의 탐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5) 즉, 유교적인 가족 제사상 앞에서 절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면서 욕심 사납게 “잘못 구하는”(약4:2) 사람들이 사실상 하나님을 부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고대의 우상과 현대의 우상 ⓒGetty Image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 헬라적인 도시 문명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더 이상 신을 만나려고 산꼭대기나 큰 나무나 시내와 골짜기를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에도 여전히 우상숭배가 나타나는 까닭은 “그들의 신은 배”(빌3:19)라는 바울의 통찰에 나타나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등지게 만드는 요인이 산당이나 우상이 아니라 사람 안의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두려움에 대해서도 탐욕과 마찬가지로 깊이 성찰되어야 합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눅12:5)가 아닌 존재를 두려워 하는 마음이 우상숭배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믿는 신이 정말로 살아있다면, 왜 온갖 잡다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며”(11절)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 있을 때 주로 손뼉을 치지만, 성서에서는 주로 분노를 표출하거나 상대방을 조롱할 때 손뼉을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탐욕 때문에든, 근거 없는 두려움 때문이든 하나님을 등지고 불의와 부정함에 빠져 든 자들의 결말을 하나님께서 비웃으신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 고백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원리가 분명하다면 굳이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혐오감을 조장할 필요도 없고, 어디 가서 잔뜩 얻어맞고 온 사람처럼 증오에 찬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다른 부수적인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라는 바로 이 고백임을 잊지 맙시다.

여상범 목사(제주신흥교회) uptiger@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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