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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위한 투쟁

기사승인 2019.05.16  18: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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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하는 자들이 기억하는 자들을 만들었다 (5)

예루살렘에서의 삶이 포로로 인해 짓밟혔을 때인 기원전 587년의 낙담 이후에, 유대교는 자신의 규범적인 기억을 재생하기 위한 심한 투쟁 중에 있었다. 잊어버리는 것이 강제이주를 만들었던 것처럼, 기억하는 것은 회복과 귀환을 위해 필요하다. 한 본문 속에서 예레미야 이후 수 십년이지만 에스라와 느헤미야 이전인, 이사야의 시는 아래의 재촉을 할 수 있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사 51: 1b-2)

시는 하나님과 바르게 되기를 원하는 포로 중에 있던 자, 즉 의를 추구하고 야훼를 찾아 구하는 자에게 이야기를 건넨다(1절 참조). 그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 창세기에 이르기까지, 기억을 회복해야 한다. 특별히 여기에서 으뜸가는 기억은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기억이다.

▲ Erich Holmlund, Isaiah 51:11, 48″x36″ Acrylic on Canvas ⓒhttp://www.ericholmlund.com/art/prophetic/isaiah-5111

이 특별한 장소에서 시가 모세와 토라에게로의 복귀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와 약속의 회복을 재촉하고 있다. 정확하게 낙담과 절망의 시절에, 언급이 되는 것은 이 최초의 조상들에 대한 것이다. 감히 하나님과 논쟁을 했고(창 18:22-23), 하나님의 약속을 비웃었다(창 17:17). 그러나 또한 하나님을 신뢰했으며(창 15:1-6), 완전한 복종으로 자신의 귀중한 아들을 위험에 빠뜨렸던(창 22:1-14), 아브라함과 이 희망 없는 늙은 사람의 옛날 이야기들 모두를 기억하라.

우리 가족의 어머니, 아이를 낳지 못하고 희망이 없는, 절망적이며 비웃고 있는, 사라를 기억하라(창 18:12-15).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그녀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셨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부활절의 순수하며 활기찬 웃음을 웃은 사람은 바로 사라이다(창 21:6-7).

기적들을 기억하고, 불가능한 것들을 기억하며, 관습적인 가능성에 거슬러 현실을 규정하는 이야기들을 기억하라. 거룩함이 능동적인 힘이며, 약속이 매우 뚜렷한 대리인이고, 섭리가 가장 중요한 현실인 너희의 삶의 이야기를 기억하라. 기억하라, 그런 다음에 거짓인 현실의 파괴적인 정의들을 뿌리쳐 떼어내라.

이사야 51장의 시는 바빌론의 제국 이념이 한창일 때 잡혀온 포로들에게 이야기된다. 그 이념은 선전표어로 약속을 취소시켰고, 현재의 포만감에 의해 약속을 염두에서 살아지게 했으며, 제국 권력의 무자비한 요구들에 의해 섭리를 부정했다. 기억한다는 것은 파괴적인 과거에 의해 정당하다고 인정된 양자택일의 현재에 대한 어려운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런 파괴적인 과거가 포기될 때, 양자택일의 현재는 완전히 뜻대로 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포로기의 이 시에 대해, 그렇다면 선택이 들리고 이야기된다. 기억을 선택하라, 그러면 너희는 자유로운 양자택일의 일을 착수하게 된다. 기억상실을 선택하라, 그러면 너희가 불가피하게 얻게 될 것은, 현상을 절대화하고 양자택일의 어떤 상상도 방해하는, 제국의 환원하는 절망이다.

최성일 교수(한신대 신학부/선교신학) sungildabang@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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